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의 이데올로그, 유물론과의 투쟁
        2009년 10월 30일 11: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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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 마르셀리노 카타콤 천정벽화> 3세기

    중세 봉건제의 이념을 정립한 교부철학 – 신학이 철학을 지배하던 시대?

    서양 철학사에 있어서 중세의 시기적인 구분은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된 이후부터 르네상스 이전까지를 의미한다. 대략 1000년에 이르는 중세를 대표하는 철학은 기독교 신학을 체계화한 교부철학과 기독교신학의 구체화, 합리화를 추구한 스콜라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정점으로 하는 교부철학은 거의 9~10세기까지 지속된다. 이때까지는 고대 로마제국이 붕괴한 이후 중세 봉건제의 사회·경제적인 토대가 형성·정착되는 단계였고 교부철학은 새로운 체제 정립을 위한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흔히 중세철학을 언급할 때 신학이 철학을 지배하던 시대, 철학이 신학의 시녀이던 시대, 철학의 암흑기라는 식의 규정을 사용한다. 하지만 철학의 암흑기라거나 신학이 철학을 지배했다는 주장은 비겁한 도마뱀 꼬리 자르기에 해당한다. 이는 중세에 자행되었던 사회적 억압이나 지적인 파괴의 책임을 철학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돌리려는 일종의 변명이다.

    마치 철학이 사회·정치적인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 철학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영역인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현실적인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또한 중세 이후에 이르러 비로소 철학이 제 역할을 함으로써 비정상으로부터 정상으로의 변화가 가능했다는, 근대 이후 현재에 이르는 현실 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논리이다.

    만약 철학을 신학과 분리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서양철학의 역사는 매우 협소하고 지독하게 단절적인 단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대에서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매우 제한된 경향만이 철학의 범위 안에 들어가고 나머지 대부분은 철학의 범위에서 제외되거나 매우 의심스러운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오히려 철학은 아주 오랜 기간 신학적인 형식과 논리에 의존했다. 보다 정확하게 정의하자면 중세의 신학이 곧 그 시대의 철학이었다. 또한 단순히 신비주의가 이성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신학이라는 형식과 내용 안에 신비주의적 요소와 이성적인 요소가 혼재된 양상으로 나타난다. 중세의 국가 체제와 사회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철학의 역할이 신학을 통해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중세의 온갖 비정상적 행위의 작지 않은 책임을 온전하게 철학의 몫으로 규정해야 한다.

    중세 기독교 신학의 뿌리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의 변화를 통해 찾을 수 있다. 본래 유대교는 하나의 민족을 대표하는 종교였다. 여호와는 유대인들의 신이었다. 대부분의 종교가 초기에 그러하듯이 유대교도 지역적이고 부족적인 경계 내에서 한정된 역할만을 하고 있었다.

    예수는 유대인이었고, 그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이 사도 바울이었다. 그가 예수에 의한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메시지를 전파함으로써 하나의 민족종교로서의 유대교에서 세계종교적인 성격을 지닌 기독교로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율법 중심의 유대교와 결별하고 복음 중심의 교리를 펼친다. 까다로운 모세의 율법은 로마에 포괄되어 있던 다양한 민족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세로 상징되는 유대교의 엄격한 율법이 복음을 중심으로 한 교리로 바뀜으로써 신학적으로 체계화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로마 시대 초기에 기독교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로마 자체가 다신교의 전통 위에 있었기 때문에 일신교를 표방하는 기독교는 로마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미 유럽은 물론이고 광활한 주변 지역을 통일하여 대제국을 운영하고 있는 로마의 입장에서 유대교는 일종의 분리주의 세력의 사상으로 위험한 것이었다.

    율법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초기의 기독교는 아직 신학적 체계를 갖추지 않은 단순한 것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 철학과 접촉하면서 점차 체계적인 논리를 갖추기 위한 변화의 과정을 맞이한다. 여호와는 조상신이나 단순한 구원의 역할에서 벗어나 하늘과 땅을 만든 전능한 신으로 변한다. 또한 원래 현세에 복과 번영을 주는 것이 중심이었으나 오랜 로마 통치시기에 신의 정의가 지상에서 덕을 행한 사람들에게 보상을 주지 못하게 되자 천국에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변화된다.

    즉 현세가 아닌 내세 중심의 종교로 변화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기독교 교리에는 체계화된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교리와 조직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교부들에 의해 통일성과 체계를 갖추어 나가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박해받던 시대의 단순한 교리는 카타콤 벽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313년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남겨진 유적과 유품도 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지하무덤이자 비밀스러운 예배장소였던 카타콤의 벽화와 석관조각 등을 통해 기독교 초기 미술을 유용하게 접할 수 있다.

