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청과 민주주의 그리고 마르크스
        2009년 10월 26일 08: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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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을 먹고 무장사 곽씨 무밭에 가서 무청을 얻어 왔다. 곽씨는 가락동 농산물 시장 경매사를 하다가, 당뇨가 심해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조그마하게 지으면서 강릉의 대형 마트에 납품을 하고 있다.

    무청은 오히려 무보다 영양분이 더 많다. 과거, 소작농이 주로 농업을 하던 시절에는 무를 잘라서 땅을 파고 구덩이에 넣고 무청은 따로 엮어서 겨울내내 보관을 해서 시래기로 먹었다.

    무청의 비타민은 겨울내내 햇빛을 받으면서 영양분이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지금은 무청은 도무지 쓸모가 없다. 산업농(상품농)을 하는 바람에 인부를 써서 무청까지 건드릴 여유도 없고 수지타산도 맞지 않는다. 그냥 밭에 내버려지는 것이다.

       
      ▲건조 중인 무청 사진.(사진=필자) 

    모든 것이 상품으로 통하는 세상이 되다보니, 물건이 본래 가진 가치와 상관없이 상품의 가격으로만 모든 것이 매겨지는 것이다.

    영양분이 더 많은 무청은 버려지고 무는 상품이 되어 버젓이 팔리고… 백오십년 전 맑스가 부르짖었던 이른바,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앞지르고 그것으로 대체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쓸모 있는 비타민은 지하로 사라지고 그 위에 한 수 아래의 비타민이 주인 노릇을 하며 버젓이 본래의 가치를 대신하는 것이다.

    버려진 무청

    맑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시선 중에서 상품과 화폐에 대한 미시적인 의견에는 내가 동조하는 편이다. 이윽고, 교환가치인 상품의 이윤의 축적이 자본의 축적이 되면서 노동자 계급과의 갈등이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이 될 것이라고 맑스는 이야기했고,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듯하다.

    영양분이 더 많은 무청이 땅속으로 사라져야 하는 부조리한 사실에서 근원적 민주주의를 생각해 보자.

    맑스는 무든 무청이든 상품이 되어 이윤이 자본가에게 더 많이 가는가 노동자에게 더 많이 가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무가 상품이 되는가 무청이 상품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맑스 역시, 유럽 근대 자유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있지 않다. 자유시민들의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는 봉건 제도를 타파하게 되었지만, 실제로 그 목적은 그들의 사유재산과 그들의 물적 토대인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19 세기 유럽의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시킨 것은, 자유시민들이 아니었고 오히려 시민계급을 견제해야 할 귀족들이었다. 맑스가 이야기하는 계급투쟁을 통한 노동조건의 개선은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근본으로 하고 맑스는 계급을 단위로 사회를 개혁하려 하지만, 그 또한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옳은 판단일지 모르지만, 거시적 역사적 안목으로 볼 때는 그것과는 별개로 틀림없이 사회의 요구에 의해 모든 것이 개혁되어 왔다.

    상품의 이윤에 대한 문제가, 권력투쟁으로 번지고, 그것은 유럽 자유시민들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맑스의 의도와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유시민들이 쟁취한 권력의 세분화는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여러 형태의 민주주의를 만들었다. 그것이 절차적 민주주의다.

    맑스가 의도했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자유시민들의 소박한 자본주의 역시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권력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무청이 대접받기 위해서는

    무청이 본래의 가치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그것을 누군가가 상품화해서 시장에 내놓아 더 높은 가격을 받으면 된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지를 전혀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거다.

    무청이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상품이 존재하는 시장의 압력에 저항을 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그리고 그 저항을 근본으로 삼아 무청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에 대해 역설을 해야 한다. 세상에 대해서. 그러나 결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시장을 내버려두고서는.

    맑스에 따르면, 계급투쟁을 통해서 노동자가 자본가와 적당히 이윤을 나눠먹고 시장을 존속시킨다면, 역시 해결 방법이 아니다. 무라는 상품은 그대로 존속하는 것이다.

    이윤의 정당한 분배를 통한 노동자의 정치권력 또한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 노동자의 노동 또한 상품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결 방법은, 상품이 되지 않는 사회, 노동이 인간 본래의 생명활동과 상호부조의 역할에 국한되는 사회가 되는 것뿐이다.

    절차적 민주주의 완성과 노동자의 정치권력 획득에 민주주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민주주의는, 물질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가치가 대접받는 사회가 도래하는 길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오늘 무청을 밭에서 가져오고 그것을 엮어서 뒷 뜰 처마 밑에 걸어 놓는 일련의 노동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진정 민주주의 사회인 것이다. (오늘 나의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노동인 것이다. 차라리 공공근로 나가서 몇 만 원 벌어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옳은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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