•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
        2009년 11월 03일 02: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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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탈리아 <피사대성당> 1063~1118년

    스콜라철학의 시대 – 아리스토텔레스의 부활

    스콜라(Scholar)라는 말은 궁정학교를 Scholar라고 부른데서 생겨났다. 유럽 각지의 수도원에 학원이 설립되었는데, 이 학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철학의 부흥이 일어난다. 스콜라철학은 1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발생하여 13세기경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때 이들 학원의 일부는 대학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 후 14~15세기의 쇠퇴기를 거치면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스콜라철학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이다. 스콜라철학자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들이 번역된다. 그 이전에도 <범주론>과 <해석론>이 번역되어 있었는데, 이를 통해 주로 논리학자로서만 인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12세기에 들어서면서 <형이상학>을 비롯하여 <자연학>과 <영혼론> 등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거의 전체가 번역되면서 당시의 학자들에게 풍부한 지적 자극을 주게 된다. 여기에는 아랍사상가들에 의한 그리스 철학 번역과 주석도 지적 자료로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기독교 성립기의 교부철학에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이 컸다면, 아랍권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폭넓게 수용되어 있었다. 그 결과 과학과 문화가 서유럽에 비해 더 풍부해지고 있었던 사실이 유럽에 현실적인 자극을 주었다.

    그리하여 플라톤 철학의 좁은 틀에 갇혀 있었던 교부철학을 넘어 조금은 더 폭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환영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리스 철학의 범신론적 경향은 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을 포함한 모든 우주를 신에 의한 창조로 규정하고, 또한 물질세계에 대한 관심을 천박한 것으로 취급하던 기독교 입장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그래서 1210년에 열렸던 파리의 종교회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및 그에 대한 주석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나아가서 이성의 독립적인 활동을 강조하는 <형이상학>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러한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거리가 있는 논리학과 윤리학은 연구와 강의가 자유로운 편이었다.

    하지만 중세 사회가 정착되면서 신플라톤주의와 교부철학에 의해 확립된 초기의 협소한 신학을 더 체계화하고 합리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또한 기독교 신앙과는 별도의 발전 과정을 가진 철학체계에 대한 발견은 새롭게 기독교 교리를 정립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기독교가 플라톤 철학을 흡수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듯이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 교리를 그대로 접합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 교리와 접목시키기 위한 작업이 별도로 필요하게 되었다.

    중세 신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은 9세기부터 12세기 중엽까지 전개된 보편논쟁을 통해 스콜라철학 형성에 크게 작용을 한다. 보편논쟁이라 불리는 실재론과 명목론의 사상적 대립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깊은 탐구를 요구하게 된다. 보편논쟁은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보편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사고 속에만 존재하는가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명목론은 플라톤의 이데아 실재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형상이 질료와 결합해 있다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중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 관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단순한 명칭에 불과하며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1세기 후반의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가 대표적인데, 보편은 개별적인 사물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실재한다고 규정한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확립된 삼위일체에 대해서도 유명론적 입장을 견지하며 비판한다. 성부와 성자, 성령이 각각 셋인 것이며, 셋이 하나라는 것은 명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셋이 하나라고 상상할 수는 있지만, 상상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재론은 플라톤의 이데아 실재론의 연장선에 서있다. 보편적인 관념은 인간의 감각세계를 초월하여 실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감각에 나타나는 개체로서의 사물은 이러한 관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1세기 후반 캔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가 대표적 인물인데, 보편은 개별적 물체에 앞서 실재하며 개체는 근원적인 보편자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담화>에서 신은 “그 이상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만큼 완전하기 때문에 관념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존재론적 신 존재증명’을 하는데, 개별적인 사물들은 완전하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점, 상대적인 것들은 절대적인 것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라는 점, 현실의 파생된 개별 사물의 존재 자체가 그 근원에 해당하는 절대적인 존재의 불가피성을 증명한다는 점을 통해 하나의 유일한 원인이자 스스로 존재하는 원인에 해당하는 신 존재의 증명을 시도한다. 결국 그는 초월적·초자연적인 존재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여 기독교 교회의 권위를 지지하였다.

    보편논쟁 과정에서 실재론의 변형으로서 좀 더 온건한 실재론을 펼친 개념론도 나타난다. 보편을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보편자와 물질세계와 연관된 보편자로 구분하여 보편과 개체의 관계를 다르게 규정하려는 시도를 한다. 보편은 정신에서는 개체에 앞서며 자연에서는 개체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보편의 존재 자체와 그 보편에 대한 인식 과정을 구분하여 접근한다. 정신적인 보편자가 실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인식에서는 개체 뒤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재론의 입장에서 명목론과의 절충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보편논쟁은 기독교 교리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 논쟁이었다. 명목론은 정통 기독교 교리에 위협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먼저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중세 신학의 출발점이었던 원죄설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갈 수 있는 논리였다. 명목론에 따르면 원죄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관념상의 것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를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설정함으로써 과거 유대교와 구별정립을 가능케 한 삼위일체론 역시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서는 교부철학에 의해 형성된, 신이 이 세상에 관여하고 또한 인간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통로로서 교회 자체, 즉 보편적인 교회라는 개념이 부정될 수 있었다.

    명목론에 따르면 다만 수천 개의 개별적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지, 보편적인 교회라는 생각은 하나의 명칭에 불과한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보편논쟁은 논리와 철학이 어떻게 신앙과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즉 대립된 우주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의 대립이었다.

    하지만 이들 스콜라철학자들이 전혀 다른 출발점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들의 공통적인 관심은 이성과 신앙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작업을 더 진전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도 나타난다.

    아퀴나스 이전의 가장 중요한 스콜라철학자로 손꼽히는 안셀무스 역시 이성과 신앙의 일치를 강조했다. 신앙은 지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신앙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문제의식이 그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서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이성으로서 설명하려고 감행하기도 전에 먼저 믿어버리고 나서는 우리가 믿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소홀함이 발생한다면 도대체 올바른 순서란 무엇이겠는가?”라고 묻는다. 이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신앙이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유명한 신학적 명제인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믿음을 강조한 것을 넘어서는 발상을 반영한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신앙이 이성보다 중요하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가 이 명제를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신앙은 계시의 내용을 이성적·합리적으로 연구해야 완성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알기 위해 믿는다’는 명제는 중세라는 시대적 한계 내에서 터져 나온 이성의 외침이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르다. 아벨라드(Abelard)처럼 저울추를 이성 쪽으로 더 당겨놓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안셀무스가 교리적 체계에 대해 의지적 승복을 먼저 하고 이를 이성을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를 했다면 아벨라드는 이성의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안셀무스의 ‘알기 위해 믿는다’는 명제를 삼위일체론에 적용하면, 삼위일체의 실재론을 전제로 하고 그 후에 이성적인 추리과정을 통해 이를 증명하고자 하는 과정을 말한다. 하지만 아벨라드는 ‘믿기 위해서 안다’라고 함으로써 이 명제를 뒤집는다. 이성에 의한 점차적이고도 주관적인 시험을 먼저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철학적인 변화는 미술에 있어서의 변화도 동반하게 된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중세사회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교회의 권위를 상징하는 거대한 교회 건축이 더욱 활성화된다. 또한 스콜라철학에 접어들어 교부철학에 비해 이성과 자연에 대한 관심이 더 확대되자 예술적 표현에 있어서도 과거에 비해 사실주의적인 요소도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 프랑스 <생 세르냉 성당> 내부, 1070~1096년 / 생 세르넹 성당 조각 <존엄한 예수>

    스콜라철학이 발전하던 10세기부터 12세기 중엽의 유럽 미술을 특징짓는 것은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이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먼저 건축에서 출발한다. 이탈리아의 <피사대성당>, 프랑스의 <생 세르냉성당> 등이 로마네스크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네스크는 유럽 전 지역에 걸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첫 번째 미술 양식이기도 했다.