    기독교도들은 사후 영혼의 구제를 원하였고, 카타콤의 천정과 벽에 회반죽을 칠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십자가 형태를 상징하는 닻과 돛대, 예수를 의미하는 물고기 그리고 포도와 종려나무, 양, 비둘기와 같이 기독교를 상징하는 도상이 그려졌다. 그러다가 점차 교리가 점차 복잡해지면서 위의 <로마 마르셀리노 카타콤 천정벽화>와 같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속의 이야기들을 다루는 서술적 묘사가 나타난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의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 기독교는 서양 중세를 지배하는 철학적 기반이 된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승인하게 된 과정은 일화를 통해 전해내려 온다. 그는 312년 북부 이탈리아를 접수하고 남부로 진군하였다. 로마를 차지하고 있던 막센티우스와 싸우기 위해 진군하던 중 꿈속에서 기독교의 표식인 십자가를 보고 ‘이것을 가지고 네가 승리할 것이다’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 문자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최초의 두 문자인 x와 p를 꿰맞춘 표시를 깃발에 붙이고 막센티우스군을 격파했다. 로마에 입성하여 원로원과 국민의 환영을 받은 콘스탄티누스는 다음 해인 313년 속주 총독에게 보내는 서한 형식으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신앙 자유의 원칙에 의해 그리스도 신앙을 공인했다.

       
      ▲ 로마 벽화 <콘스탄티누스의 꿈>

    <콘스탄티누스의 꿈>은 이 상황을 묘사한 벽화이다.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는 꿈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콘스탄티누스를 보여주고 있다. 중앙은 십자가를 앞세우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모습, 아래는 즉위식 모습을 담고 있다.

    기독교를 공인한 이 칙령은 기독교인에게 교회를 조직할 권리를 포함하는 법적인 권리를 보장해주고, 기독교 탄압시대에 몰수한 교회의 재산을 반환하고 이에 대해 국가가 충분한 보상을 주도록 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소극적 의미에서의 기독교 보호를 넘어 적극적 의미에서 기독교 장려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상의 일화는 말 그대로 신화화된 이야기일 테고 그러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실질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는 당시 그가 하고자 했던 일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그는 강력한 통일 로마제국을 꿈꾸었다.

    막센티우스와의 전투도 그 일환이었고 밀라노 칙령이 로마의 서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티누스와 제국의 동방을 다스리던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협의한 정치조약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이와 관련이 있다.

    대제국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체계화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대체로 당시의 각 종교는 특정 부족의 신을 출발점으로 한다. 거대한 국가체제, 특히 대제국의 건설은 부족이나 부족연합의 성격을 넘어설 때 공고하게 정착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적인 체계화가 필수적인 과제로 된다.

    로마 이전의 역사를 봐도 이러한 점은 분명하다. 이집트 후기로 가면 파라오들이 신들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한다. 특히 당시 파라오 중에 아크나톤(Akhnaton)은 적극적으로 유일신교를 향한 종교혁명을 시도한다. 그는 백성들이 믿는 각 지역의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고 태양신만을 숭배하도록 했다. 이는 지역에 기반을 둔 부족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고 파라오 중심의 단일한 국가체제를 형성하기 위한 작업으로 봐야 한다.

    그리스의 경우도 각 지역의 신을 통합하여 제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체계화된 위계질서를 부여함으로써 국가체제를 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리스의 경우 다신교를 전제로 신의 위계를 통해 통일적인 제국의 정신적인 무기를 갖추고자 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경우는 좀 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상징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유례없이 거대한 대제국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다신교를 넘어서 더 강력한 일신교의 교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이미 310년경부터 태양신을 숭배하는 일신교에 귀의하고 있었다. 또한 일신교 체제를 갖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관대한 편이었다.

    하지만 태양신은 토테미즘 전통이 강하고 그만큼 투박할 수밖에 없는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로마의 지배를 받는 많은 지역의 종교들 가운데는 이미 이보다 훨씬 체계화된 교리를 갖추고 있는 것들이 많은 터에 태양신을 통해 다른 종교를 흡수하는 것은 설득력이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격화된 절대적인 유일신 체제에 기초한 교리가 전대미문의 대제국을 통일적으로 지배하기에는 더 용이했을 것이다.

    당연히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하고자 하는 콘스탄티누스의 시도에 반발하는 과정도 종교에 대한 반발을 매개로 하여 일어났다. 밀라노 칙령에 합의한, 제국의 동방을 지배하고 있던 리키니우스는 다시 이교도로 돌아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행위를 통해 로마에 반발을 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다시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 깃발을 걸고 리키니우스를 격파하여 명실상부한 통일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로마의 국교로 인정됨에 따라 기독교 역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한편으로는 거대한 교회당 건축을 통해 권위를 부여받는다. 4세기에 들어와 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인정되면서 새롭게 건설되고 있던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하여 로마, 안티오키아, 팔레스티나 등 각지에서 대규모로 교회당 건축이 시작된다. 5세기가 되면 이탈리아 중북부와 갈리아, 에게해 연안, 근동의 대부분 지역과 도시에서 교회당 건축이 활발해진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교리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오랜 기간 유지되어 오던 교리의 단순성으로는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역할을 하는 데 곤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에 익숙한 그리스적 전통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던 로마제국으로서는 기독교에 정교한 학문적 체계를 부여할 필요가 생겼다.

