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정승일 자가당착을 비판한다
[기고③] 한국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의미…"MB가 DJ보다 진보적?"
    2012년 05월 09일 09:22 오전

Print Friendly

장하준과 정승일은 6월 항쟁 25주년을 맞는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재벌과 금융자본이 승리자가 되고, 노동자와 서민, 그리고 여러 중간 집단들조차 패배자가 된 한국경제의 실상, 즉 사회경제적 양극화 축적체제의 탄생과 민주화의 역설에 다가서고자 노력한다.

그들은 주류 재벌개혁론자와 경제민주화론자의 논리, 즉 97년 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기본선에서 ‘정상적인 시장개혁’ 경로로 보면서, 이를 이명박 정부의 친재벌, 친부자 ‘신자유주의적 역주행’과 구획하고자 하는 논리에 대해 심각한 이의를 제기한다.

주류 시장개혁 논자들, 또는 주류 공정경쟁론자들은 김대중, 노무현 집권 10년의 한국경제는 여러 지향들이 뒤섞인 ‘혼합경제’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이 시기에 대해 ‘신자유주의 타령’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럼으로써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를 들며 1997년 이후 10년 시기의 인식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밀어내려고 절치부심한다. 또한 그들은 재벌개혁의 핵심 과제를 전근대적 천민성을 해체하는 (구)자유주의적 개혁안에 가둬 놓으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의 경우, 재벌개혁은 ‘1원 1표’ 원리에 입각한 ‘정상적 시장경제’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반해 장하준, 정승일에 따르면 김대중, 노무현과 이명박은 신자유주의 노선 안에서 좌파와 우파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진보적 개혁과제는 ‘1원 1표’가 아니라 ‘1인 1표’ 원리에 입각한 ‘진짜 경제민주화’를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극복하고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그들은 용기 있게 ‘정치적 진영’ 논리를 탈피해 사태의 실상에 다가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한 발을 재벌 쪽에 걸침으로써 풀리는 듯 보이던 실타래를 다시 꼬아놓는다. 양다리 걸친 그들의 발길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갈지자 행보를 한다. 나는 여기서 그 불안한 갈지자, 엇박자 걸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흥미 있는 문제를 하나 내 보겠다.

“친재벌 이명박 정부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보다 더 진보적?”

내가 앞서 쓴 글에서 말한 바, 신자유주의에 대한 장하준 정승일의 <명제 2>로 돌아가 보자. <명제 2>에서 그들은 신자유주의에 좌파와 우파의 두 가지 버전이 있다고 말했다.

그들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와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금융자본주의 노선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같은 과에 속하는 신자유주의 정부다. 그러나 이명박은 노동시장의 완전한 유연화를 밀어붙이고 독점대기업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레이건과 대처정권과 같은 우파 신자유주의 정부로 분류된다.

반면 김대중, 노무현은 노동시장에 최소한의 보호 장치를 만들고, 독점을 규제하면서 공정한 시장을 주장하기 때문에 클린턴 및 블레어 정권과 비슷한 좌파 신자유주의 정부로 분류된다.

그러나 장하준, 정승일의 이런 인식은 적절한가? 복지국가(또는 자본주의 2.0) 단계를 거친 영국의 블레어와 그렇지 못한 미국의 클린턴, 또 그렇지 못한 한국의 김대중, 노무현을 쉽게 동류로 다루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문제는 넘어가자. 장하준 정승일은 재벌의 독점적 지배력과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고 그 특권을 약화시키는 일체의 개혁 조치를 주주자본주의를 심화시키고 국제투기자본의 힘을 강화시킨다며 거부한다.

공정시장은 곧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보고 거절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재벌에 대한 규제완화 조치가 재벌을 흔들어대는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보다 오히려 더 진보적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나.

그리고 그 논법대로라면 – 다른 분야는 그만두고- 재벌에 획기적인 규제완화 조치를 취해 유례없이 재벌 프렌들리 경제, 재벌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놓은 이명박이 김대중, 노무현보다 오히려 더 진보적이라고 말해야 맞지 않나.

재벌에 대한 규제완화는, 그들의 논법대로라면, 재벌로 하여금 ‘세계화된 금융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미약하지만 적어도 말로는 경제자유화를 버리고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 흐름을 뒤쫓아 간 박근혜는 이명박보다는 더 보수적이고, 민주통합당보다는 더 진보적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정확히 말해서, 부자 감세는 보수적이지만 재벌 규제완화는 더 진보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친부자는 보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이지만, 친재벌은 진보적이고 반신자유주의적이라고 말해야 옳지 않을까? 내가 억지를 부리는 건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장하준, 정승일이 나의 이 궁금증을 풀어주면 좋겠다.

