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체제 강조는 '결국 비지론' 의심
헤게모니 전략에 앞서 좌파혁신을
    2009년 10월 27일 08:54 오전

Print Friendly

조희연 교수의 답글 잘 읽었습니다. 못 받을 줄 알았던 답글을 받게 되니 한편으로 감사했지만, 막상 읽어 보니 그 수신인이 정말 저인지가 분명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노동자의 힘’과 별 무관한 사람일 뿐 아니라, 전에 쓴 글에서 저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고사하고 ‘사회주의’도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저에게 이런 답글을 준 걸까,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자유주의세력과의 헤게모니 투쟁을 강조하니 곧바로 저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재해석”도 하지 않은 채 고집하는 ‘구좌파’로 단정하신 건지요? 저는 오히려 재해석만 해주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을 복권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조 교수가 ‘구좌파’가 아닌지 잠깐 의문을 품었습니다. 제가 하지 않은 주장에 대한 비판은 정중하게 교수님께 돌려드립니다.

오늘은 몇몇 오해를 풀어보고, 더 나아가서 지난 번에 논하지 못한 조 교수님의 주장의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08년 체제의 이론적 불필요성

먼저 제가 전에 쓴 글의 문제제기의 핵심은 ‘급진 민주주의 헤게모니 전략을 채택하기 위해 08년 체제를 인정해야 할 이론적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지 조 교수의 답글에는 이에 대한 어떤 직접적인 답변도 찾을 수가 없더군요.

오히려 제가 근거 없이 일종의 좌파 버전 ‘색깔논쟁’을 제기한 것인 양 오해하신 듯했습니다. 피티독재니 사회주의니 말씀하신 것은 이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 라클라우와 무페

다시 한 번 상기시켜드리면, 라클라우-무페가 잘 설명하듯이, 우리가 헤게모니 전략을 채택해야 하는 이유는 적대가 선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선명치 않기 때문인데, 오히려 조 교수는 08년 체제의 등장을 통한 선명한 대적전선의 등장이 급진민주주의 헤게모니 전략을 채택해야 할 근거라고 주장하시니 이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논점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조 교수가 그나마 간접적인 답변을 주신 것이 있다면, 아마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최원 씨도 잘 알고 있겠지만, 라클라우・무페는 80년대 신보수정권의 출현에 대하여 60・70년대의 사회민주주의적 통치에 대한 새로운 저항 형태들이 "완벽할 정도로 반-민주주의적인 담화에 접합될 수 있다는 것은 근래의 ‘신우파’의 진전에 의해 명백히 예증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라클라우-무페도 노골적인 반민주적 속성을 보여준 80년대의 ‘신우파’ 정권의 등장 속에서 급진 민주주의 전략을 주장했다는 말씀이겠지요. 맞습니다. 그렇지만 라클라우-무페의 저 말의 맥락을 다시 잘 새겨보면, 그 말이 사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논점은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자유’ 또는 ‘개인주의’를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보수적 가치관들(가족주의, 인종주의 따위)과 결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공공성 파괴의 결과로 나타나는 다양한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러한 신우파의 보수적 가치관들과의 접합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08년 체제’의 독자성을 강조함으로써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조 교수와는 반대로, 라클라우-무페는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신우파) 사이의 차이라는 것은 양자 간 접합에 장애가 될만한 대단한 차이가 전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셈입니다.

제가 알기로 어떤 경우에도 라클라우-무페는 급진 민주주의 전략 채택의 근거로 자유주의세력과 대별되는 ‘신우파 정권’의 등장을 든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일 그것이 기준으로 제시되면, 논리적으로 봤을 때, ‘상대적 좌파’가 선거에서 승리해서 정권을 장악(또는 탈환)하게 되면 급진 민주주의 전략은 정세적 유효성을 상당히 상실하게 된다는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권 성격과 ‘급진민주주의’는 논리적 관계 없다

예컨대, 영국의 노동당이 정권을 장악하든지, 프랑스의 사회당이 정권을 장악하든지 하면, 이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침에도 불구하고 급진민주주의 전략은 효과적이지 못한 전략으로 유보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또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가 미국 공화당 부시와 손을 잡고 이라크로 쳐들어가면 그 경우엔 어떤 전략을 채택해야 할까요?

급진 민주주의와 모종의 다른 전략의 하이브리드(hybrid)라도 고민해 봐야 하는 걸까요? 또 만에 하나 다음 대선에서 민주당이나 친노 세력이 승리하게 되면(지금으로 봐서는 가능성이 낮아 보이지만), 그 때는 이제 ‘13년 체제’를 인정하고 급진민주주의가 아닌 뭔가 다른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걸까요?

상황이 이렇게 약간 코믹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조 교수도 알다시피, 신자유주의가 역사적 좌파와 역사적 우파 사이의 구분 자체를 상당한 정도로까지 무력화시키는 데에 성공해 왔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 성향이 아니라 심지어 좌파성향의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신자유주의에 발목이 잡혀 소위 “개혁”이 좌초되고,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대중의 지지를 잃고 정권을 내준 사례는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지요.

사태가 이렇기 때문에, 저는 지난 번 글에서 ‘08년 체제’를 이론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민주당 헤게모니에 종속될 위험만 키우는 혼란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조 교수가 이번에 준 반론은 저에게 별로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더군요.