    이에 따라 기독교는 점점 신학적인 형식을 띠게 된다.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가 관심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신학적인 인물인 그리스도가 더욱 큰 관심의 대상이 된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초역사화된 신으로서의 예수로 재정립되는 과정을 거친다.

       
      ▲ 갈라 플라치디아 묘당 벽화 <목자예수> 425-50년경

    기독교의 변화 과정은 당시의 미술에서도 잘 나타난다.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호노리우스의 이복누이인 갈라 플라치디아의 묘당 벽화인 <목자예수>를 보면 로마 국교로 공인된 이후 기독교가 통치 이데올로기화되어가는 과도기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 예수는 더 이상 남루한 옷을 걸친 목동이 아니라 신격화된 존재로서 나타난다. 화려한 황금빛 옷을 입고 머리에는 신성함을 상징하는 두광이 번쩍이고 있다. 또한 기독교가 그리스·로마 문화와 섞여가고 있는 중임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자세는 그리스 조각에서 볼 수 있는 정형화된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한 양들과 정원의 묘사도 고대 그리스 미술의 서정성을 일정하게 담고 있다.

    이 시기에 예수의 후계자로 자처하면서 교리를 확대 보급하고 신학 체계를 만들어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사회 및 정치적 조건에 맞추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부(敎父, Fathers)로 불렸는데, 성직자로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하여 기독교 교리를 확립하고자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로마제국의 말기,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의해 그리스·로마의 고전문화가 붕괴해가는 시대였다. 410년 서고트인들에 의해서 로마자 정복되자, 당시 기독교를 믿지 않는 많은 로마 시민들이 로마의 몰락을 기독교 탓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비난에 맞서 기독교를 지키고자 <신국론>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 작업을 하였다. 특히 로마제국 붕괴이후 뿔뿔이 흩어진 봉건적 영지의 혼돈된 상태에서, 유럽을 묶어세우는 중앙집권적인 체제와 이념이 절실한 상황에서 그는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하여 중세에 이르기까지 신학이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교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여러 측면에서 접점을 찾게 된다. 그의 철학은 교회가 로마 교황을 우두머리로 한 중앙집권적 기구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반 역할을 했다. 이후 교회와 신학은 문화영역의 독점자 역할은 물론이고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존재론과 인식론 – 신에 의한 창조와 감각·이성에 대한 비판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양한 영역에 걸쳐 중세뿐만 아니라 이후 서양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철학은 신학적인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논의의 갈래를 잘 타면서 접근해야 사유방식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주로 인식론과 윤리학, 정치학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그의 사상과 만나보자. 여러 저작을 통해 그의 사유방식을 드러내고 있지만 특히 <고백록>은 인식론에 연관된 많은 힌트를 제공한다.

    교부철학이 단지 기독교 교리를 좀 더 세련되게 가다듬은 것은 아니었다. 또한 중세의 사상이 그리스·로마의 전통 외부로부터 일방적으로 전달된 것으로 보는 것도 단견이다. 교부철학은 스스로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이전의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여러 측면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전개되었다.

    이미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그리스 문화와 기독교적 정신 사이의 갈등은 존재하고 있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그리스철학을 이용하는 경향과 배제하는 경향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을 이용하여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하려 노력했다. 그는 “만일 이교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주의자들이 어쩌다가 우리의 신앙에 유익한 진리를 말한다면, 우리들은 그러한 진리를 경원시해서는 안 될뿐더러 그러한 비합법적인 지식의 보유자들로부터 진리를 간취해서 활용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기독교 교리와 플라톤주의의 접목을 통해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려 노력했다. 유대교가 어느 한 민족의 조상신을 넘어서 세계종교화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로마적인 전통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성을 가져야 했다. 그는 플라톤을 다른 모든 철학자들이 자리를 양보해야 할 최고의 이교도 철학자로 꼽았다.

    <신국론>에서 “탈레스는 그의 물을 갖고 떠나게 하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갖고, 스토아철학자들은 그들의 불을 갖고, 에피쿠로스는 그의 원자를 갖고 떠나가게 내버려 두라.”고 강조한다. 그리스 철학 중에 일차적으로 배제한 것들은 세상의 본질을 물질로 바라본 유물론자들이었던 것이다.