    과거 그리스는 물론이고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던 헬레니즘 시대나 로마제국 시대의 경우도 그리스나 로마의 미술 형식이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치기는 했으나 하나의 양식이라고 할 만큼의 공통적인 형식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유럽 전반에 걸친 기독교의 승리를 계기로 성당 건축을 중심으로 한 유사한 형태의 미술 양식이 형성된다.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교회의 건축은 기독교의 승리 시대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상징이었다. 교회가 이념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현실 권력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 후, 그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상징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신의 나라를 상징하기에 교회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었기 때문에 유럽의 각 지역에 성당 건축의 붐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유럽 전 지역에 걸친 기독교의 승리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토착화가 요구된다. 각 지역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독자적인 전통과 종교적 흔적이 있기 마련이다. 절대적인 유일신의 약점은 다양한 지역적인 정서를 다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각 지역에서 기독교 포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을 성인(聖人)으로 추대하고 성인의 뼈를 숭배하는 성골숭배 관습을 만들어낸다. 성직자들은 성골(聖骨)이 기적을 행한다는 설을 퍼뜨리게 되고 시민들은 성골을 찾아 순례 여행을 떠나는 유행이 만들어진다. 건립되는 주요 성당에 성인으로 이름 붙여진 인물의 뼈를 보관하고 성골에게 기도하기 위한 성지 순례를 관례화함으로써 기독교는 각 지역의 토착적인 정서와 융합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건립된 다수의 성당은 순례식 성당이었다. 대부분의 성당은 예배를 방해하지 않고 교회 내를 돌아볼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놓았으며, 교회의 바깥에도 순례자들이 성당 전체를 둘러볼 수 있도록 길을 내놓았다.

    로마네스크란 명칭은 로마(Rome)와 네스크(nesque)의 합성어로 ‘로마같다’라는 뜻이다.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이었던, 아치형을 본뜬 돌로 만든 천장과 두꺼운 벽, 작은 창문 형식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피사대성당>을 보면 먼저 웅장한 외관이 사람들을 압도한다. 마치 돌로 이루어진 산처럼 수만 년이 지나도 변화가 없을 것만 같다.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기둥이 성당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위대한 신의 권위를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장엄하다. <생 세르넹성당> 내부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성당 안에 있는 인간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높은 천장과 두꺼운 기둥이 시선을 압도한다.

    권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장중함과 엄숙한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리스나 로마가 그러했듯이 거대한 석조건물이 제격이었다. 또한 완전한 존재인 신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영원히 불에 타지 않는 돌로 만들어진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거대한 건물을, 그것도 돌로 만든 천장을 지탱하는 것이 문제였다. 돌로 만든 천장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두꺼운 벽과 굵은 기둥이 필수적이었다. 두꺼운 돌기둥을 이중으로 촘촘하게 배열하다 보니 실내는 <생 세르넹성당> 내부 모습처럼 긴 터널식의 공간을 만들게 된다. 두꺼운 벽과 기둥 때문에 창문은 작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어서 낮에도 실내조명을 해야 할 정도로 어두침침한 모습이다.

    거대한 석조 건물은 조각과 회화에도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먼저 중세 초기에는 우상숭배 이미지가 강해 금기시되었던 조각이 활성화된다. 거대한 석조 건물에 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교회를 둘러싼 벽에 다양한 부조 형태의 조각이 요구되었다. 교회 건축의 일부로서 조각은 건축과 일체를 이루게 된다. 교회 정문을 비롯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아치 모양의 반원형 공간, 기둥의 위쪽 끝부분에 집중적으로 조각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교회 내부도 성직자들이 예배를 보는 제단을 비롯하여 곳곳에 큰 규모의 벽화 제작도 활성화된다. 조각이나 회화의 소재는 당연히 성경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주로는 예수와 연관된 이야기나 성인의 순교와 관련된 것이 조각과 회화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 시기의 조각과 회화를 보면 중세 초기 미술에 비해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상대적으로 강화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철학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부활과 함께 미약하나마 그리스 미술의 사실주의적 요소도 함께 부활을 하게 된 것이다. 여전히 신학을 중심으로 하여 성서 속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자세한 묘사는 생략되고 스토리 위주의 그림이 그려지는 한계는 여전했지만 나름대로는 조잡한 삽화의 수준을 뛰어넘어 하나의 작품으로서 자체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이 나타난다.

    또한 이야기 전개를 위해 작품 속에서 무리하게 시간과 공간개념을 무시하고 비논리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행위도 조금씩 줄어들게 된다. 생 세르냉성당의 외부 벽을 장식하고 있는 <존엄한 지배자 예수>를 보면 그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사실적 완성도가 높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예수의 양쪽 무릎을 연결하고 있는 옷의 주름이다. 조금 더 높게 세운 한쪽 무릎에서 다른 쪽 무릎으로 흘러내리는 옷의 주름을 통해 신체의 사실성을 높이려 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책을 잡고 있는 손의 손톱이나 오른 손의 손가락 마디 표현과 같이 세부적인 표현에 신경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직은 전체적으로 자세도 어색하고 오른 손이나 왼쪽 발을 감싸는 의복의 주름이 지극히 형식적이긴 하지만 그리스·로마 조각의 사실주의적인 전통이 조금씩 부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치마부에 <십자가의 예수> 1280년경

    아퀴나스의 인식론

    기독교의 승리 시대에 기독교에 대한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위협도 시작되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 중의 하나는 언제나 발전의 정점에서 위기도 함께 시작된다는 점이다. 특히 새로운 사회의 변화는 기존의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이념에 대한 광범위한 의심을 동반하게 된다. 중세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몇몇 요소들이 이제 걸림돌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먼저 외부에서의 자극은 십자군운동을 계기로 작용한다. 신과 교회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은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십자군 운동은 중세 기독교 문화가 아랍 철학자들에 의해 보존, 연구되어온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만나도록 해주었다.

    발달한 이슬람의 자연과학의 유입 등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변화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정립된 신에 대한 철저한 복종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물질세계에 대한 극도의 부정을 전체로 한 플라톤적인 요소로는 자연과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나 생산력의 증진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이 점차 분명지게 된다.

    내부에서의 자극은 기독교의 민중적인 확산과 연관이 있다. 기독교의 승리는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대중화를 동반하게 된다. 처음에는 소수의 교부들에 의해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위계체제에 의존하여 기독교에 복종시키는 것이 가능했겠지만, 기독교의 승리가 현실화될수록 교리에 대한 대중적 공감과 이해를 필요로 하게 된다.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평신도 운동은 이에 대한 대응이었다. 평신도 운동의 확산됨으로써 과거와 같은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교리 전달만으로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대중적 공감과 복종을 이끌어내기 어렵게 되었다. 대중적인 공감을 위해서는 대중의 상식적인 인식에 접목된 신학이 전제되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의 물질세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플라톤에 기초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으로는 인반 대중의 상식을 넘어선다는 한계가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었다.

    즉, 당시 신학은 두 가지 방향으로의 변화를 요구받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중세사회의 생산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의 변화,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적이고 상식적인 공감을 이룰 수 있도록 합리화하는 방향으로의 변화였다.

    이러한 과제를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철학적 무기를 제공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방법론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체계라는 새로운 대안적 가능성을 제공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 내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할은 플라톤에 의해 극단적으로 관념화된 소크라테스를 현실로 끌어내려 체계화,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그 역할이 중세사회에서 다시 요구받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아리스토텔레스는 부활의 길로 들어선다.

    중세 신학의 체계화, 합리화 과제를 집중적으로 수행한 인물이 바로 ‘스콜라철학의 왕’이라 불리는 아퀴나스(Aquinas, 1225~1274)였다. 그는 중세 초기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을 기독교화시켰듯,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화하는 데 몰두했는데, <신학대전>은 그 성과의 집대성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논리학, 형이상학, 신학, 심리학, 윤리학, 정치학 등을 다룬 21권으로 된 방대한 저작이다.