장하준의 자가 당착, 암스덴 vs 장하준

그런데 사실 나는 장하준, 정승일이 『쾌도난마』와 『선택』에서 제시한 ‘재벌을 뺀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론은 장하준, 신장섭이 공저한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창비사, 2004, 이하 『주식회사』)보다 후퇴한 책이라고 보고 있다.

분석의 면밀함에서만 후퇴한 것이 아니다. 이는 대담집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바로 지금 따지고 있는 재벌 문제의 인식에서 변화됐다고 생각된다. 『주식회사』에서 이와 관련된 중요한 구절을 아래에 인용한다.

“주식회사 한국에서 국가의 지배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발전국가에 대한 도전은 심지어 경제기적의 기간 전반에도 계속 있었다 … 하지만 가장 크고 결정적인 도전은 1970년대 후반부터 관료제 내부의 자유주의 분파와 다수 지식인 집단, 그리고 점차 강력해진 재벌간 동맹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Neo- Liberal) 세력에서 일어났다”.(p. 116).

위 인용 부분에서 장하준은 신자유주의 세력이 관료제 내부의 자유주의 분파, 다수 지식인 집단, 그리고 재벌간 동맹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재벌을 신자유주의 동맹의 구성 부분이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재벌을 떼어낸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론을 제시한 『쾌도난마』와 『선택』의 논리와는 대조된다. 나는 이전에 『주식회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서평을 쓴 바가 있다(졸고, <서평문화>, 2004 겨울, 제 56집).

특히 노동의 축을 완전히 빠트려 놓은 대목을 허점으로 지적했다. 이는 장하준, 신장섭의 한국자본주의론의 중대한 빈틈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래도 그 책은 박정희 체제 이래 신자유주의에 이르는 한국경제 궤적을 나름대로 간명하게 잘 훑은 책이라는 생각을 나는 했다. 재벌에 대한 서술 부분이 아주 빗나가진 않았다는 게 한 가지 이유였다.

그러나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나온 『쾌도난마』의 재벌 인식은 엄청 달라졌다. 『주식회사』에서 신자유주의 동맹에 들어있던 – 주도세력은 아니라 해도- 재벌이 세계화된 금융자본의 공격을 받는 수동적 대상 내지는 피해자, 나아가 반신자유주의 세력으로 뒤바뀐 것이다. 이 변화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나는 장하준, 정승일, 그리고 신장섭의 연구는 크게 볼 때 국제학계에서 개발국가론의 흐름 속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연구는 한국 경제 연구로 보자면 앨리스 암스덴(A.Amsden)-그녀는 얼마 전에 작고했다-과 논지가 상당히 비슷한 부분도 있다. 암스덴은 박정희를 ‘위대한 지도자‘(!)로 보고, 재벌을 아주 높게 평가하는 학자로서 『아시아의 다음 거인』(1989)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녀가 제시하는 논리다. 암스덴은 ‘한강의 기적’의 논리를 국가의 재벌에 대한 지원과 그것에 상응하는 성과 ‘규율’( discipline), 보다 넓게는 자본통제에서 찾았다.

나는 그녀가 일찍이 장하준, 정승일보다 훨씬 깊이 있게 자본에 대한 국가의 규율론을 독보적으로 제시했다고 본다. 바로 그 때문에 개발주의의 진화와 민주적 전환에서 이 규율의 행방을 묻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암스덴은 일찍이 자신의 생각을 개진한 바 있는 데 그 일부를 인용해 보면 아래와 같다.

“한국경제는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동시에 미국으로부터 무역 및 금융 시장 자유화의 압력을 받고 있다. 일부 시장 자유화는 불가피할지도 모르고 또 심지어는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19세기말 이래 대규모의 현대기업은 주요 공업화를 모두 지배해 오는 경향을 보였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환경하에서 지나치게 자유시장에 의존하게 되면 대기업들의 지배력만 키워주고 노사관계를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 민주국가로서의 한국은 이제 자유화 외에 또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즉 대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을 지속시키되, 공업화의 과실을 골고루 나누기 위해 정부에 대한 국민의 통제력을 더욱 강화하는 일이다(암스덴, 『아시아의 다음거인-한국의 후발공업화』, 시사영어사, 1990, p2)

암스덴의 위와 같은 논의는 국가-재벌 지배동맹이 추구한 한국 권위주의-개발주의 체제에 내장된 근본적 문제점을 보지 않고 있다.