    유물론자들과의 싸움에서 가장 가까운 지원군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리스 철학자가 플라톤이었다. 오직 변치 않는 이데아만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물질과 감각은 거짓에 불과하다고 본 이데아 실재론이야말로 기독교 교리와 그리스 철학을 접합시켜 새로운 신학을 체계화하는 데 가장 적합한 무기를 제공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을 평가하면서 “최근에 생존한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제일 훌륭하다고 보았다.”고 강조한다. 플라톤으로의 복귀를 주장하고 이데아론의 영향을 받아 최고의 것은 존재를 초월하는 일자(一者)라고 본 신플라톤학파의 플로티노스에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에게 있어 플라톤의 이데아는 ‘창조 행위 이전의 창조자의 사상’이었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와 플라톤 철학은 단순한 접합을 통해 이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상당한 변형을 거친 후에야 기독교 교리화할 수 있는 철학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을 통해 그리스 철학을 기독교 교리에 맞게 변형하는 작업을 한다.

    그는 먼저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당신은 위대하나이다, 주님, 당신은 크게 찬미 받아 마땅하나이다(…) 당신 피조물의 일부인 한 사람이(…) 죄의 증거를 지니고 있는 한 사람이(…) 당신을 찬미하고자 합니다.”

    플라톤에게 있어 오직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만이 귀중하고 현실의 물질세계는 거짓에 불과한 것이었듯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현실적 존재인 인간은 왜소하며 보잘 것 없고 오직 영적인 존재인 신(神)만이 위대한 것으로 구별 정립된다. 신에 대한 극도의 긍정과 인간에 대한 극도의 부정에서 모든 사고가 시작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호와가 무(無)로부터 세상을 창조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플라톤에게 있어서 창조는 근원이 되는 물질을 가상하고, 신이 이에 대하여 형상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데아에 해당되는 형상이 일차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분명하나 이것이 무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다. 존재하는 질료에 형상이 작용을 하면서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에게 신은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초월적인 조물주가 아니라 질료를 이용해서 이 세상을 만든 기술자요 건축가였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데아 중의 이데아, 이데아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이 단순히 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를 하는데 머문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질료, 즉 물질까지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그리스 철학에 오랜 기간 남아 있던,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의 분신이라는 범신론적인 견해를 제거하는 작업부터 한다.

       
      ▲ 산 비탈레의 벽화 <우주의 지배자 예수> 546-48년경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 속에서 여호와는 세상 만물을 창조한 우주의 지배자로서 위치를 부여받게 된다.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설은 여호와만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를 세계의 지배자로서 자리 잡게 한다. 이 세상 만물을 직접 창조했으니 당연히 현실의 권력을 포함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지배권을 한 손에 갖는 존재가 된다.

    라벤나의 비탈레 교회 모자이크 벽화인 <우주의 지배자 예수>는 그의 신학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 그림에는 중앙에 예수가 있는데, 위로는 하늘이 아래로는 땅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주위의 인간들과는 달리 푸른 원안에 둥둥 떠 있는 듯한 묘사는 하늘과 땅위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우주의 지배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옆으로는 제정일치의 수장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부부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을 보면 건물같이 생긴 것을 헌납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왕궁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현실의 권력을 예수에게 헌납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그는 시간조차 신의 창조행위의 결과로서 정의한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만약 신이 시간 속에 있는 존재라면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것을 창조한 존재이기 어렵다. 인간처럼 객관적인 것의 제약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여호와가 세계를 창조할 때 같이 창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삼위일체론>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 존재의 본질에서 세 분이 같은 하나이시다. 거기에는 시간적 운동이나 시간, 공간의 간격 없이 모든 피조물 위에 있다. 세 분은 함께 영원으로 영원까지 같은 하나이시며, 이를테면 영원 자체이시며, 그 영원에는 진리와 사랑이 없지 않다."고 한다. 시간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신을 규정함으로써 신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시간에 있어서 이전이나 이후가 있을 수 없고, 오직 영원한 현재만이 있을 따름이다. 시간에는 세 가지 종류의 시간만이 있다고 본다. 통념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을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고백록>에서 오직 “과거의 사물들의 현재와 현재의 사물들의 현재 및 미래의 사물들의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과거의 사물들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사물들의 현재는 눈앞에 목격하는 것이며, 미래의 사물들의 현재는 기대”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과거나 미래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것이 된다. 과거나 미래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나 기대와 같이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시간이란 인간의 인식에 속해있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사유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에 객관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를 철저하게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실의 물질세계가 모두 허구의 세계이고 오직 진정한 본질은 이데아에만 실재한다고 주장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아우구스티누스에 와서 시간 개념의 변형을 통해 더 극단적인 양상으로 치닫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 속에서 우리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를 대표하는 플로티노스의 ‘근원적 일자’ 개념과 상당히 유사한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 플로티노스는 근원적 일자로부터 폭포수가 쏟아지듯 유출되어 만물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삶의 현실로 내려오는 과정이다. 인간의 영혼조차도 일자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물질세계의 감각을 넘어 이성적 사유로, 최종적으로는 이성적 사유를 넘어 엑스터시스를 통해 유출의 반대 과정을 밟는다면 일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근원적 일자를 아우구스티누스의 여호와로 바꾸면 상당부분이 일치하는 논리 구조를 갖는다. 신에 의해서 모든 물질세계는 물론이고 영혼도 만들어졌다. 신은 완전한 존재이고 인간과 세계는 열등하다.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믿음과 기도를 통해 신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의 범신론적인 흔적은 경계했다. 플로티노스의 유출설은 만물이 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것, 신의 모방된 상이자 반영을 의미하기 때문에 역의 과정을 통해 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범신론적인 해석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일신교인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에 일정한 수정을 가한다. 물질에서 영혼을 거쳐 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신이라는 존재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구원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펼친다.