       
      ▲ <이단자를 타파하는 아퀴나스>

    신학의 합리화를 통한 대중화는 <신학대전> 머리말에도 잘 나타나 있다.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는, 이미 신앙을 받아들인 기성 신자들뿐만 아리나 신앙 입문자들은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권고에 따라 가르쳐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이와 같은 여러분들에게 간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고 젖을 먹였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의도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에 관한 모든 것을 신앙 입문자 교육에 가장 알맞도록 진술하자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인식론과 관련된 내용은 형상과 질료에 대한 태도. 이성과 인식의 문제, 신학과 철학의 관계 설정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신의 존재증명과 형상-질료 관계]

    아퀴나스의 존재론은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존재론의 기본적인 특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아무 것도 스스로의 원인이 될 수는 없고, 우리는 자기 스스로가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그 운동의 원인은 우리 바깥에 있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구체적 내용을 들어가면 어떤 경우에는 미묘하게, 또 다른 경우에는 좀 더 분명하게 철학적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중세 철학의 특징이 신학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리에서 그의 인식론을 이해9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아퀴나스의 존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범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전개된다. 아퀴나스는 구체적 실체는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지는 개별적 합성체이며 물질적 세계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수용한다. 그는 존재란 물질적인 실체나 비물질적인 실체를 현실적으로 존재자이게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본질은 이러한 존재와 합성하여 구체적 존재자이게 한다. 즉 존재자는 존재와 본질의 합성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활용하여 존재가 현실태라면 본질은 가능태에 해당한다.

    하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인과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의 존재의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존재자들은 스스로 자기 존재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존재는 움직임을 갖는데, 움직임을 갖는 모든 것은 어떤 것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인과관계의 최초 작용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현실에는 수많은 우연적 존재가 있는데, 우연은 오직 필연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어떤 필연적 존재자가 없다면 어떤 우연적인 존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연적 존재자 역시 필수적이다.

    이 모든 것은 신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신의 당위성이 설명된다. 모든 존재와 변화 원인으로서 신의 존재를 필수적인 것으로 증명한다. 신은 제 1원인이며, 신은 순수한 활동이며, 가장 참되고 완전한 존재이며, 절대적인 본질이며, 그리고 만물의 근원이요 끝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분히 아퀴나스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하나로부터 유출되듯이 다른 모든 것들이 생성되었다는 점, 이를 논리적인 필연성을 통해 증명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주의와 연결된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보편적인 원인에서 전 존재가 흘러나오는 것, 바로 이 유출이 창조이다."라고 규정한다. 이 때 유출된 것을 원형에 비하자면 모상(模像)에 해당한다. 그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신플라톤주의를 상징하는 플로티노스의 ‘근원적 일자’ 개념이나 유출설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증명 과정에서 현실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점, 현실태와 가능태를 활용하여 존재와 본질을 규명하는 점 등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과 현실적 존재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내용에 있어서도 신플라톤주의나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모든 존재자들은 관여를 함으로써, 즉 신의 질서에 참여함으로써만 존재한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신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신이 일차적이고 근원적이라는 점이야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일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신의 질서가 현실적 존재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신의 질서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현실적 존재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렇다고 해서 신이 현실적 존재 외부에 별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플라톤의 이데아 실재론을 넘어서 형상과 질료의 결합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형상과 질료의 결합은 아퀴나스의 논리 가운데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인간 존재를 규정함에 있어서도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아퀴나스는 생명의 탄생을 논하면서 생명의 시발점이 자궁 내의 피라고 규정한다. 자궁의 피에 신, 하늘의 영혼들, 천체, 아버지와 그 정액 등의 요소들이 작용을 함으로써 생명이 탄생된다고 설명한다. 오직 비물질적인 근원적 일자, 신에 의해서만 모든 것이 창조된 것으로 보는 신플라톤주의에서 벗어나 물질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형상과 질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 수용은 아퀴나스의 영혼 개념에서도 나타난다. 플라톤으로부터 플로티노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영혼을 영적 실체로 이해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인간의 영혼이 신체의 형상이자 능동성이라고 주장한다. 인간 영혼이 신체와 분리된 별도의 영역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혼은 신체와의 결합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그의 영혼론은 형상의 질료의 결합을 통한 실재를 분명하게 강조한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물이 육체의 형상으로서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고 본다. 이 역시 영혼은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극히 자연적인 실체에 다름 아니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신학이론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영혼이 소멸할 수 있는 질료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면 기독교 교리를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하던 영혼불멸설이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학의 입장에서는 영혼이 육체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해야 영혼을 통해 죽음 이후에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그는 영혼은 육체의 본질적이고 유일한 형상으로서 존재하며 육체에 직접적으로 결합된 지성이라고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인간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아퀴나스는 각각의 인간은 영혼 안에 자신의 고유한 지성을 소유하며, 그 영혼은 파괴되거나 소멸할 수 없는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조토 <그리스도 죽음의 슬픔> 1304~6년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서 존재를 규정한 아퀴나스의 신학은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으로 물질세계를 극도로 부정하던 기존 신학은 물론이고 예술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존재와 존재의 작용에 있어서 질료의 일정한 역할 인정은 물질세계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게 된다. 자연스럽게 중세 초기에 비해 물질세계에 대한 관찰과 묘사가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회화에 있어서는 인간과 자연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사실성을 높이는 쪽으로 작용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치마부에(Cimabue)는 새로운 미술 경향을 개척한 화가였다. <십자가의 예수>는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이 지배하던 시기의 미술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물론 이 시기의 미술 역시 신의 영광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의 역할을 한 점에서는 이전의 목적과 동일하지만 구체적인 회화적 표현에 있어서는 사실적인 요소가 두드러지게 진전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림을 보면 세상과 우주를 지배하는 신으로서의 장엄한 예수가 아닌, 고통에 찬 예수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과거의 예수는 심지어 십자가에 매달린 장면조차도 눈을 뜨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불멸의 이미지를 살리려 하였다. 하지만 치마부에의 그림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 치마부에 <십자가의 예수> 부분

    무엇보다도 신체의 생생한 묘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머리는 옆으로 기울었고 십자가에 매달린 몸은 활처럼 휘어져서 밑으로 축 처져있다. 손과 발, 몸의 근육도 그리스 미술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지만 나름대로는 사실성을 반영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특히 이 그림의 압권은 예수의 표정이다. 그의 눈은 감겨 있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고난과 아픔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인간적인 측은함마저 느끼게 된다. 또한 얼굴과 몸의 묘사에서 적극적으로 명암법을 사용하여 인체의 볼륨감을 살리고 있다.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 그가 사실을 무시하고 단순화, 정형화로 치닫던 미술 양식을 벗어나서 현실을 관찰하고 그에 입각하여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실적인 것, 감성적인 것에 대한 치마부에의 새로운 관심은 하나의 혁신이었고 전환점이었다. 이 혁신성은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조토(Giotto)에게 이어져서 더 발전된 표현 방식을 정착시킨다.

    <그리스도 죽음의 슬픔>은 치마부에가 시작한 변화가 어디까지 발전, 확대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십자가에서 내린 죽은 예수를 안고 어머니가 슬퍼하는 장면이다. 어머니 마리아는 죽은 예수의 목을 끌어안고 통곡을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머리맡에서 두 손을 든 채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몸을 굽히고 마치 예수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팔을 뒤로 벌리는 있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 요한이다. 하늘의 천사들도 예수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관찰과 묘사의 사실성이 한 단계 더 진전되어 있음을 여러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예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몸을 측면으로 묘사하고 있다. 과거에 예수나 주요 성인은 정면으로 그림으로써 그 위상을 드러내도록 하였다면 조토는 앞면, 측면, 비스듬한 면 등 실제의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면을 그대로 담고 있다.

    심지어 맨 앞의 두 여인은 중세 초기 회화에서 볼 수 없는 뒷모습이 그대로 보이도록 배치하고 있다. 특히 몸을 숙인 채 두 팔을 위로 벌리고 있는 요한의 오른손 묘사는 조토가 사실에 대한 관찰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세 초기의 회화 감각으로 보자면 목에 손이 달려 있는 것 같은 이러한 장면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요한과 예수의 발을 잡고 있는 여성의 의복 주름을 보면 마치 그리스 조각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입체감이 살아있다.

