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 재정전략 남발이 가능한 이유
    디지털 예산프로그램제도의 위력
        2009년 10월 22일 09: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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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앞에 292조원의 돈이 있다. 국회에 제출된 내년 정부총지출 금액이다. 만약 당신이 기획재정부장관이라면 내년 예산안을 어떻게 짜겠는가? 이 천문학적 금액의 지출을 위해서는 일정한 예산편성틀이 필요하다. 이제 어떤 방식으로 예산안이 편성되는 지 살펴보자(이후 기금 포함한 정부총지출안을 예산안으로 칭함).

    전략적 재정배분에 걸맞는 예산편성체계란?

    근래 우리나라에서 예산편성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2006년까지 예산편성은 각 부처가 구체적인 예산항목을 수립하여 예산당국에 제출하면 예산당국이 전체 세입규모 수준에서 이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각 부처 세부사업들을 모은 것이 사실상 다음해 정부예산안의 기본 골격을 이루었다.

    이러한 예산편성을 상향식(Bottom-up) 혹은 ‘부처요구·중앙편성방식’이라고 부른다. 나름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올해 지출체계가 다음해에 그대로 반복된다는 한계를 지닌다. 재정에 ‘전략’이 개입하기 어려운 예산편성체계다.

    정부가 국정운영자로서 국정전략을 재정에 반영하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는 예산편성시스템이 필요하다. 과거처럼 수천개의 세부사업들을 모아 정부 지출체계를 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전략적으로 분야별 지출규모를 정하고 이 범위 내에서 세부사업들을 조정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전략적 예산편성을 하향식(Top-down) 혹은 ‘총액배분·자율편성방식’이라고 부른다. 복지지출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특정 사업 몇 개를 강조하는 것 보다는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복지 분야 전체 증가 총액을 먼저 배정하고 이 한도 내에서 세부 복지사업 지출을 조정하라는 것이다.

    전체 정부사업들, 16개 분야로 헤쳐 모여!

    국가재정법 제정과 함께 전략적 재정배분을 위해 새롭게 도입된 예산편성방식이 프로그램예산제도이다. (프로그램예산제도는 정부의 재정지출편성이 ‘예산’이었던 용어 관행을 따른 것으로, 실제는 예산, 기금을 모두 포괄한다).

    이것은 부처별로 구분하지 않고 정책목표가 유사한 사업(activities)들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통합하여 편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개별사업들은 부처별, 회계별(일반회계, 특별회계, 기금) 틀을 넘어 특정 ‘분야’에 속하게 된다. <표 1>에서 보듯이, 현재 중앙정부의 수천개의 부처사업들은 일반공공행정, 국방, 교육, 사회복지 등 16개 분야로 구분되어 ‘헤쳐 모인다’.

     

       
      

    예를 들어 8번 사회복지 분야는 보건복지가족부 일반회계에 속하는 재원으로 하는 기초생활보장부문, 노동부에서 관리하는 고용보험기금 노동부문, 국토해양부의 국민주택기금 주택부문사업 등 총 9개의 부문사업으로 구성된다.

     

     

       
      

    <그림 1>은 2009년 프로그램예산체계 중 8번 사회복지 분야 일부를 떼어 온 것이다. 보건복지가족부는 일반회계 기초생활 생계급여사업을 분야, 부문, 프로그램, 단위사업 순서로 예산시스템에 등록한다. 국토해양부도 국민주택기금에 속하는 분양주택지원사업을 동일한 체계를 거쳐 사회복지분야 사업으로 배치한다.

    예를 조금 더 보자. 2010년 정부예산안에 의하면, 행정안전부(중앙정부)가 공무원연금 적자 보전을 위해 배정한 예산이 약 9천억원이다. 이 지출은 부처별 예산체계로 보면 행정안전부 예산이지만 프로그램예산체계에서는 복지분야 예산이다.

    군인연금도 동일한 경우다. 내년에 약 2조원이 지출될 군인연금 급여는 국방부 예산이지만 프로그램예산체계에선 복지분야 지출이다. 정부가 내년 정부총지출 배분을 발표할 때도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지출액은 각각 행정분야, 국방분야가 아니라 복지분야 지출로 계산된다.

    이제 개별 정부사업들은 두 개의 주소를 가진다. 이전에는 최종 주소가 ‘부처’였지만 이제는 ‘분야’라는 새로운 주소를 얻게 되었다. 국민주택기금의 분양주택 지원사업은 부처 소관으로는 국토해양부이지만 정부총지출에선 복지 분야로, 기초생활 생계급여사업은 부처 소관으로 보건복지가족부, 분야로는 복지지출에 포함된다. 이렇게 해서 총 8,865개 세부사업이 부처 경계를 넘어 총 16개 분야로 재구성된다.