    또한 플로티노스가 주장하듯 이성적 사유와 더 나아가서 이성적 사유를 초월한 아타락시아를 통해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이데아 세계로 접근하는 출발이 인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신이 그 자신을 초월하는 영원한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신적인 조명이 필요하다는 독특한 조명설(照明說)을 펼친다. 신에게서 계시의 빛이 내려옴으로써 비로소 이데아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영혼은 신의 진리가 빛을 비추어야 비로소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영혼은 눈이고, 신은 빛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신의 계시는 무차별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믿어야만 계시가 내린다. 그러므로 모든 것의 출발은 신이며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알아야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철저한 신앙우선주의를 확립했다.

    결국 그는 신플라톤주의에 그나마 남아있던 감각의 역할은 무덤으로 보내버리고 이성은 보조적인 역할로 최소화시킨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의 의지였던 것이다.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와 같은 것은 우리의 외면적이며 감각적인 말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며 심적인 말에서 구해야한다. 우리의 말이나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이나 지식 사이에는 최대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물질적인 감각은 물론이고 인간의 지식에 해당하는 이성을 통해서도 신을 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은 인식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일 뿐이다. 믿음을 통해서도 신 그 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부와 성자,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를 아는 것 정도에 머문다. 즉 신앙이 선행하고 이성이 뒤따르는 관계이며, 신앙을 위해 이성이 필요할 뿐이다.

       
      ▲ <레베카와 엘리에제> 6세기경

    물질적인 현실세계를 부정하고 심지어 이성적인 사고조차 보조적인 역할로 추락시킨 교부철학은 미술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보통 중세미술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단순화와 양식화의 경향, 공간적인 깊이나 원근법의 포기, 인체의 비례나 기능을 무시한 자의적인 취급 등은 특히 교부철학이 지배했던 중세 초기에 집중적·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일차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육체와 같이 물질적인 것 일체를 가장 열등한 것으로 여긴 교부철학에 의해 미술에서 생기발랄한 자연을 묘사하려는 시도가 거의 사라지게 된다. 그리스·로마 조각에서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인간 신체에 대한 관심도 사라져 버린다. 헬레니즘 시대에 발달한 개인의 현실적인 생활과 연관된 풍속적인 요소는 배척의 대상이 되고 오직 신앙에 필요한 성경 속의 이야기만이 미술의 대상으로 자리 잡는다.

    미술은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의 역할로 전락한다. 그리스·로마 미술의 특징이었던 사실주의적인 묘사와 자체적인 완성도는 오히려 성경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방해가 되어버린다. 예수의 구원을 가르치기 위한 상징적 요소만이 중요해지면서 비례와 원근법은 부정된다.

    비엔나의 창세기 필사본 삽화인 <레베카와 엘리에제>를 보면 교부철학시대 미술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창세기 내용 중 일부를 묘사한 그림이다, 아브라함이 엘리에제라는 종을 시켜 자기의 고향에 가서 아들 이삭의 신부를 골라오게 하였다. 엘리에제가 낙타 열 마리와 함께 길을 가다가 어떤 성에 이르러 처녀에게 물을 청하니 물을 항아리 채 주었다. 그는 레베카라고 하는 이 처녀를 이삭의 신부로 택하였다.

    그림 속에서 시간과 공간 개념은 이미 모두 무너져 있다. 그림 좌측을 보면 레베카가 성에서 나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기둥이 늘어선 길을 따라 우물을 향하는 장면과 엘리에제에게 항아리 물을 주는 장면이 동시에 그려져 있다. 그림이 완성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성경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시간 개념은 무시되고 있다.

    또한 주인공인 레베카를 강조하기 위해 길에 들어선 기둥이 어이없을 정도로 작게 그려져 있다. 또한 뒤의 레베카와 앞의 레베카가 거의 같은 크기로 그려져 원근법이 무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인물의 중요성에 따라 비례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뒤에 있는 인물을 앞쪽에 있는 조역보다 크게 그리는 ‘역원근법’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나마 구체적인 모양을 갖고 있는 회화가 중세 초기에 사용된 것조차 치열한 논쟁 과정을 통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조각을 통해 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성격에서 부정한 이교도의 우상과 너무나 비슷한 이미지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교부들이 유용성을 인정했다. 문맹률이 매우 높았던 당시 상황에서 회화는 성경의 내용을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데 유용한 도구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6세기 말의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문자를 아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그림은 문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다.”며 회화를 옹호했다.