    앞서 보았던 생 세르넹 성당의 <존엄한 예수>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신체의 부피감과 동작을 주름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치마부에게서는 여전히 한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획일적인 표정과 동작을 보여주고 있었다면 조토는 다양한 동작은 물론이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각기 다른 표정을 통해 다양한 감정 묘사에 성공하고 있다. 땅위의 인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10명에 이르는 하늘의 천사도 똑같은 동작을 하고 있는 경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현실의 다양성을 반영하려 노력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개별 인물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공간에 대한 사고의 변화도 눈여겨 볼만하다. 물질세계에 대한 관심의 증가가 미술에 있어서 공간 감각의 합리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세 초기의 회화는 성경 속의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목적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좁은 공간에 여러 사람을 구겨 넣듯이 하여 비현실적으로 배치되는 경향이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보면 예수 왼편의 밀집한 여인들로부터 예수를 만지고 있는 인물들을 거쳐 오른편의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공간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있음직한 공간배치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2~13세기 스콜라철학 시대에 이르러 추상적이고 상징에 치중한 과거의 이미지 대신 감각적이고 실제적인 이미지가 회화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아퀴나스에 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부활, 질료와 형상의 결합은 철학적으로 종교성과 인간성, 신의 세계와 현실 세계의 융합을 이루어내고 미술에 있어서도 추상성과 사실성의 융합을 성위해내는 데 까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감각과 이성 그리고 인식]

    인간의 영혼이 신체와 결합된 것이라는 아퀴나스의 관점은 인간의 지식에 대해서도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다른 결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는 인간의 영혼을 신비적이거나 신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으로 끌어내렸다.

    그는 인간의 지성을 능동지성과 수동지성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여기에서 능동지성은 감각을 이용한 개별적인 경험에서 보편적 관념들을 추상해내는 인간의 능력을 의미한다. 수동지성은 능동지성을 통해 추상했던 보편적 관념들의 저장소이자 그 관념들을 사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가 보기에 능동지성은 모든 인간이 자연적인 힘으로서 영혼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신체와 결합된 형상이기에 인식은 감각기관을 통해 형성된다. 결국 진리에 다가서는 것은 초월적인 무엇인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료적인 사물과 그에 대한 인간의 감각, 또한 이와 연관된 지성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설(照明說)과 대비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빛이 비추어서 무엇인가를 볼 수 있듯이 신에게서 계시가 내려옴으로써 비로소 이데아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식의 출발이 초월적인 계시에 있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인식은 감각과 무관한 직접적 직관을 통해 물질적 세계로의 인식으로 내려오는 하향적 관점이었다. 이 과정에서 감각의 역할은 부정되고, 이성 역시도 부차적인 역할로 한정되었다. 그런 점에서 신은 인식 대상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인식의 출발은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비롯된다. 인식은 보편적인 존재인 신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개별 사물들에서 출발한다. 우리들은 돌의 본질은 항상 개별적인 돌에서, 말(馬)의 본성은 개별적인 말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각자가 서로 다르게 관여함으로써 서로 다른 존재자가 된다."고 한다. "신은 모든 것을 똑같이 창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존재의 단계를 갖고 있지 않은 우주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존재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존재의 본질에 나가 설 수 없게 된다. 이를 통해 플라톤이나 신플라톤주의적인 관념론과 자신을 구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퀴나스가 감각의 종합이 곧 인식이라고 본 것은 아니다. 아퀴나스는 자연 대상에 관한 지각은 그 물질과 결합되어 있는 형상을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수용한다. 물질적 대상에 대한 감각의 작용은 아직 질료성이나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감각에서 출발하되 질료성과 개별성을 넘어서 형상과 보편성으로 추상화하는 과정이 별도로 필요하게 되는데, 이 능력이 바로 능동지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아퀴나스 역시 경험론자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조명설처럼 영혼이 신체나 감각과는 무관하게 질료와 분리된 형상, 계시된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퀴나스는 만약에 영혼이 이미 질료로부터 분리된 형상만을 받아들이고, 감각은 배제되는 것이라면 영혼과 신체가 결합해있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플라톤을 반박한다. 만약 플라톤의 주장이 참이라면 선천적인 시각 장애자도 빨간 색이 어떤 색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성은 감각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는 지성의 활동 과정에 대해서도 분석을 한다. 지성에 대해서는 <신학대전> 1부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지성의 첫 번째 활동으로 “우리들에게 개별적인 것의 인식은 보편적인 것의 인식에 선행한다. 이것은 감각적 인식이 이성적 인식에 선행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감각에서나 이성에서 보다 일반적인 대상이 덜 일반적인 대상의 인식보다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지성의 활동 과정 혹은 순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개별적인 사물에 대한 감각에서 출발하여 보편적인 개념에 이르고, 이러한 보편화된 이성을 통해 다시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것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는 개별에서 보편으로 그리고 다시 개별로, 그러한 의미에서 구체에서 추상으로 그리고 다시 구체로 향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지성의 두 번째 활동은 “인간의 지성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과정에 놓여있는 탓에, 한 번에 현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 그래서 추상 활동을 통해서 대상 사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다음에 속성과 우유성, 존재 방식, 상황 등을 알게 되는데 여기에서 지성이 요소간의 결합-분리와 긍정-부정적 판단을 하고 다른 판단으로 추리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어떤 것이 진리인가에 대한 지성의 판단활동을 다루고 있다. 종합과 구분, 긍정과 부정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판단을 판단 결과와 실재와의 일치 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가 <신학대전>에서 진리에 대해 다루면서 “진리란 지성에 있는 질서를 가리킨다.”, “사물이 그 조물주의 관념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진리는 사물 속에 있다. 그리고 지성이 사물에 일치할 때 진리는 인식하는 지성 속에 있다. 그러므로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이다.”라고 강조했듯이 판단 결과와 실재의 일치가 진리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영혼이 물질에 해당하는 신체와 결합되어 있는 까닭에 비물질적 실체에 대한 인식은 매우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신학대전> ‘영혼은 어떻게 자기 능력을 넘어서는 것들을 인식하는가’에서 “이승에서의 인간 지성은 감각으로 묶여 있고 따라서 직접 물질적 사물들에로 향한다. 감각으로부터 그에게 제공된 것들을 자시 자신의 추상 작용을 통해 비물질화시켜 인식한다. 비물질적 실체들에 대해서는 직접 인식하지 못하고 그 결과들로부터 오직 간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비물질적 실체들은 다른 본성에 속하므로 그것들을 완전히 인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물질적 실체의 대표적인 것으로 신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우리 지성이 창조된 비물질적 실체들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다면, 더 더욱 창조되지 않은 비물질적 실체 즉 신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는 없다.”고 한계를 분명히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랑이나 신과 같은, 비물질적 실체에 대해 아무런 인식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학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의심스러운 영역이 될 수밖에 없다.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인 영혼은, 비질료적인 순수 형상은 아니므로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비물질적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물질적 실체에 대한 접근은 최고의 비물질적 실체인 신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도 완전한 인식은 아니고 비물질적 실체의 일부분만 인식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그가 ‘신의 협력’이라고 규정한 점이다. ‘신의 협력’이라는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발상법을 지니고 있다. 조명은 일방적으로 한 족에서 다른 쪽을 비추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인식의 주체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신의 협력’에서는 신의 역할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인간이 인식의 주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아퀴나스에 이르러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아퀴나스 역시 신학자로서 신에 의한 세계와 인간의 창조 입장에 서있기 때문에 아직 인간 정신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데에 이르고 있지는 못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 신학과 대비해 볼 때 인간 정신의 상대적인 독립성 혹은 상대적인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 두치오 <수태고지> 1308년

    개별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식의 중요성은 미술에 있어서 인물의 배경을 이루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재현하려는 태도로도 연결된다. 배경은 무시되고 인물들을 통해 성경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머물렀던 과거의 회화와는 달리 이야기가 전개되는 배경 공간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나타난다.

    즉 평면적인 회화에 현실세계의 3차원 공간을 묘사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전개된다. 치마부에, 조토와 함께 이 시기 미술을 대표하는 두치오(Duccio)의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보면 공간 묘사를 통해 입체적인 화면을 구현하려는 노력을 볼 수 있다.

    그림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 잉태를 알리고 있다. 천사가 들고 있는 것은 가브리엘을 상징하는 올리브 가지이다. 마리아는 두 손을 들어 신의 뜻을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청년 시절에 치마부에의 화풍에 열중하였던 두치오답게 신체나 옷의 명암 처리에 세심한 신경을 쓰고 있다. 천사의 옷 주름은 치마부에나 조토보다 더 자연스럽고 세련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세련된 표현력이 조토의 소박한 화풍에 비해 훨씬 우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인물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 공간의 묘사이다. 단순히 벽의 명암 처리만이 아니라 초보적인 형태의 투시화법(透視畵法)을 시도함으로써 입체적인 3차원의 공간감을 깊이 있게 연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투시화법은 한 점을 시점으로 하여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 물체를 대각선 구도로 배치함으로써 강한 원근감과 거리감을 표현한다.