    내년 복지예산, 분야지출을 보아야

    내년 복지예산이 얼마인지 알고 싶으면 어떤 자료를 보아야 할까? 보건복지가족부 예산안? 물론 이 자료도 보아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예산체계의 지출 규모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8번 사회복지분야와 9번 보건분야를 합쳐 복지지출로 정의된다. 당신이 정부 디지털예산회계시스템 앞에 앉아 8번과 9번으로 시작되는 사업들을 모으면 전체 정부총지출 중 복지 지출 금액이 도출될 것이다(하지만 당신은 접근권한이 없다!).

    이렇게 복지 지출에는 보건복지가족부의 보건복지, 국토해양부의 주거복지, 여성부의 여성복지, 노동부의 고용복지 등이 통합 계산된다. 예산으로는 6개 부처 일반회계와 특별회계, 기금으로는 9개 부처 17개 기금이 속한다. 이렇게 최종 복지지출은 9개 부처 249개 사업으로 이루어진다.

    프로그램예산제가 도입된 이후 우리 주변에서 정부 지출 수치를 두고 종종 혼란이 생긴다. 과거 부처별 예산체계만 존재했을 때, 복지예산은 복지부 예산과 동일시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부처별 항목은 관리 소재지를 말해 줄 뿐이다. 실제 지출 규모를 알고 싶다면 분야별 예산을 보아야 한다.

    국회에 제출되어 있는 2010년 예산안을 보면, 내년 정부총지출 규모는 291.8조원이고, 이 중 복지 지출은 81조원이다. 부처 예산과 혼동하면 안된다. 보건복지가족부가 관리하는 내년 부처 예산은 31조원일 뿐이다. 이 금액은 보건복지가족부 공무원에게는 중요한 수치이지만, 우리가 더 기억해야 할 수치는 복지분야 81조원이다.

    프로그램예산제는 노무현 정부의 디지털예산회계시스템 도입으로 가능해졌다. 이 시스템이 구비되면서 부처 담당관이 자신이 맡은 사업에 프로그램예산제 코드번호를 매겨 등록하고, 기획재정부 총괄담당관이 코드번호에 따라 사업들을 모으면 분야별 지출총액이 도출된다. 현재 모든 사업이 중기사업계획과 함께 입력되고 있으므로 자동으로 분야별 5년 중기재정운용계획도 알아낼 수 있다.

    검증장치 없는 정부 독점 프로그램

    이전 글에서 정부의 중기재정운용계획에 대한 정부의 편성권은 존재하지만 국회 심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슷하게 프로그램예산체계도 정부에 의해 임의적으로 관리되고 있고 그 타당성도 검증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지난호 글 “진보정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중 ‘<표 1> 2009~2013년 분야별 재정투자계획안’을 잠시 봐주기 바란다. 여기서 정부총지출은 12개 분야로 정리되어 있다. 정부는 국민에게 발표하고 국회에 제출하는 예산안 자료에서 프로그램예산제의 16개 분야를 다시 12개로 간소화한다.

     

    특히 R&D는 16개 분야에 속하지 않지만, 정부가 이를 강조하기 위해 각 16개 분야에 포함되어 있는 R&D예산을 다시 합산해 제시한 것이다. 이렇게 정부의 수천개 사업들을 16개 분야로 편성하든, 다시 12개 분야로 재구성하든, 여기에 R&D 지출을 재산정하든 모두 정부 마음대로다.

    더 심각한 것은 과연 개별사업들이 자신에 걸맞는 분야 주소를 배정받았는지의 문제이다. 만약 복지라고 보기 어려운 사업임에도 8번 분야로 등록된다면, 전체 복지지출은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국민주택기금은 올해 주택구입융자금으로 1조 6천억원을 지출했다(1년거치 19년 상환). 이 금액은 모두 올해 복지분야 지출로 계산되었다. 그런데 이 돈은 순수 복지지출이 아니라 이후 돌려 받는 융자지출이다. 이 금액 전체가 복지지출로 포함되어도 괜찮은 걸까? 이것이 포함되면서 복지지출 규모가 부풀려지는 건 아닌가?

    국방지출은 정말 그만큼 줄어들었을까?

    <표 2>는 작년에 이명박 정부가 밝힌 주요 분야별 재정지출 변화이다. 1980년대에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분야는 국방이었고, 가장 작은 분야가 복지였다. 하지만 2007년 복지가 29.1%로 가장 큰 지출 분야로 등장했고, 대신 국방은 11.4%로 상당히 축소되었다. 이 자료만 보면 재정지출구조가 크게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필자는 아직 이 자료 수치들의 객관성을 의심하고 있다. 대략 다음의 이유이다.

    첫째, 국방비 지출 비중이 왜 이렇게 줄었을까? 앞에서 지적했듯이 군인연금 지출이 국방 분야에서 복지 분야로 이전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다른 분야로 이전된 과거 국방사업들도 점검돼야 한다. 1980년대 국방지출 비중이 과연 현행 프로그램예산제에 따라 재계산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이를 위해선 예산자료가 디지털화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앞으로 규명해야할 과제다.