    즉 미술이 기독교의 포교를 위한 수단 역할로만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화에 있어서조차 엄격하게 제한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했을 뿐이다. 오직 예수를 찬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것도 매우 단순하게 묘사되어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학 – 도덕적 주체로서의 자격 박탈과 금욕주의

    윤리와 관련된 아우구스티누스의 태도는 <신국론>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여기에서 다루는 원죄설, 은총설, 예정설은 기독교 교의의 확립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식론과 정치철학, 나아가서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원죄설에 의하면 신이 창조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여 인간은 원죄를 받게 된다. 당시 성경에 그려진 <아담과 이브>는 이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8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맨 위는 신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는 모습이다. 다음은 신이 에덴동산에 살게 하고 선악과를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전달하는 장면이다.

       
      ▲ <아담과 이브> 840년경

    신은 그들에게 불사의 몸을 주었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모세서)면서 축복을 주었다. 하지만 신의 계획 파괴를 꾀했던 사탄이 이브를 유혹한다. 세 번째는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후 부끄러움을 알게 된 아담과 이브에 대해 신이 노여워하는 장면이다.

    좌측의 그림을 보면 하나의 그림 안에 선악과를 따는 이브와 아담에게 전달하는 이브가 동시에 그려져 있다. 이 역시 그림의 사실성과 완결성보다는 이야기 전개의 편의를 위해 시간 개념이 무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은 신에 의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의 노여움에 의해 그들과 그들의 자녀는 병과 고통과 육체적 죽음을 겪게 되었다. 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써 아담의 범죄는 인류를 영원한 죽음에 빠지게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의 죄는 근본적으로 신의 명령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남용·오용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규정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설과 예정설은 원죄설의 자연스러운 귀결로서 전개된다. 원죄설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죄에 빠졌다. 인간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죄를 범했으므로 인간에게는 구원을 요청할 권리도 없게 된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오직 신의 의지,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은총설의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논리는 신의 은총을 받아 구원될 자는 신의 선택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로 이어진다. 구원의 주체가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선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신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는 존재이므로 누가 구원될 것인가 역시 미리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은총을 위해서는 참회해야 하는데, 이는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가질 때 가능하다. 결국 인간의 죄는 신에 귀의함으로써만 구제된다. 신에 대한 절대 복종은 지상에 있어서는 유일하게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로부터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관을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구원이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한 점은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구분선을 분명히 그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신에 의해 진정한 지식을 갖출 때 덕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 소크라테스, 여기에 덕을 실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의 실천적인 의지라고 할 수 있는 선의지를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덕에 이르기 위한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다 부질없는 행위에 불과하다. 교부철학이 정립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윤리적 결단의 자유를 강조하고 원죄설을 거부한 수도사 펠라기우스(Pekagius)와 그 추종자들에 대항하는 논리이기도 했다.

    그는 “영혼이 덕으로 보고 모든 애정을 기울일 것으로 생각되는 덕일지라도 그것들이 다 신의 빛을 나타낼 수 없으면, 오히려 악이 되는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덕이 기독교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또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죄가 인간의 육체적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고 영혼을 통해 치유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이러한 결론은 근본적으로 오류에 해당한다. 그에 의하면 죄는 인간의 영혼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 자체가 죄의 원인일 때 인간은 더 이상 윤리의 주체일 수 없게 된다.

    윤리의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악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만약 악이라는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 악을 누가 만들었는가가 쟁점이 된다. 하지만 신을 절대화한 기독교의 입장에서 악을 신이 창조했다는 것은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실체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선이고, 악은 단지 선이 결핍되어 있는 상태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빛이지 원래 어둠이란 것은 실체가 없다, 빛이 오자랄 때 어둠이 생겨난다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선의 결핍으로서의 악은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인 부패와 타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된다. 윤리적인 악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오용하고 신에게서 멀어졌기에 스스로 자초한, 피조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니 악을 만들어낸 인간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윤리성을 회복한다는 것 자체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주장에 해당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는 인간 행위의 목표는 헬레니즘 시기 대부분의 철학이 그러했던 것처럼 행복의 실현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행복으로 보는가, 어떻게 행복에 도달할 것인가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원죄설·은총설·예정설의 논리에 의해 행복은 오직 신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인간의 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윤리적인 의무에 해당하게 된다. 흔히 3주덕이라고 얘기하는 믿음·소망· 사랑 가운데 성경의 가르침대로 특히 사랑이 윤리적인 삶의 핵심으로서 강조된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다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잘못된 사랑은 악으로 귀결된다.