    이 그림에서 보면 천장의 가로와 세로로 이어진 지지대라든가 벽과 기둥, 기둥의 장식의 방향이 마리아의 뒷 배경 쪽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투시화법을 제대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에 일치하도록 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실제의 각도를 보면 소실점을 기준으로 딱 들어맞도록 되어있지도 않고, 심지어 마리아가 않은 의자는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천사의 두 발이 기둥의 맨 아래 부분보다 높이 그려짐으로써 마치 공간에 떠있는 것 같은 약점도 보인다. 다만 사실에 충실하려는 노력, 평면에 입체감을 실현하려는 노력의 과정이 깊이 있는 공간감을 만들어내면서 투시화법의 초기적인 형태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화가 개인의 한계 문제가 아니라 아직 아퀴나스를 정점으로 한 스콜라철학이 도달한 지점을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플라톤의 전통이라든가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신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다소 거칠게 도식화하여 표현하자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중간 지점에서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는 아퀴나스의 한계가 회화적으로도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인 세계, 개별적인 사물에 대한 인식을 지향하면서도 여전히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요소에 묶여 있는 사고방식이 미술에 있어서도 아직은 어정쩡한 묘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아퀴나스의 한계는 기본적으로 신학의 성격 내에서 수용된 아리스토텔레스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타협인 면이 있었을 것이다.

    [신학과 철학의 관계]

    아퀴나스는 어떻게 하면 신학의 본질이나 본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철학을 신앙에 도입할 것인가에 몰두하였다. 이성과 철학을 통해서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해야 한다고 믿었다. 먼저 그는 신학을 학문으로 규정한다.

    <신학대전>을 ‘계시된 거룩한 학문’으로 시작하면서 “신학은 학문이다. 확실한 원리들로부터 흘러나온 이론 체계일 뿐 아니라 신에 의해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확실한 원리들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라고 규정한다. 기하학이라는 학문이 그러하듯이 신학도 부정될 수 없는 확고한 원리에 기초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신학은 인간 활동들을 성찰함으로써 신에 관한 사정들을 취급한다. 따라서 그것은 실천적이라기보다는 사변적인 학문이다.”고 한다. 이를 통해 신학과 철학 사이에 일종의 역할 분담을 시도한다.

    철학이 이성의 힘으로 자연 질서를 연구한다면 신학은 하느님의 말씀에 나타난 대로 초자연적 질서를 밝히는 학문으로 구분한다. 그가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과 인간 이성으로 탐구할 수 있는 부분을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학의 당위성이 이성의 한계에서 도출되고 있다. 인간은 이성의 한계를 넘어가는 초자연적 목적으로 운명 지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초자연적 목적으로 향하게 하려면 신의 계시, 즉 신학적인 접근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신학은 학문의 대상이 계시된 것이므로 계시된 것에 의하여 연역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철학은 자신의 원리를 이성에 의해서만 이해하고 이성의 자연적 빛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고찰하는 학문으로 규정한다.

    그러면 남는 문제는 이 둘이 관계이다. 당연히 신학자로서 그는 모든 학문에 대한 신학의 독보적인 우위성을 인정한다. 그는 “신학은 계시의 증명을 논의 없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이성의 논술 방식도 채택한다.”라고 주장한다. 본질상 사변적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실천적 성격을 포함하는 철학에 앞서는 것이며 신학이 이성의 논술 방식을 채택한다는 점에서 신학이 철학을 규정하는 관계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철학은 신학의 하녀”라는 표현까지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철학을 검토할 때는 그 철학이 제기되던 시대적 상황과 한계를 고려해야만 한다. 자칫 잘못하면 철학의 흐름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큰 흐름을 잊고 오독을 하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적이고 단절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으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의 첫 장을 왜 철학이 독자적인 학문으로서 필요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왜 계시된 거룩한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별도로 필요한가로 시작했는지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 인간과 자연을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당위성에 대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진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이나 철학의 진리는 신학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이며, 철학과 신학의 차이는 대상의 차이가 아닌 방법의 차이이며 양자의 목적은 동일하다고 규정하는 것 자체만 보더라도 이성을 통한 철학의 비중에 대해 상당한 정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보아야 한다. 신학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신학의 절대적인 자립성을, 철학은 상대적인 자립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성의 역할을 상당히 제한적, 부차적으로만 인정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모든 지식을 신앙과 계시로 환원시키려고 하는 신앙주의와 모든 초자연적인 신앙의 진리들을 이성 진리에 귀속시키려고 하는 이성주의를 모두 경계하고자 했다. 중세라는 시대적 한계를 고려할 때 아퀴나스의 견해는 중요한 발상의 전환에 해당한다.

    그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은총과 자연의 관계로 대비시킨다. “은총은 자연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완성하기 때문에 자연이성은 신앙에 조력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의지의 자연적 경향이 사랑에 순종해야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단지 은총이 우위에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연 존재와 자연이성에 대한 관심이다. 이어서 “은총은 자연을 전제할 뿐 아니라 보존하고 존중하며 완성하고 고양시킨다. 그러면서도 은총은 자연을 초월한다.”고 강조한다.

    신의 은총이 자연에 대하여 하는 역할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그 피조물인 인간이 자연을 전제하고 존중하고 고양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계시가 이성을, 신학이 철학을 파괴하지 않고 이를 성취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이성과 철학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비중감각을 살펴볼 수 있다.

       
      ▲ 조토 <성흔을 받는 프란체스코> 1297년경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움을 받아 저울추를 이성 쪽으로 좀 더 옮겨놓은 아퀴나스의 사상은 그 자신의 독창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보편논쟁을 통해 흔들리고 있던 신학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특히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대중화 과정에서 요구되던 신학의 상식적인 합리화를 위해서도 그러한 방향으로의 수정이 불가피했었다.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를 중심으로 한 평신도 운동의 확산으로 인해 교회 안에만 머물고 세속적인 것을 도외시하는 것이 더 이상 어렵게 되었다. 신을 바라봄과 동시에 세상의 일도 중시해야 한다는 관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뜬구름 잡듯이 막연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플라톤적 관념론에서 일정하게 벗어나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신학으로의 재정립을 요구받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러하듯이 대중적 운동에는 대중적 스타가 필요하다. 기독교의 확고한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기독교 교리에 민중들의 사고를 촘촘하게 묶어둘 필요가 있었고, 여기에는 대중적인 스타가 요구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프란체스코(St. Francesco, 1181~1226)였다.

    그는 지금까지 성자로, 기독교 역사 상 가장 빛나는 인물 중의 하나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 한때 사치와 방탕에 빠져 인생을 허비하다가 기도 중에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며,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태복음)는 말을 듣고 사망할 때까지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 신의 계시를 받고 기도와 빈곤, 그리고 자비의 삶을 택한 것이었다. 이후 가난한 민중 속에서의 대중적 선교 활동이 유럽 전역에서 활성화된다.

    프란체스코나 그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프란체스코회가 아퀴나스와 비슷한 입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 친근성을 가지고 있었다. 프란체스코회는 모든 인식은 신적인 빛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 즉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했듯이 신이 우리 인식의 맨 처음이라고 보는 입장에 가까웠다.

    아퀴나스의 입장에 친근성을 가지고 있던 것은 도미니코회였다. 우리의 인식은 신이 창조한 유한한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신으로 도달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입장인가와는 별도로 기독교가 평신도 운동을 통해 민중의 삶과 사고방식의 구석구석을 파고들어가는 데 있어서 신학의 합리화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로서 요청되고 있었다.

    조토의 <성흔을 받는 프란체스코>는 프란체스코와 관련하여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그가 받은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산 속의 은둔처에서 기도하던 중, 6개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그에게 그리스도의 성흔을 전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림에서는 손과 발에 있는 각각 두 개의 못자국과 허리 부분에 꽂혔던 창 자국이 전달되고 있는 것을 선으로 이어 묘사하고 있다.