    둘째, 복지 비중도 지나치게 높게 설정되었다. 지금까지 복지지출이 정부총지출 증가율보다 높아온 것은 사실이다. 복지제도 도입 초기에 나타나는 제도적 자연증가분이 존재하고 역대정권들이 복지지출을 다른 지출에 비해 조금 더 늘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7년 29.1%는 근거가 없는 수치이다. 정부의 2010년 예산안 자료를 보아도, ‘2007년 복지지출 비중이 25.8%이지만, 내년에 27.8%로 역대 최고수준으로 증가한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이렇게 정부 공식문서에서도 다른 수치가 등장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복지지출 규모는 고무줄같이 늘었다 줄었다 한다(복지 규모에 대해서는 다다음호 글에서 다룰 예정).

    총액배분 프로그램예산제의 장단점

    이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오자. 당신은 292조원의 내년 예산을 어떤 방식으로 편성하겠는가? 전략적으로 재정을 운용하고 싶은가?

    다행히 지금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재정인프라가 마련되어 있다. 바로 프로그램 예산제도이다. <표 3>에 비교정리되어 있듯이, 국가재정은 정권의 전략적 국정운용 수단이다. 정부가 자신의 국정운용전략을 재정분야에 반영하기 위해서는 예산편성도 하향식 총액배분 방식을 취해야 한다.

     

       
      

    또한 총액배분 프로그램예산제는 상향식 예산 편성이 지니는 부처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상향식 방식에서는 부처별로 예산안을 크게 잡을수록 좋다는 다다익선 관행이 존재했다. 어차피 상위 부처에서 삭감될 것을 예상하여 가능한 예산 요구를 늘렸고, 정보가 부족한 예산당국이 이를 실질적으로 심의하지 못할 경우 예산의 비효율적 지출을 낳을 수 있었다.

     

    이제는 총액배분방식에 따라 재정전략회의에서 분야별, 부처별 예산한도가 먼저 정해지면서 부처는 그 한도 내에서 자신의 구체적 사업을 정비해야 한다.

    하지만 이전 ‘전략적 재정배분’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총액배분 프로그램예산제가 항상 긍정적인 효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 역시 정부의 성격이 중요하다. 만약 시대적 가치를 반영하지 않고 분야별 지출 한도가 정해질 경우 그 분야 지출은 정체되어야 하는 운명을 맞는다.

    프로그램예산제가 정부에 의해 독점관리되고 있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현재 분야별 분류는 정부가 설계하는 디지털예산회계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지고, 자료 열람을 위한 시스템 접근권도 행정부 외부에는 패스워드를 가진 소수의 국회 담당관에만 허용된다. 과연 16개 분야로 구분하는 것이 적절한지, 복지분야 지출은 객관적으로 계산된 것인지, 오직 정부의 발표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디지털예산시스템, 재정전략을 남발하게 하다.

    그러면 총액배분방식이 이명박 정부 예산편성 과정에서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가? 아직까지는 총액배분방식을 통해 국가재정이 체계적으로 편성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전히 상향식 예산편성 관행이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직 총액배분 예산제도는 ‘형성기’에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할 듯싶다.

    하지만 ‘정치’를 해야 하는 정권에게 재정 전략은 무척 중요하다. 특히 이명박 정부에서 프로그램예산제도가 악용되어 국가재정 전략사업들이 남발되고 있다.

    녹색성장 5개년 전략을 마련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부처 사무관들에게 자신이 담당하는 사업 어느 곳에서든 녹색 비슷한 빛깔이 보인다면, ‘Green’ 코드를 붙이라고 지침을 내리면 된다. 그리고 다음날 예산당국이 디지털예산회계시스템에서 그린코드 사업을 모으면, 멋있는 5개년 녹색성장 로드맵이 나온다.

    4대강사업을 전략적으로 추진하고 싶은가? 부처 관료들에게 자신이 주관하는 사업 주위에 강물이 흐른다면 모두 ’4대강‘ 코드를 넣으라고 지시하면 된다. 그러면 바로 4대강사업 로드맵이 청와대 테이블에 놓이게 된다.

    4대강사업을 뽐내고 싶은가? 그러면 22.2조원 본사업에 간접사업비까지 합해 30조원이라고 말하면 된다. 비판이 거세 규모를 축소하고 싶다고? 그러면 연계사업 5.3조원을 제외하고 16.9조원이라고 주장하면 된다. 더 줄이고 싶다고? 아예 환경부, 농식품부 지출을 빼고 국토해양부 지출 15.3조원만 4대강사업이라고 우겨도 된다. 지금 정부가 하는 꼴이다. 이 모두 프로그램예산제도를 악용해 이루어지는 일이다.

    어떠한 제도든 명암을 가지기 마련이다. 제대로 감시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앞으로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도 예산체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호에 ‘2010년 예산안 쟁점 포인트’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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