즉 노동세력을 배제적으로 동원하고 시민사회를 억압해온 정치경제 체제에서 재벌에 대한 통제력을 지속하면서 사회경제적 민주화와 복지국가로 가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때문에 민주화 이후 오히려 자기 발로 서게 된 공룡재벌의 고삐를 잡고 민주적으로 규율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 정치경제적 동력 또는 ‘사회적 제3항’을 형성하는 게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여전히 놓치고 있다.

노동배제적 권위주의-개발주의에서 ‘노동 있는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일, 민주화 이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 갈등의 동학 속에서 새롭게 민주적이고 사회통합적인 소유권 질서를 세우는 일, 그 문맥 속에서 발본적 재벌개혁 관문을 통과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암스덴을 포함한 외국의 개발국가론자들은 이에 대해 둔감하다.

당연히 이들은 후발근대화에서 한국적 길과 스웨덴적 길이-유사점도 없지 않지만-얼마나 판이하게 다른지 불감증을 보인다. 사실 나는 그동안 이런 취지로 개발국가론 흐름이 지닌 허점에 대해 줄곧 비판해 왔다.(졸고, “강한 개발국가 복원?…장하준의 새로움과 구태의연함” ; “개발국가론 딛고 넘어서기”, <경제와 사회>, 57호,2003).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인용한 암스덴의 말은 매우 중요한 대목을 짚고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녀는 개발주의 시기뿐만 아니라 이후 전환의 경로에서도 국가의 재벌에 대한 규율의 행방에 대해 일관되게 시선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고삐 풀린 자유시장화는 재벌의 지배력만 키울 뿐 아니라 노사 관계를 악화시킨다고 본다. 그리하여 재벌에 대한 정부의 통제 그리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민주적 통제가 민주화 시대 공유하는 성장을 위한 요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장하준, 정승일은 개발주의 시기에는 국가의 재벌통제에 대해 말해놓고서는 그 이후 시기에는 그 통제 또는 규율문제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왔다갔다 한다. 그래도 『주식회사』에서는 미약한대로 이에 대해 언급을 한다. 재벌이 신자유주의 동맹 세력이라는 말까지도 한다. 그러나 『쾌도난마』와 『선택』에 오면서는 아예 재벌을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에서 삭제시켜 버린다.

한국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

모든 역사적 기획은, 혁명적 전복의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형태로든 기존의 기득권 세력과 모종의 타협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자본주의의 민주화든, 국가사회주의의 체제 전환 과정이든 그러하다. 바로 이 타협의 방식과 형태를 어떻게 가져가는지에, 우회할 수 없는 개혁의 정치경제(학)의 승패가 달려 있다.

이를 테면, 나쁜 타협인가 좋은 타협인가?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서 개발주의의 역사적 전환과 제도 이행은 경제와 사회에서 지배세력의 위치를 장악하게 된 재벌의 동의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재벌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97년 이전은 물론이지만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도, 그것이 설사 IMF 관리체제-‘신탁통치’라고도 말해진다-하에서 이루어졌다 해도, 국내 재벌 권력의 반발과 동의 없이 진행된 것은 결코 아니다. DJ정부 후기에는 특히 그랬다.

그 때문에 한국의 경로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장하준, 정승일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금융자본 주도 신자유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재벌과 금융자본이 때로 긴장 갈등하면서도 타협하며 공생하는, 그리고 바로 그 공생의 힘으로 노동자와 서민, 취약한 중산층을 양극화 함정 속으로 몰아넣는 ‘잡종 신자유주의’ 형태인 것이다.

한국에는 월가와 같은 금융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한국경제에서 제조업의 위상은 97년 이후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는 것, 그 근간은 장하준, 정승일이 말하는 ‘국적 재벌’-그 꼭짓점에 삼성이 있다-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이 IMF 관리체제에서 졸업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장하준, 정승일은 줄곧 박정희 체제가 정부의 노동통제뿐만 아니라 자본통제에도 기초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의 통제에 대항하여 자본이 자유주의란 걸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고 그래서 자본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해체되는 과정을 밟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자본에 대한 정부 통제의 해체, 재벌규율의 해체야말로 민주화 시대 국가 후퇴 및 허약한 ‘연성국가’화의 핵심 지점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재벌이 (신)자유주의의 주도세력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그리고 단지 금융자유화만이 아니라 정부의 재벌통제 실패에도,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보는 게 논리에 맞다.