“단지 ‘헤게모니적 정치’ 실천의 영역은 그 속성 상 자유주의의 헤게모니로 종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좌파 헤게모니로 종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 양가(兩價)적 공간이다. 필자가 볼 때, 좌파적・진보적 세력만 100% 이익을 보는 공간은 이미 그람시적 의미에서의 헤게모니적 정치의 공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정치는 헤게모니 각축 과정이고 헤게모니적 정치를 사고하는 것은 ‘개량화’의 위험이 있는 영역에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희연 주장의 논리적 비약

저는 여기서 헤게모니 공간이란 좌파적 헤게모니로 종속될 수도 있고, 자유주의적 헤게모니로 종속될 수도 있는 “양가적 공간”이라는 조 교수의 생각에 유보 없이 완전히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양가성이라는 것은 헤게모니적 공간 ‘일반’에 나타나는 특징에 불과하다는 점을 동시에 지적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자유주의 세력과의 헤게모니 ‘연합’ 전략을 택하지 않고 반대로 헤게모니 ‘투쟁’ 전략을 택한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좌파의 승리를 100% 보장해주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지요. 헤게모니 투쟁 전략을 채택해도 최종적인 골득실이 불분명해질 수도 있고, 심지어 투쟁에서 패하여 자유주의적 헤게모니로 완전히 종속되는 경우까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좌파가 ‘체제 외부’ 또는 ‘너머’를 지향하는 맑스주의적 담론을 구사하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헤겔주의적인 제도적 타협으로 결국 마무리 되는 경우가 역사적으로 보면 훨씬 더 빈번하게 발생한 일이라는 점만 봐도 그렇습니다(저는 이러한 ‘개혁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요한 민주적 전진들로 간주한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정확히 그렇기 때문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이렇게 ‘양가성’이 헤게모니 공간을 일반적으로 특징짓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헤게모니 공간에서는 자동적으로 ‘투쟁’ 전략 대신 ‘연합’이나 ‘유연화’ 전략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 교수는 여기서 헤게모니 공간으로 들어선다는 것은 곧바로 양가성에 노출되는 것이며, 따라서(!) 헤게모니 연합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마지막 ‘따라서’는 동의할 수 없는 논리적 비약이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민주당 헤게모니에 최대한 종속되지 않고, 새로운 역사적 좌파 블록을 형성할 수 있는 헤게모니 전략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 교수가 왜 이렇게 민주당, 친노와의 연합을 강조하는지가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사실 이 문제가 본 글의 후반부에서 제가 이론적으로 고민해보고 싶은 주제입니다). 심지어 이번에 주신 글을 보고 저는 조 교수가 취하는 입장이 ‘비판적 지지론’의 재판이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들었습니다.

조 교수는 “반독재 자유주의 세력과 진보적 좌파적 세력 간에는 각축적 대결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세력의 헤게모니화를 저지하는 ‘연합정치’의 과제와 공간도 존재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어려운 말 걷어 내고 쉽게 풀어 말하면 민주당-친노세력과 좌파세력은 평소에는 서로 경쟁도 하지만, 한나라당이 권력을 쥐는 것을 막는 것이 문제가 될 때는 그 일에 더 성공적일 수 있는 쪽을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한다는 말 아닙니까?

설사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비판적 지지론’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조 교수의 주장이 원칙을 어느 정도 “슬기롭게” 타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주장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결론은 비지론 아닌가

저는 조 교수가 주장하고 있는 급진민주주의 전략의 애초의 목표는 중간세력을 민주당 헤게모니에서 분리시켜서 좌파진영 쪽으로 견인하자는 것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가 정확히 문제겠지요.

원칙의 일정한 양보를 통해 중간계급에게 무엇인가를 내어주고, 또 그 대가로 중간계급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오는, 모종의 ‘교환’을 통해서 그렇게 할 것인가? 아니면, 좌파의 새로운 급진적 원칙, 이념을 수립함으로써 이전과 다른 혁신된 전망을 대중들에게 제시하여, 각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다양한 이질적 세력들의 정세적 접합을 생산해 낼 것인가?

   
  ▲ 발리바르

정말 오래된 텍스트이고, 저자 스스로도 근본적 정정이 필요하다고 말한 텍스트이긴 하지만, 『민주주의와 독재』(1976)의 영문판 후기에서 에티엔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계급동맹’을 사고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점은, 프티부르주아지는 사실 실존하는 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분할된 결과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동맹의 문제를 프티부르주아 계급 대(對) 노동자 계급의 ‘계약’이라는 문제설정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소위 중간계급들을 계급동맹에 가담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지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실천들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에서 헤게모니 투쟁을 사고할 필요가 여전히 있다는 생각을 하고, 특히 지금과 같은 정세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헤게모니 전략의 선행 조건은 좌파 혁신

물론 여기서 잊으면 안 되는 것은, 이러한 헤게모니 ‘투쟁’ 전략의 필수적인 선행조건은 무엇보다도 좌파 자신의 혁신이 아닐 수 없다는 점입니다. 좌파가 새로운 ‘더 많은 민주주의’의 전망과 대안을 생산해 내지 못한다면, 이와 같은 헤게모니 투쟁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백전백패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좌파적 혁신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묻자는 것이 사실 제가 조 교수에게 했던 제안이었지요.

<레디앙> 편집진이 지난번 저의 글을 편집하기 이전에 제가 붙였던 원래의 제목은 “체제 논쟁의 초점 전환을 위하여”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실상 용도가 불분명하고 혼란만 야기할 수 있는 08년 체제의 독자성 증명에 몰두하지 말고, 무엇이 좌파 자신의 혁신의 쟁점들인가를 논해보자는 것이 저의 제안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다시 제 글에 똑같은 제목을 붙여 봅니다. 두 번째 편지는 조 교수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2편에 계속>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