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위기가 다시 불러낸 거장의 목소리
        2009년 10월 29일 11: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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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 스위지

    대학신입생 시절, 이른바 “언더(지하)”라 불리던 강의실 밖에서 배우는 경제학 커리큘럼 속에는 폴 스위지(Paul Sweezy, 1910-2004)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했다.

    영국 케임브리지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모리스 돕(Maurice Dobb)과의 사이에 벌인 이른바 자본주의 이행논쟁의 당사자로서, 그리고 직접적으로 『자본론』등의 원전에 접근할 수 없던 시대상황 속에서『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이라는 마르크스경제학 입문서의 지은이로서였다.

    영어실력 때문에 제대로 다 읽지도 못했지만, 조잡하게 복사된 “제록스판”으로 접했던 스위지는 사회과학에 관심이 있었던 내 또래들에게는 아득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

    영어도 잘 모르면서 ‘제록스판’ 원전을 읽던 시절

    은행가 출신의 아들로 태어나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고 조교수가 되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이유로 정년보장을 받지 못하고 학계를 떠나, 매카시즘의 광풍을 겪은 뒤에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라는 좌파 잡지를 발간하면서 백여 년에 가까운 일생을 미국 좌파의 상징적 존재로 지낸 인물. 스위지는 그 학문적 성취나 수준 등을 떠나 이러한 이력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희미한 내 기억의 사진첩을 들쳐보면, 그러나 스위지는 예의 학습커리큘럼에서 항상 “따라 배우기”보다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이행논쟁에 관한 세미나의 결론은 역사발전의 내적 동인을 정당하게 강조한 돕과는 달리, 스위지는 외부 상업의 발전을 강조한 유통주의적 편향을 지니고 있다는 간단한 평가로 마무리되곤 했다.

    자본주의의 공황을 설명하는 방식과 관련해서도 스위지는 항상 과소소비설이라는 잘못된 이론적 경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재단되었다.

    1980년대 중반 사회과학출판의 전성기에 한 번 번역된 바 있던『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이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1942년에 씌어진 것이다. 예컨대 마르크스나 애덤 스미스 같은 대가의 고전도 아닌 이 책이 출간된 지 60년도 지난 지금 다시 번역된 것은 왜일까? 흥미롭게도 스위지 자신 이 물음을 예상이라도 한 듯 다음과 같은 답변을 준비해두고 있다.

       
      ▲ 스위지 지음, 이주명 옮김, 필맥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대체로 사회체제 전체와 관계가 있다. 그러다보니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파국적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그들은 정서적 충격과 지적 혼란에 빠진다.

    반면에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자본주의의 특정한 역사적 성격(다시 말해 일시적 성격)이 중요한 전제가 된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를테면 체제의 바깥에 서서 체제를 그 전체로서 비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체제가 겪고 있거나 앞으로 겪게 될 변화는 바로 인간의 행동이 일으키는 것이므로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지적으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의미도 갖게 된다.”

    “체제의 바깥에 서서 체제 그 자체를 비판”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체제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되살리고 있다. 최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본론』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해 미약하나마 관심이 일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비단 마르크스주의라는 특정한 입장을 받아들이건 들이지 않건간에, “체제의 바깥에 서서 체제 그 자체를 비판”하는 안목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비슷비슷한 종류의 책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스위지를 읽어야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서평을 쓰기 위해 빠른 속도로 다시 한 번 훑어본 이 책은 비록 마르크스경제학계의 최고나 최신 수준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마르크스경제학 입문서로서는 여전히 최고수준의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하다.

    경제학방법론에서 출발하여 (1942년 당시 매우 시사적이면서도 중요한 문제였을) 파시즘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의 이론을 자신의 말로 풀어서 설명하는 능력은 다른 어떤 개론서들과 비교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이론경제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의 가장 큰 기여는 가치이론에 관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양적 가치이론과 질적 가치이론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하는 것은 이 책 발간 한참 뒤인 1970년대의 이른바 “마르크스 르네상스” 시기에 다양하게 제기되었던 이론들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중요한 틀로서 아직도 유효하다.

    전형(‘전환’으로 번역되고 있다)에 관한 설명(VII장)은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형 문제를 수학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후 국제적으로 이른바 제2차 전형논쟁을 일으키는 도화선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저 학생시절 세미나의 희미한 기억으로만 알고 있던 스위지의 참모습은 추상수준의 문제를 다루는 부분에서 비로소 온전하게 드러난다.

    추상적 법칙을 구체적 수준의 예측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매우 중요한 주장이다. 20세기 초반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였던 자본주의 붕괴론을 다루면서, ‘추상의 구체화 정도에 대한 판단의 오류’(331쪽)를 경고하는 것은 마르크스를 마치 종교적 예언자나 신성불가침의 이론가로 간주하고 그것을 옹호하거나 반대로 그 예언이 틀렸다는 점을 들어 통째로 기각해버리는 두 가지 태도 모두가 잘못임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체제의 변화도 결국은 “인간의 행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 따라서 순수이론에서 파악된 추상적 법칙이나 경향으로 사회체제의 변화를 예단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체제의 변화도 결국은 인간의 행동에 의해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예의 과소소비론도 새롭게 이해될 여지가 있다. 스위지는 “자본주의가 소비재에 대한 수요의 증가보다 더 빠르게 소비재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는 내재적 경향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253쪽)이 과소소비론의 진정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과제가 거창하게 말하자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문명비판으로서 여전히 의미를 갖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스위지 자신이 누차 강조하듯이, 과소소비로의 “경향은 늘 존재하지만…대항력에 의해 그 전부 또는 일부가 상쇄될 수 있”(258쪽)는 것이므로 그것을 절대화하여서는 곤란한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장점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제국주의에 관한 분석이 대체로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답습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은 1942년이라는 시점을 감안하더라도, 스위지 정도의 대가라면 좀 더 새로운 무엇을 덧붙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결정적으로 책의 마지막 부분(501~2쪽)에서 비록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사회주의로의 평화로운 이행가능성에 대해 전망하는 것은 물론 6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명확하게 틀린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전형 문제의 서술에 등장하는 이차방정식이나 과소소비를 설명하기 위한 미분법의 사용 등은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는 일반 독자들을 쫓아버릴 위험성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경제에 관한 마르크스적 분석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이 책의 미덕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눈길을 끄는 화려한 디자인이나 선정적인 광고문구도 없는 번역서를 집어든 순간, 나는 <먼슬리 리뷰>를 떠올렸다 스위지는 먼슬리 리뷰라는 잡지를 소박한 편집과 최소한의 비용으로 반세기 이상 꾸려나갔다. 이 책 또한 매끄러운 번역과 더불어 자본주의 체제의 나아갈 방향에 관심을 갖는 많은 독자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거장의 얘기를 잔잔하게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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