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이 진정한 민주주의인가?"
        2009년 10월 19일 09: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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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가 없는 세상만이 진정한 민주주의?

    2008년 7월 <노동자의 힘> 기관지의 표지는 “자본가 없는 세상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 제목에 따르면,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수준이 되어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과연 민주주의가 그럴 수 있는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 우리가 꿈꿀 수 있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것은 민주주의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급진적으로 확장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 필자

    ‘체제 논쟁’에서 필자는 87년 체제가 전제하던 민주주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급진적 확장과 재정의’의 관점에 서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 담론을 국민적 담론으로 만들었던 87년 6월 항쟁, 그것으로 조성된 87년 체제의 ‘잠재적인’ 급진적 측면을 주목하는 것이고, 87년 체제 하에서 반독재 자유민주주의 세력만이 아니라 급진민주주의세력들이 존재했음을 다시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며, 우리 모두는 08년 체제 하에서 민주주의를 더욱 높은 수준으로 급진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세력이어야 함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87년 체제가 전제하였던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한단계 높은 수준으로 급진화된 민주주의를 상정하지 않으면, 이명박 정권 혹은 08년 체제에 대한 ‘민주주의적 저항’의 통로가 설정되지 않을 수 있다. 민주주의가 새롭게 ‘불온한 언어’가 되어야만, 민주주의가 08년 체제에 대해서 싸우는 대중들의 투쟁의 무기가 될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급진민주주의론의 이론적․개념적 기초에 대한 시론」 참조)

    이렇게 급진적 민주주의를 사고하고 모든 해방적 목표들을 성취해가는 대중적 무기이자 통로로 민주주의를 상정해보고자 하는 입장을 굳이 필자는 ‘민주주의적 변혁주의’이라고 표현해 보고 있다.

    자유주의 헤게모니로의 경도에 대한 우려

    지난 10월 5일 최원씨가 필자의 입장에 대해 기고한 글(이승원 교수가 다루지 않은)에 대해서 몇 가지 점에서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최원 씨는 필자의 ‘유연한 헤게모니 전략’에 대해서, 민주당 헤게모니로 종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먼저 손호철 교수와 필자의 대치 지점을 상기해 두고자 한다. 즉 보수와 중도자유주의세력만이 각축하고 있었던 국민정치 공간에서-중도자유주의세력이 저항정치에 대해 갖던 중심성이 균열된 상황에서-어떻게 진보적, 좌파적 세력이 헤게모니 각축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단지 ‘헤게모니적 정치’ 실천의 영역은 그 속성 상 자유주의의 헤게모니로 종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좌파 헤게모니로 종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 양가(兩價)적 공간이다. 필자가 볼 때, 좌파적・진보적 세력만 100% 이익을 보는 공간은 이미 그람시적 의미에서의 헤게모니적 정치의 공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정치는 헤게모니 각축 과정이고 헤게모니적 정치를 사고하는 것은 ‘개량화’의 위험이 있는 영역에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주의 세력과 진보, 좌파적 세력 간의 이중적 관계

    둘째, 최원 씨의 논의 속에서 필자로서도 고민되는 점은,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상황은 대적(對敵) 전선을 오히려 선명하게 함으로써 ‘헤게모니적 연합’ 전략보다는, ‘헤게모니적 투쟁’ 전략이 더욱 방점이 찍혀져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첫째, 헤게모니 공백 상태가 된 국민정치 공간에서 반독재 자유주의세력과 진보적 좌파적 세력이 헤게모니 각축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대결’의 측면과 ‘연합’의 측면이 공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대결의 측면에서 보면, 국민정치 공간에서 반독재 자유주의세력은 재(再)헤게모니화를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것이고 진보적 좌파적 세력은 그들의 헤게모니를 대체, 극복하려고 대결하게 된다. 반면에, 반독재 자유주의 세력과 진보적 좌파적 세력 간에는 각축적 대결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세력의 헤게모니화를 저지하는 ‘연합정치’의 과제와 공간도 존재한다.