재벌이 ‘바보같은 짓’을 했다는 식으로 넘어가지 말고, 논리적이면서도 한국식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로에 착근된 설명은 없는가. 한국의 대표적 진보경제학자 중의 한 사람인 유철규의 말을 들어 보자.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경제개발의 유산으로 인해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대응능력이 약화된 국가의 후퇴이고, 다른 하나는 동전의 양면이지만 그 탄생의 원죄로 인해 국가와 함께 사회적 책임을 분담해야 했던 사적 대기업에 대한 면죄부 부여이다.

이렇게 보면, 미국식 사적 소유권의 확립이란 그 자체의 순수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조세와 강제저축에 의해 육성된 사적 대기업의 출생에 대한 기억을 지운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제도적 차원에서 구체제의 해체가 시작된 80년대 후반 이래 모든 제도개편의 밑바닥에 깔렸던 문제는 바로 이 재벌의 사적 소유권의 범위와 근거에 관한 문제였다…

축적 체제의 관점에서 볼 때, 국가의 후퇴는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한다. 바로 노동을 규율해 왔던 핵심기제가 상실된다는 것이다. 구체제의 노동규율은 (권위주의적) 정치적 구권력에 의해 지탱되어 왔기 때문이다. 국가의 표면적 후퇴를 통해 지배계급의 정치적 부담을 완화하고, 역사로부터 단절된 사적 소유권을 확립하면서, 동시에 노동규율을 유지한다, 이 세 가지가 한국 신자유주의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유철규, “98-99 구조조정의 정치경제학”, 『구조조정의 정치경제학과 21세기 한국경제』, 풀빛, 2000, p.391~2 )

“IMF 경제위기 훨씬 이전부터 한국 내부에서 신자유주의를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주장했던 세력은 재벌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노동운동의 활성화와 민주화로 말미암아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대응능력이 약화된 국가의 후퇴를 자본에 대한 규제완화로 이끌어내고, 다른 하나는 산업화시기의 국가지원으로 말미암아 모호해진 사적 소유권을 확립함으로써 노동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암묵적으로 재벌에 부여되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유철규, “신자유주의”, 김수행 신정완편, 『현대 마르크스경제학의 쟁점들』, 서울대 출판부, 2002, p.233~4)

위 유철규의 말이야말로 개발주의 해체와 신자유주의 이행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와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한 진짜 ‘쾌도난마’라 할 만한 해명이 아닐까. 사회적, 역사적 책임에서 면죄되고 실질적인 사적 소유권을 확보하며, 노동시장 유연화로 새로운 억압적 노동규율을 세우는 것, 한국 신자유주의의 이 세 가지 과제 또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유철규의 지적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그리고 “한국내부에서 신자유주의를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주장했던 세력은 재벌이다”라는 지적에 시선을 집중해 보라. 한국에서 개발주의의 해체와 신자유주의 이행 문제를 보는 그의 날카로운 정론직필(正論直筆)은 한국자본주의론에서 우리 진보경제학이 도달한 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보태고 싶다. 유철규의 말을 듣노라면, 최근 재벌개혁의 한 해법으로 제기되고 있는 ‘기업집단법’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기업집단법’의 문제는 단지 법조항을 만들면 되는, 그런 문제가 결코 아니다. 법조항을 만들 줄 몰라서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는가?

독일에서 배울 것은 법조항이 아니다. 정작 배워야 할 것은 그 법을 만들 때의 역사적, 정치적 문맥이다. 기업집단이 사회적 정당성을 얻는 역사적, 정치적 조건, 대항하는 힘들 간에 타협과 합의가 이루어지는 조건과 합의방식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집단법 제정의 문제는 법의 문제가 아니라 곧 정치의 문제이다. 법치는 정치와 분리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민주화 시대에 부응하는 사회적 정당성, 사회적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새 민주적 소유권 체제의 수립이라는 문제가 걸려 있다. 당연히 그 자체 심각한 쟁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재벌개혁의 핵심 지점이기도 하다. 또 내가 재벌개혁을 단지 (구)자유주의 틀에 가두는 논의에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계속)

필자소개
이병천
강원대 교수, [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