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정당, '사회적 정의 정당' 돼야
        2009년 11월 02일 08: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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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가끔 오늘처럼 하늘이 시무룩하고 찬 비가 올까 말까 하는 날씨일 때에 말기의 소련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됩니다.

    지금의 러시아의 빈부 격차를 생각하면 우습게 느껴지지만, 말기의 소련 시민들이 정권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을 때에 꼭 소비물자 부족보다도 ‘간부층의 특권’을 늘 꼽았습니다.

    물론, 위에서 말한 대로 오늘날 러시아의 백만장자들의 생활 스타일을 생각해보면 그 때의 간부층의 특권이란 우스운 수준이었죠.

    소련 간부의 특권과 러시아 자본의 특권

    노동자 평균 임금 약 3~4배 이상의 월급, 특수 배급소에서 나오는 맛이있는 동독제 소시지와 마로꼬산 오렌지, 자녀들의 영어 특목고(네, 그 시절에도 ‘외국어특목고’는 특권의 상징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주변적 문화들은 중심권의 언어에 대한 숭배에 있어서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리고 3~4년에 한 번씩 있을까 말까 하는 핀란드나 파리로의 출장 내지 투어…

    이 정도면 오늘날 모스크바 중산층의 생활수준에도 크게 미달하는 ‘풍족’인 셈이죠.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 백만장자들의 ‘특권’이란 영국에서 축구 구단을 하나 사버린다든가 초호화 요트나 개인 비행기를 수집하는 식인데, 그런 것은 과거 공산당의 총서기장마저도 꿈조차 꿀 수 없었습니다.

    일각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구소련 등에 대해서 ‘국가 자본주의’라고 못을 박지만, 그 논리에 일말의 진리가 담겨져 있다해도,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을 놓치고 있습니다. 공산당 총서기장과 같은 자들은 그 관료적 영향력이라는 행정자본을 대물림할 수 없었거든요.

    공산당 정치국 위원의 아들은 유명한 미사일 엔지니어 정도 되는 것은 다반사였지만 정치국 위원직 자체를 사유화시켜 대물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금전적 자본이 자본가 일가에서 당연히 세습되는 진정한 의미의 자본주의와는 판이하게 다른, 훨씬 더 업적주의적인 관료제 위주의 계급적 시스템인 셈이죠.

    그러면 30년 전의 공산당 정치국 위원의 별장이 너무 커 보인다고 침을 뱉고, "공산당 간부를 다 처단해야 한다"고 자신의 부엌방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던 이들이, 오늘날 로만 아부라모비치가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첼시 구단에 몇 백만 달러를 더 투자했다는 소식에 냉소하면 하지 별로 분노하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요?

    정의의 개념이 확 바뀌었다

    답은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사회가 합의한 ‘정의’ 개념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공산당 치하의 사회에서는 공산당 간부란 레닌의 가르침(이라고 선전되어지는 교리 내용)을 전수 받아 이를 ‘양떼’라고 할만한 ‘근로인민대중’들에게 설교하고 이들을 이끌어 아미타불의 정토처럼 완벽무구한 ‘공산주의’로 가는 성직자 아닌 성직자입니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레닌의 사법제자’라고 자칭하는 이가 만약 별장짓기와 외국여행에 재미를 붙이고 자기 딸 자식 만큼이나 ‘미제’의 언어 위주의 교육을 시킨다면, 이는 그 ‘신도’들이 보기에는 마치 신부나 승려가 여성 편력하는 것과 같은 노릇입니다. 일종의 ‘파계’인 셈이죠.

    신도들이 법적으로 자유로이 출국하거나 자유영업해서 여윳돈을 벌 수 없는 사정까지 감안하시면 그들이 ‘사리사욕에 잡힌 목자’에게 침을 뱉은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양’들은 자기헌신하여 사회주의 건설장에서 죽으라 일하고 레닌이라는 성현의 신성한 가르침을 전수, 간직하는 현대판 사대부들이 인욕을 막으면서 오로지 멸사봉공에 헌신한다는, 엣 공산시기의 사회 정의에 대한 합의는 이미 깨지고 말았습니다.

    자본주의 러시아의 ‘정의’에 대한 합의란 "각자 그 생존을 도모하여, 정부가 우리 벌이를 크게 위협하지 않고 거시 경제 여건만 바로 잡으면 우리도 정부와 재벌의 행동에 딴지 걸지 않겠다"는 정도입니다. 각자 알아서 그 생존을 도모한다, 그러면 그 도모에 성공해서 첼시 구단까지 사버린 이에게 왜 침을 뱉겠어요?