    조토의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명암법과 원근법을 이용해 입체적인 사실성을 추가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보인다. 특히 배경을 이루고 있는, 산이나 나무 같은 자연에 대한 묘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중세초기 신학에서 가장 하등한 것으로 여겨졌던 자연은 회화에서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범위 내에서 지극히 형식적으로 묘사되거나 아예 생략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그림을 비롯하여 조토의 그림에서는 자연이 현실을 구성하는 중요한 한 요소로 등장한다. 그만큼 자연의 사물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자 했다. 색과 명암을 통해 산의 굴곡을 표현함으로써 바위의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도록 하고 있다.

    특히 앞의 산은 비교적 상세하게 뒤쪽의 산은 흐릿하게 표현함으로써 원근감을 강조하고 있다. 나무의 경우도 세부 묘사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아직 엉성하기는 하다. 앞의 집이나 나무와 뒤에 있는 집이나 나무의 크기가 같거나, 산꼭대기의 나무조차 나뭇잎이 하나하나 보일 정도로 묘사한 것 등은 원근법을 벗어나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하단 오른쪽의 그림이다. 프란체스코가 새에게 설교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어느 날 프란체스코가 새 떼에게 설교를 하자 새들은 머리를 앞쪽으로 뻗어 날갯짓을 하고 부리를 그의 망토에 갖다 대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성 프란체스코의 뒤에 있는 수도사는 손을 들어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프란체스코가 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적을 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모든 동물을 사랑했다고 전해지며 그를 묘사한 그림 중에는 새나 늑대와 같은 동물들과 함께 하고 있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한다.

       
      ▲ 조토 <성흔을 받는 프란체스코> 부분

    이 그림을 잘 보면 조토의 자연에 대한 관찰이 어디에까지 이르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추상화된 보편적인 이미지의 새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새들을 각기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단지 몸의 크기만이 아니라 목의 길이와 꼬리 모양, 부리 모양, 깃털의 색 등을 통해 각각의 개별적인 새가 구별되도록 그려져 있다. 물질적인 존재가 개별적인 사물로서 나타나고, 개별적인 사물에서 인식이 시작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의 견해가 자연스럽게 화가의 생각과 손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윤리학

    <신학대전>은 윤리의 문제에 대해서 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논하고 있다. 아퀴나스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참된 행복 추구를 목적으로 설정한다. 하지만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일정한 차이가 나타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엄격한 원죄설에 기초하여 은총설과 예정설을 통해 인간의 죄와 구원을 다루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죄를 범했으므로 인간에게는 구원을 요청할 권리도 없고, 구원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오직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신에 대한 절대 복종만이 구제의 길이었다. 아퀴나스 역시 기본적으로는 원죄설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원죄의 성격과 적용 범위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인다. 그는 “아담과 그 후예들은 모두 ‘본성의 죄’라 불리는 원죄를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죄를 원죄로 환원시키지는 않는다. 분명히 ‘본성의 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담 이후 인간들에게 이어지는, 일종의 유전이지만 “아담의 다른 죄들은 그의 본성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에 해당된다.

    따라서 공로가 유전되지 않듯이 이 나머지 죄들도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그가 본성에 해당하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원죄와 개별 인간의 인격에 의해서 자행되는 죄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중요한 차이에 해당한다.

    만약 인간의 모든 죄가 원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대로 신의 은총만이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아퀴나스처럼 인간 스스로에 의한 죄가 별도로 있다는 논리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는 영역이 부분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되고, 그만큼 인간의 자유 의지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본성의 죄이고 어디부터가 개인의 인격에서 비롯되는 죄일까? 그는 본성의 죄인 원죄의 원인은 본래적 정의의 결핍이라고 본다. “그 본래적 정의를 형성하던 조화의 절정은 의지가 신에 복종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원죄에 있어서 의지가 신을 기피하는 것이 그 형상적 부분이고, 이것이 바로 죄악이다. 인간 기능의 내적인 혼란 즉 탐욕은 질료적 부분이다.”이라고 구분한다. 즉 신을 기피하고 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것은 원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오직 신에 귀의함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이 죄의 형상적 부분, 즉 본질적인 내용이 된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두 환원될 수 없는 죄, 인간 기능의 내전인 혼란에 해당하는 탐욕에 의한 죄가 별도로 성립하는데, 이는 질료적 부분으로서 인간 스스로에 의한 극복 가능성을 열어놓게 된다.

    또한 죄의 주체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그리스적 전통을 매우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복원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죄가 인간의 육체적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영혼과 의지를 통해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설을 설명하면서 모든 인간의 죄는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죄의 원인인 의지로 죄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조금 다른 견해를 보인다. 기본적으로는 아퀴나스 역시 죄는 인간적 행위이고, 인간적 행위의 원리는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죄의 주체는 인간의 의지라고 본다. 하지만 모든 죄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의지가 명한 행위 이외에도, 의지에 의존하는 능력들이 명령한 행위도 있으므로, 죄의 주체는 꼭 의지 뿐만은 아니다.(…) 관능 즉 감각적 욕구의 움직임도 의지에 의존할 수 있고 따라서 관능 속에도 죄가 있을 수 있다.” 즉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욕구가 죄의 원인일 수도 있다고 분석함으로써 다시 한 번 인간의 이성을 통한 극복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인간에 해당되는 자연적인 윤리법칙은 오직 이성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아퀴나스 역시 대부분의 신학이 그러하듯이 목적론적인 윤리관을 지니고 있다. 즉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에서 존재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특징적인 것이 있고 이것에 충실함으로써 목적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특징을 이성에서 찾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어받는다.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지성이므로, 참된 행복은 무엇보다도 지성의 활동이고, 마음으로는 의지의 활동이기도 하다.”라고 주장한다. “오직 지성이 우주의 근거인 신 본질 직관을 하는 한에 있어서, 참된 행복은 지성에 속한다.”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이어받아 윤리와 도덕을 행복의 추구와 동일시하고,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적을 충족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과 행복의 실현에 있어서 이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자유 의지 영역, 인간의 주체적인 개입의 여지를 확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그가 앞서 구분한 형상적인 죄와 질료적인 죄, 역으로 표현하면 형상적인 목적과 질료적인 목적, 즉 초자연적 목적과 자연적 목적으로의 구분이 실천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그는 “자연적 행복에 비례라는 도덕적 덕 외에도 초자연적 행복에 비례하는 다른 덕”을 구분하고 “자연적 윤리법칙이란 이성적인 피조물 측에서 신의 법칙에 관여하는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인간의 본성은 타율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성을 통해 신적인 윤리를 인식하고 이를 통해 원죄는 아니어도 인격에 해당되는 죄에서는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윤리적 행위의 구성에서 신에 의한 객관적인 요소와 함께 인간에 의한 주관적인 요소도 동시에 인정함으로써 자유 의지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의지’ 개념에 상당히 근접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신학대전> 2부에서 인간의 최종 목적을 다루면서 “인간은 자기 의지와 자기 행동의 주인이다. 그래서 의지로부터 나오는 행동일 때 인간적 행위이다. 그런데 의지의 대상은 선(善)이다. 아니 선은 바로 의지가 그것 때문에 움직이게 되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인간적 활동들 속에서 언제나 하나의 목적(선)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의지를 통한 선의 실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면 아퀴나스는 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의지’와 마찬가지로 아퀴나스도 의지를 윤리의 목적과 수단에 관련된 것으로 본다. “의지는 능력으로서, 목적에도 수단에도 연관된다.”라고 하면서 “선택은 그 본질에 있어서 의지 행위이다.”라고 규정한다. 의지의 문제가 수단으로서의 선택의 문제와도 연관되고 있다. 선택을 강조한다는 것은 어떤 수단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인간의 의지가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아는 것만으로, 믿음만으로 덕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론으로까지 이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단의 선택에서 어떤 필연성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또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목적만으로 올바른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덕과 지를 일치시켰던 소크라테스를 비판하며 덕을 아는 것만으로 선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를 위한 구체적인 수단과 방법의 문제를 다루는 선의지의 영역이 별도로 필요하다고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 덕에 이르기 위한 주체적인 노력이 강조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신앙과 분리된 덕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은 오직 신의 도우심과 더불어서만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인간 스스로는 어림도 없다. 그의 자연적 능력을 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신의 도우심’이다. 신을 믿음으로써 행복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신이 구원받을 자를 미리 예정해놓고 순서에 따라 부르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덕은 신의 도움을 받아 인간이 실현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신은 우리의 의지가 최종 목적에로 향하고 거기 이를 수 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선행과 공로를 통해서 추구해 나아가길 신은 원한다.”고 덧붙인다.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선으로의 의지와 덕의 실천을 통해 스스로 실현해나가기를 신이 원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중요한 결론 가운데 하나인 중용 개념도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아퀴나스는 “덕은 올바른 이성과의 일치됨이다. 그 규범인 이성으로부터 혹은 지나침 때문에 혹은 부족 때문에 멀어질 수 있다. 따라서 덕은 중용(中庸)을 지키는 데 있다.”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용은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했듯이 단순히 이것과 저것 사이의 산술적인 중간의 의미가 아니다. “이성의 중용은 이성의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이성과 올바로 합치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중간 개념이 아니라 이성으로 확인된 바와의 합치, 즉 본성과의 합치를 의미한다.