    그에 의해 윤리적으로 옹호되는 사랑은 카리타스(caritas), 즉 일차적으로는 신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이다. 나아가서는 신이 창조한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사랑의 대상인 피조물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위의 최고 목적인 신을 향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악으로 연결되는 사랑은 쿠피디타스(cupiditas), 즉 마땅히 사랑해야할 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랑이다. 이는 무질서하고 왜곡된 사랑이다. 사랑하는 대상 자체가 목적이 되어 여기에서 즐거움을 향유하느라 신에게서 멀어지는 사랑이기 때문에 악으로 귀결된다.

    그는 사람들에게 “빼앗길 수 없는 것만을 사랑할 것”을 권유했다. 오직 영원한 것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지상의 부나 육체는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신이므로 신을 사랑해야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철저한 금욕주의적 도덕관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성적인 사랑은 어떻게 되는가? 그가 보기에 결혼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교는 죄가 아니다. 이를 제외한 모든 성교는 육체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므로 물질을 사랑하는 것으로서 부정된다. 또한 결혼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성적인 사랑이 정당화되는 것은 그 의도가 자녀를 두려는 목적에만 한정된다고 주장한다.

    결혼에 있어서도 덕이 있는 사람은 육체적인 욕구 없이 성교가 이루어지기를 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덕은 영혼이 육체를 완전히 지배하고 신에게로 향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성은 영혼의 작용인 의지에서 독립하여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성행위는 덕이 있는 생활과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 중세 성지침서 <신체의 관리법> 삽화, 1285년경

    중세의 성 지침서였던 <신체의 관리법> 삽화를 보면 그가 주장하는 성도덕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이 지침서는 아이를 만들기에 가장 적당한 시간에 초점을 맞춰 적절한 남성 체위를 설명한다.

    출산을 위한 성행위로 제한된 내용일 뿐 육체적인 욕구나 쾌락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성교에 탐닉하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생산하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책에는 성교를 할 때 느낄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의 즐거움을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아예 없다. 그림을 보면 두 남녀가 이불로 몸을 가리고 정상 체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는 격정적인 모습이라곤 볼 수 없다. 그림에서 남성은 임신이라는 그의 임무에 집중하고 있는 듯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사철학과 국가론 –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의 투쟁

    <신국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더 없이 좋은 텍스트이다. 기본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는 역사철학적인 관점이 녹아 있으면서 국가와 정치체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이 책은 기독교의 관점에서 로마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저술했다. 당연히 저술 목적은 기독교 교리를 전 인류에 걸친 원리로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로마 제국이 쇠망의 길로 접어들던 때였다. 특히 5세기에 접어들면서 북방의 게르만족에 의해 로마가 점령당하게 된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로마의 운명과 기독교의 운명을 분리해야 할 강력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하더라도 이와는 달리 기독교는 계속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번성해야 함을 논리적으로 규명해야 했다. 또한 유례없이 광활하고 강력한 대제국이었던 로마가 멸망하는 것을 목도한 사람들에게 국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주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신국론>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과제에 복무하기 위하여 쓰였다.

    그는 로마제국으로 상징되는 지상의 국가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가 이념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세계 역사의 변화 과정에 대한 나름대로의 역사철학적인 분석을 제시한다. 세계사는 지상의 나라의 신의 나라 사이의 투쟁 과정을 통해 변화·발전해왔다고 주장한다.

    신의 나라는 일체의 선을 담고 있는 반면에 악마의 나라는 일체의 악을 포함하고 있는 ‘악마의 나라’로 규정한다. 이와 관련하여 신의 나라인 예루살렘과 지상의 나라인 바빌로니아라는 두 도시의 발전과정을 분석한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진영의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보다도 자기를 선택하는 진영과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기보다도 하나님을 선택하는 진영이 그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하나의 국가 안에서도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신의 나라에 속한 것이고, 세속의 이해에 물든 사람들은 지상의 나라에 속한 존재들이다.

    두 진영이 최후 심판 때까지 변증법적으로 계속 갈등과 투쟁을 해나간다고 본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투쟁이 세계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인의 후예들’에 의해 만들어진 지상의 나라인 로마가 멸망할지라도 국가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신의 세계왕국’이 그 장소에 건설되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지상의 나라를 없애고 신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신의 목적이며, 신의 뜻은 신이 정한 시기에 이루어지며 신의 나라가 도래하면 모든 탐욕은 다스려지고 신의 사람만 남게 된다고 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적 결론은 세속적 권력에 대한 영적 권력의 우위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곧 신의 나라인 것은 아니지만 신에게 다가서는 일이 현실의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논리에 비추어볼 때 결국 그의 주장은 교회에 의한 국가 지배, 교회의 전 세계 지배를 실현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관점은 교회의 교리로 확립되어 중세시대에 서로마에서 교황과 황제의 권한을 둘러싼 갈등이 있을 때마다 교회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신학적인 논리로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된 상징적인 사건이 잘 알려진 ‘카노사의 굴욕’이다. 10세기 후반에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회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개혁적인 수도사들은 성직자의 결혼과 성직 매매라는 타락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이 세속 군주에 의한 성직자의 임명에 있다고 보았다.