    부정한 방법으로 도모했다고요? 러시아 같은 ‘신흥 시장’에서 법을 한 번이라도 어기지 않은 사람이라고 있겠어요? 적당한 부정에 적당히 눈을 감아주는 것도 ‘새로운 러시아’의 사회적 합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소련을 무너뜨린 건 ‘정의감’

    사람에게 ‘빵’이란 일차적인 욕구지만 ‘사회 정의’ 없는 빵만으로는 한 사회가 잘 유지되지 못합니다. 망할 때쯤 됐을 때에 소련에서는 빵은 약간 부족해도 그것 없어서 굶어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연금생활자들의 아사의 경우 등은 망한 뒤에야 나타났죠. 그런데 정의가 없다는 걸 다들 체감했기에 이에 대한 공감대가 결국 한 나라를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어떤가요? 우리에게 정의란 결국 ‘기회의 균등’과 ‘의무의 균등’, ‘공법 엄수’ 정도일 것입니다. 요컨대 10%의 부자들이 거의 80%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다수의 국민들은 반기지 않는다 해도 체념할 수 있지만 그 부자들의 자식들의 병역기피에 대해서는 아주 격분합니다.

    "나는 가서 2년씩이나 썩었는데 저 놈은 나와 뭐가 다르기에 안 가느냐" 이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이미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전혀 바뀌지 못할 계급적 위치인데, 이 계급 질서 그 자체를 이미 받아들인 대한민국 국민들은 계급질서에서 파생되는 비교적으로 사소한 부정 등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분노들 많이 하는 셈입니다.

    이재용 전무 한 명이 수만 명의 ‘중산층’ 한국인보다 훨씬 더 많은 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당연시하지만, 만의 하나에 이재용 전무가 그 자녀를 기부입학과 같은 방법으로 서울대에 집어넣으려 한다면 상당한 분노가 일어날 것입니다.

    계급적 질서도 받아들여져 있으며 서울대생의 특권적 위치 등의 학벌 위계도 다 ‘합의’된 듯하지만 ‘기회의 균등’ 원칙을 무시해 그 학벌의 사다리에서 몇 계단 뛰어오르면 다들 "야, 이 새끼"라고 고함치르죠.

    사회주의자들의 할 일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평균적 국민’의 사회적 정의 정서란 억울하고 우스운 것입니다. 이건희나 이재용과 같은 이들이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등의 문제보다도, 사회주의자 입장에서는 삼성의 일가를 위시한 자본계급이 대한민국을 배타적으로 지배한다는 상황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아무래도 자산계급에 장악돼 있다는데 어찌 하겠습니까? 비록 대한민국 인구의 90%는 중하급 월급쟁이거나 영세한 내지 비교적으로 규모가 작은 업자들이지만, 각자 그 생존을 도모하여 무슨 값을 치르더라도 무조건 ‘성공’을 이루어야 한다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거의 대다수가 공유합니다.

    "각자가 그 생존을 도모한다"는 이야기 정도면 우리의 국시 아닌 국시이며, 애국이고 사회고 민족이고 뭐고 그 국시에 비해서는 어디까지나 ‘취미’, ‘선택 사항’ 내지 그냥 장식품입니다. 이와 같은 악조건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해야 할 일은 아무래도 다수의 정서를 참고하면서 정의를 규정하는 방식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켜서 보다 사회주의적 내용의 사회적 정의의 규정을 대중화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돈이 사교육을 사고 사교육이 명문대 입학을 보장해주는 세상에 과연 명문대의 존재 자체가 ‘기회 균등’의 원칙을 배반하지 않는가? 차라리 재능이 있어서 돈이 없어서 지방대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대학평준화, 학력서열 타파책을 취해야 하지 않는가?

    이런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할 경우에는 비록 이미 ‘정신적으로 자본화된’ 대중이라 해도 그래도 호응은 있을 것 같습니다.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 정당들은 만약 성공하자면 결국 ‘사회적 정의의 정당’이 돼야 할 것 같고 늘 대중의 정의감에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단, 문제는 진보 정당들이 사용할 수 있는 매체들이 제한돼 있어 아무리 잘 조율된 메시지라 해도 그 전달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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