    또한 "우리의 이상적인 인간상의 내용은 차례차례 발견되는 것이며, 또 차례차례 실현되는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윤리적 실천이 단순한 신앙의 선택이나 일회적인 반성을 넘어서 점진적으로 실천되고 발전되는 것임을 강조한 점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닿아있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그를 기독교화 하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여러 가지로 구별되는 점이 형성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 이상으로 공통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피스트를 비롯하여 몇몇 예외적인 경향을 제외하고는 그리스 철학 이후로 대체로 서구적인 사유방식의 공통분모에 해당하는 인식 틀을 갖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중세로 접어들어서는 신학이라는 형식을 띠고 나타났을 뿐 발상법 자체가 공통의 뿌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학의 문제에 있어서도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분류 속에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모두 꿰어 맞추고 있다. 선에 해당하는 항목들을 열거하고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은 악한 것으로 규정된다. 위계화된 질서와 조화는 선에 해당하는 것으로, 무질서와 혼란은 악에 해당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위계화된 질서를 윤리의 이름으로 옹호하면서 이러한 윤리와 일치된 정치체로서 국가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펼치는 것도 상당부분 일치한다. 선에 일치하는 사고와 행위는 행복 혹은 구원으로 이어지고, 악에 해당하는 것은 형벌 혹은 지옥으로 이어진다.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으로의 이분법적 구분, 초자연적인 것과 연결되는 인간의 정신과 자연적인 것과 연결되는 인간의 육체로의 분리도 대표적이다.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중시는 목적론적 관점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 조토 <최후의 심판> 1304~6년

    기독교화 된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그림이 아마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단골 주제로 선택되었던 ‘최후의 심판’일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인간 세상에 대한 신의 마지막 선택에 해당한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의 마지막을 최후의 심판에 대한 내용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는 최후의 심판에서 “신의 정의가 모두에게 분명하게 드러나야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공로(功勞)와 과실(過失)도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각자는 상급 또는 형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을 통해 신앙을 가진 선한 인간이 어떻게 보상을 받고, 반대로 신앙이 없거나, 신앙이 있더라도 악을 행한 인간들이 지옥에서 어떻게 고통을 받게 되는지를 매우 장황하게 다루고 있다.

    조토의 <최후의 심판>을 보면 기계적인 선악 이분법이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먼저 화면의 상하를 초자연적인 세계와 인간과 직접 연관된 세계로 구분하고 있다. 위는 중앙의 신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예수의 12제자로 보이는 성인들이 있고 위로는 천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아래는 최후의 심판을 통해 인간들이 받을 구원과 형벌을 다루고 있다. 아래의 좌측은 선을 상징하는 구원, 우측은 악을 상징하는 지옥으로 분리하였다. 구원과 지옥의 세계는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도 포함하고 있다. 지옥으로 떨어진 인간은 예외 없이 인간의 신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육체적인 것이 죄와 연관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구원받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옷으로 가리고 있어서 육체의 노출을 최소화하고 있다. 그만큼 육체와 분리된 정신을 묘사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인다.

    더 나아가서 그림에는 질서와 무질서, 조화와 혼란이라는 이분법의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다. 위쪽의 세계는 한눈에 보기에도 반듯하게 줄을 맞추어 도열하고 있어서 마치 군대의 사열을 보는 것처럼 일사불란한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반대로 아래 우측의 지옥은 어떠한 질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극도의 혼란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좌측의 구원받는 인간들은 천상계처럼 획일적인 질서는 아니지만 비교적 질서를 갖추고 있다.

    아퀴나스의 정치학

    아퀴나스의 인식론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는 현실 정치이론에서는 신법과 세속법의 조화, 교회와 국가의 조화로 나타난다. 변화하는 중세 현실에 적합한 정치이론의 구축을 꾀했던 것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위에서, 혼자서는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인간이 평화를 이루며 살기 위해서는 법이 정의로워야 하며 또한 일방적인 강제여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평화는 억압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위계적인 질서에 의한 고착된 상태의 유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전개 순서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에 대한 인식을 총체적으로 정립한 <니코마코스윤리학>의 마지막 장을 ‘우리의 목적이 달성되려면 입법이 필요하다’라는 주제로 마무리하면서 윤리학과 정치학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켰다.

    아퀴나스 역시 <신학대전>에서 인간의 행복과 도덕의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룬 직후에 법의 문제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했듯이 윤리가 단순히 한 인간의 영혼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의 문제와 연관된 것이라면 윤리는 반드시 사회적인 성격을 지니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도 정치학의 문제는 윤리학과 뗄 수 없는, 윤리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행위를 규제하는 법은 자연법에 기초해야 하는데, 자연법은 신에 의해서 주어진 영원법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에 의해 통치되는 세상은 신의 영원한 이성에 의해 목적을 향해 질서 지워져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영원법이 있다.”라고 규정한다. 이 영원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자연법이 도출된다. “신의 이성에 의해 사물에 주어진 성품, 즉 영원법은 사물들의 본성에 새겨져 있고, 이성적 존재의 본성에 따라 인간에게도 분여되어 있다. 따라서 이성의 자연의 빛을 통해 인식된다. 이렇게 해서 영원법은 자연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법이 인간적 행위에 규칙 도는 규범 역할을 하려면, 이 규칙 또는 규범이 적용될 필요가 있다. 이 적용은 법의 ‘선포’로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법은 사회를 보호할 직분이 맡겨져 있는 자로부터 포고된 이성의 공동선을 위한 질서화라고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이란 공익을 위한 이성의 규율이며 공동체를 다스리는 사람으로부터 제정되고 공포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법이라는 이성적 질서는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공포’된 것이었다. 당연히 교회의 지도를 받는 군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곧 법이라는 인식이다. 기본적으로는 중세 지배세력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법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의 정치이론은 국가를 교회의 아래에 두었다는 점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기에 절대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현실의 국가 자체를 ‘악의 나라’로 규정했다면 아퀴나스는 교회의 주도 아래 교회와 함께 신의 뜻을 실현하는 중요한 단위로 보았다. 국가는 신의 뜻에 의해 세워진 최선의 제도로서 구성원이 도덕적 생활을 통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군주는 공동의 선을 위해 신에게서 통치권한을 부여받은 존재로 보았다. 초자연적 목적을 위한 교회 역할과 국가의 세속적 지배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중세사회의 권력분할과 안정화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비해서 그가 세속 국가에 대해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십자군전쟁의 영향과도 깊은 관련을 갖는다. 십자군전쟁은 회교도에 빼앗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하여 11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교회가 주도한 수차례의 원정 전쟁을 말한다.

    하지만 성지회복이라는 명분과는 달리 실질적으로는 영토 확장과 이를 통해 교회와 세속군주들의 정치적․경제적 이권 획득을 위한 전쟁이었다. 현실적인 권위를 더욱 확고하게 세우고자 했던 교회, 영토 확장에 따른 이익을 축구한 영주, 시장 개척을 희망한 도시 상인의 의도가 맞물린 침략․약탈 전쟁이었다. 이에 따라 원래 목적인 성지탈환은 뒷전이고 전리품 노획과 약탈이 우선되었다. 심지어 4차 원정에서는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제국을 건설하기도 한다.