    1075년에 교황이 성직자 서임권이 교회에 있음을 밝히자 세속 군주들과 일종의 권력 투쟁이 벌어진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폐위를 결정하였다. 이에 교황은 로마회의에서 황제의 파문과 폐위를 선언하였다. 파문을 당하면 봉건 제후들의 충성을 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황제는 카노사성(城)에 체재 중인 교황을 방문하여 눈이 내리는 성 밖에 3일간 서있고 나서야 굴욕적으로 사면을 받았다.

       
      ▲ <하인리히 4세와 마틸다> 1115년경

    <하인리히 4세와 마틸다>는 이 사건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황제가 카노사성의 주인이자 교황의 후원자인 마틸다에게 무릎을 꿇고 교황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는 장면이다. 그 옆에 수도사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은 클뤼니 수도원장인 휴고이다.

    한 눈에 보기에도 황제의 표정은 무엇을 구걸하는 듯이 초라하다. 이에 비해 마틸다는 관용을 베푸는 듯한 손짓과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수도원장의 손짓이다. 마틸다에게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 지시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수도원장이 황제의 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두 배에 이를 정도로 훨씬 크게 그려져 있다. 강조하고 싶은 인물이 뒤에 있더라도 교회의 이해에 맞도록 더 크게 그리는 ‘역원근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장치는 신의 나라가 우위에 있음을 분명하게 묘사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철학은 다분히 플라톤의 철인통치론과 닮아있다. 인식론에 있어서 그에게 미친 플라톤의 영향이 정치철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 개념이 현격하게 다르고, 지상의 나라와 구분되는 신의 나라를 별도로 설정했던 점도 상당히 다르지만 몇 가지 중요한 문제의식에서 일치하고 있다.

    군사력이 아니라 정신에 의한 지배, 다수의 시민이 아니라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권력 독점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 또한 플라톤이 현실의 부와 육체적 쾌락을 죄악시하고 이를 철인통치를 통한 정신적인 정화로 대체했다는 점과 아우구스티누스가 매우 실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상업에 대해서도 적극적이었던 로마 문화를 도덕적 타락으로 규정짓고 극단적인 금욕주의적인 교리 위에 국가를 올려놓으려 했다는 점 역시 충분히 교집합 역할을 하고 있다.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를 구분하는 논리는 이미 그리스·로마 문화에 오랜 기간 뿌리내리고 있던, 이 세상은 물론이고 인간의 내면까지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분을 통해 설명하려고 했던 논리와 맞닿아 있다. 또한 그에게 미친 마니교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세기에 예언자 마니(Mani)에 의해 만들어지고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던 마니교에 심취했던 시절이 있었다. 마니교는 선악이원론, 즉 이 세상은 광명과 암흑, 선과 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식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을 펼쳤다. 일체의 선을 구현한 신의 나라와 일체의 악을 구현한 악마의 나라 사이의 투쟁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상은 마니교의 이원론과 상당히 근접해있다.

    물론 둘을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선과 마찬가지로 악을 실체로 보았던 마니교의 논리를 비판하고 오직 선만이 실체이고 악은 선이 부족한 상태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기독교적 논리에 맞도록 수정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논리상으로 악을 실체로서 인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적으로는 선과 악이라는 구분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설명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중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에 연장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발상을 통해 고대 시대에는 그리스인과 그리스 문화가 문명을 대표하고 다른 지역 사람과 문화를 야만으로 구분했다면, 아우구스티누스를 경계로 한 중세부터는 기독교를 인정하는 문명과 이교에 의한 야만이라는 새로운 이분법적 문명관이 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선과 악, 문명과 야만이라는 논리는 이후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서구적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학은 변화된 조건에 맞게 과거의 국가철학을 새로운 국가철학으로 변화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알렉산더의 대제국이나 로마제국은 주로 군사력에 기초하여 거대한 국가체제를 형성한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대토지 소유와 노예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막대한 물질적 부와 대규모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예제에 기초한 대토지 소유와 군사력에 의한 대제국의 확장·유지가 한계에 다다르게 된 상황에서 로마제국의 쇠퇴는 찾아왔다. 게르만족에 의한 로마제국의 멸망은 대토지 소유에서 소농경영으로, 노예제에서 농노제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군사력에 의존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로서의 대제국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또한 대규모의 영토와 구성원을 자본과 관료의 촘촘한 그물망을 통해 관리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근대국가체제를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독교라는 정신적 연결망을 무기로 국가의 규모와 통치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새로운 운영원리를 정립한 것이었다. 그리고 군주와 교회의 갈등은 국가와 교회, 국가철학과 신학의 갈등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체제 내부의 주도권을 둘러싼 세력 간의 갈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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