    이미 중세사회가 안정화되어 가면서 행정적인 지배의 역할이 커지고 이에 따라 세속 국가의 역할이 과거보다는 커지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십자군전쟁은 이미 전개 과정에서 세속 국가의 역할을 일정하게 인정하는 것을 필요로 했다.

    십자군전쟁의 이념적인 기초는 종교였으나 구체적인 군사행동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군사력을 담당하고 있는 세속 군주의 역할이 과거에 비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교권을 더 확고히 하기 위해서 교황의 주도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이 세속 국가와 영주의 비중을 더 증가시키는 역설적인 상황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아퀴나스는 현실적인 세속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 인정을 하면서도 여기에 흔들리지 않는 교회의 권위를 유지․강화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절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정치체제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다분히 절충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그는 모세의 법을 다루면서 “모세의 사회 입법은 최상의 통치 규범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그 법제는 군주제-귀족정치제-민주제였기 때문이다. 실상 신이 뽑아 세운 군주에겐 72명의 원로가 보좌했는데, 이들은 백성 중에서 백성들로부터 선출되었다.”고 규정한다.

    군주제를 방향으로 제시하면서도 귀족정치와 민주제적인 요소를 섞어놓는 식의 절충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군주는 신에게서 통치권한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교회의 우위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귀족정치제적인 요소도 섞어 놓음으로써 어느 정도 세속적인 권력 관계를 반영하고자 하였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중간층이 올바른 삶을 살고 통치에 기여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도덕 통치도 가능해진다고 보았 듯이 일정하게 민주제적인 요소도 수용하려 하고 있다. 그만큼 아퀴나스에게는 중세 초기의 고도적인 혼란기․이행기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이념 과잉 상태, 그런 점에서 상식을 넘어선 과도한 상태를 반영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을 중세 사회가 안정궤도에 들어선 상황에 맞도록 일정하게 수정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 독일 <퀼른대성당> / <퀼른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노력이 건축과 미술에 있어서 10~12세기에 거대한 아치형 석조 성당과 사실성을 강화한 성당 조각을 특징으로 하는 로마네스크양식으로 나타났다면 12세기 후반을 경계로 하여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비해 훨씬 거대하고 또한 더 화려한 대성당 건축 붐이 일어난다. 13세기에서 르네상스 이전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일반화된 양식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중세 기독교 미술을 대표하게 되는 고딕양식(Gothic)이 그것이다. 프랑스의 노틀담대성당이나 독일의 퀼른대성당 등은 고딕양식을 대표하는 성당으로 손꼽힌다.

    고딕 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한다. 또한 신의 영광과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하늘을 찌를 듯이 더 높은 건축을 지향하게 된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벽이 아닌 기둥의 공학적인 활용이었다. 돌로 만든 무거운 천장의 아치를 지탱하는 것이 육중한 벽이 아니라 기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건축에 일대 혁신이 일어난다.

    여러 개의 가는 살로 상당한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자전거 바퀴의 원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가는 돌기둥의 조합으로 건물 전체를 받치는 돌의 골조(骨組)를 세우는 것을 통해 성당 전체의 크기를 획기적으로 확대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퀼른대성당> 전면부를 장식하고 있는 탑처럼 이전보다 훨씬 높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육중한 벽을 제거함으로써 성당의 외관은 거대하면서도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만즐어낼 수 있게 되었다. <퀼른대성당>의 경우 어마어마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가는 기둥과 뾰족하고 높게 뻗은 첨탑으로 인해 우리의 시각에 부담감을 주지 않을 정도로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또한 두꺼운 벽이 제거된다는 것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처럼 좁은 창문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딕양식의 성당들은 사라진 두꺼운 벽의 공간을 커다란 창으로 대신하고 이곳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우게 된다. 자연채광이 확대됨으로써 성당 내부는 훨씬 밝아지게 되었고 특히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화려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부족함이 없게 만들었다.

    곰브리치(Gombrich)가 <서양미술사>에서 로마네스크와 고딕을 비교한 다음과 같은 언급은 둘의 차이를 생생하게 느끼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로마네스크 교회당들은 아마도 힘과 권세에 있어서 악의 공격에 대해 피난처를 제공해주는 ‘전투적인 교회’라는 느낌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새로운 고딕 성당들은 신도들에게 이 세상 말고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엿보게 해주었다. 그들은 설교와 찬송을 통해 진주로 만들어진 문, 값진 보석 및 순금과 투명한 유리로 된 천국의 예루살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제 그러한 환상의 광경은 천국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

    중세 말의 철학 – 스코투스의 주의주의와 오캄의 유명론

    아퀴나스 이후의 중세 후기 철학은 한편으로는 아퀴나스에 대한 신비주의적 관점에서의 비판,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의 역할을 더 확장하는 방향으로 아퀴나스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 등이 나타나면서 중세 철학 내부의 균열이 확대된다. 그 과정에서 맹아적이긴 하지만 근대로 나아갈 수 있는 철학적인 단초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스코투스(Duns Scot, 1265-1308)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신비주의적인 입장에서 아퀴나스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였는데, 지성에 대한 사랑의 우월을 강조하였다. 아퀴나스가 강조한 지성의 지위를 다시 낮추고 신의 의지를 절대적인 것으로서 재정립한다. 아퀴나스처럼 지성을 우위에 놓으면 신은 자신의 의지로 무엇을 할 수 없게 된다는 비판이다.

    그가 보기에 창조는 신적 의지로부터 나오며, 신은 논리적 모순이 없는 것만을 원한다. 그래서 도덕적 질서도 신적 의지에 의존한다. 결국 선하다는 것은 신이 원한다는 점에서 선하다. 그래서 “선하기 때문에 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하고자 하기에 선하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신의 명령이 선하고 신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신은 그것을 명한다.”라고 본 아퀴나스주의자의 결론을 뒤집어버린다. 그는 지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아퀴나스를 부정하고 중세 말에 주의주의(主意主義)를 확산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오캄(William Ockham, 1280-1348)은 반대로 유명론의 입장에서 아퀴나스를 비판한다. 그는 보편논쟁의 연장선상에서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한다. 보편자는 어떤 것을 특정 짓고 그렇게 확정하는 기호요 일종의 허구라는 것이다. 단지 인간들이 편의를 위해 지정한 것을 부르는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당연히 보편자의 실재를 논제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한 아퀴나스나 스콜라철학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보편이란 개별적인 사물이 인간의 의식 속에 하나의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것일 뿐인데, 보편 개념을 인간이 외부에 실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거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흔히 오캄의 ‘면도날 이론’으로 불리는 절약 원리도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도출된다. 세계의 단순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절약의 원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하고 적은 것으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데 공연히 더 복잡하고 많은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실체나 원리는 불필요하게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단언한다. 존재하는 것은 개별 사물이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추상적인 원리를 사용하여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개별 사물에 대한 경험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그가 신학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신학과 이성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은 계시에 의한 초자연적 진리를 탐구하는 영역으로, 이성은 자연인식에 대한 진리를 탐구하는 영역으로 분리․독립시킴으로서 일종의 이중 진리설을 펼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자연인식을 통해 신에게 접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신학은 자연과 현실 세계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앙의 문제로서만 접근해야 하는 위상으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 요구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단지 믿음일 뿐이다.

    그래서 오캄은 교회를 믿음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 모임으로 보았다. 신앙과 이성 분리 논리는 필연적으로 교권과 현실 권력의 분리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교회의 세속적인 권력을 요구를 비판하고, 국가 권력과 교회 권력의 분리를 주장했다. 교회이 권위도 교황이나 종교회의와 같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서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아퀴나스에 대한 좌우 양쪽에서의 비판이 확대되면서 중세를 통합하는 철학의 역할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게 된다. 특히 교회와 국가의 분리, 권력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비판은 중세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사상적․현실적 위계질서에 치명적인 균열을 내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 유명론은 보편자의 실재를 부정하고 개별자를 강조함으로써 개별적 인간의 개체성, 개인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함으로써 중세사회 내에서 근대적 사고의 맹아를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개인의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르네상스적인 인간상과 근대적 주체의 단초를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권력으로서의 교회를 비판하고 모든 믿음의 근거를 성서로 향하게 함으로써 향후 종교개혁의 발상에 자극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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