    반독재 자유주의 세력의 단일 헤게모니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는 것은, 한국정치에 중단기적으로 ‘연합정치’의 시대가 열렸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여기서 진보적 좌파적 세력은 한편에서는 반독재 자유주의 세력과 대결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연합정치의 공간에 ‘유연한 헤게모니 전략’을 가지고 개입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는 이중적인 긴장을 갖는 과제를 슬기롭게 수행해 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치선이 선명해지므로 헤게모니 전략은 필요없다?

    다음으로, 신자유주의의 전면화로 대치선이 분명해졌으므로, 헤게모니적인 연합 전략보다는 타격 전략이 주되게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필자는, 신자유주의의 전면화로 인한 대중들의 다양한 이반이 어떠한 정치적 지향으로 귀결될지에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헤게모니적 전략은 ‘급진화’ 전략과 대립되는 것으로 사고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최원 씨도 잘 알고 있겠지만, 라클라우・무페는 80년대 신보수정권의 출현에 대하여 60・70년대의 사회민주주의적 통치에 대한 새로운 저항 형태들이 “완벽할 정도로 반-민주주의적인 담화에 접합될 수 있다는 것은 근래의 ‘신우파’의 진전에 의해 명백히 예증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선진화 담론으로 무장한 이명박 정부에 의해서, 노무현 정부로부터의 다양한 이반들이 "완벽할 정도로 반-민주주의적인 담화에 접합"된 예를 바로 이명박 정부의 출현에서 보고 있다. 필자가 ‘반신자유주의 경제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반신자유주의 정치학’을 강조하고자 했던 문제의식도 여기에 있다.

    반신자유주의적 경제투쟁만이 아니라, 반신자유주의적 정치 속에서 다양한 민주적 요구들을 어떻게 접합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08년 체제 하에서 대적 전선의 선명화가 헤게모니적 전략을 포기하는 것으로 인식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이러한 점은 심지어 베네수엘라 혁명과 같은 ‘급진화’ 혁명 속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음 글 참조. 「환호와 위기 속에서 전개되는 베네수엘라 혁명, 그 성격과 함의」, <진보평론> 39호. 2009년 봄호).

    새로운 접합을 위한 대중적 언어의 필요성

    마지막으로 최원 씨가 이야기한 ‘지배어’의 중요성이다. 대중들이 이명박 정부 하에서의 다양한 고통들의 의미를 상호연결 결합시켜 저항적 의미를 갖게 해주고 그 저항적 의미를 연결할 수 있게 해주는 매듭이자 결절점(nodal points)으로서의 ‘지배어’ 혹은 대중적 언어에 대해서 우리가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하고 더 치열한 상상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종보 씨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 대립하여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나라’라고 하는 표현을 제시하고 있고, 최원 씨도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제시하고 있다. 이 부분은 필자도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으며, 여러 사람들의 비판적 상상력이 만나야 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단지 필자는 이 지배어를 ‘공공성’이라는 개념의 주변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점도 언급해두고자 한다.

    급진민주주의와 ‘민주주의적 변혁주의’

       
      ▲ 라클라우와 무페

    지난 번 글에서 최원 씨는 필자의 입장을 라클라우․무페의 『사회변혁과 헤게모니』에 터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필자는 라클라우・무페의 논의를 재독해하고 많이 배우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한국적 문제의식이 있다는 점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이를 통해 손호철 교수와의 체제 논쟁에 임하는 필자의 변혁론적 문제의식을 드러내보이고자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필자는 라클라우․무페의 급진민주주의론의 ‘좌파적 재설정(left repositioning)’을 지향하고 있다. 이것을 포괄적으로 ’민주주의적 변혁주의‘라고 표현해보고 있는 것이다.

    최원 선생이 소개한 라클라우와 무페의 책은 통상 3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첫째는 담화(담론)이론이며 둘째는 포스트-맑스주의적 논의이고 셋째는 새로운 급진민주주의적 변혁전략이다.

    담화이론과 포스트 맑스주의에 대해서는 1990년대 초반 이병천 교수의 논의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 16~17년이 흐른 지금 다시 라클라우・무페의 입장을 수용하느니 마느냐 하는 논의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적 입장에서 그리고 한국적인 시각에서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위한 프로젝트의 여러 이론적 요소들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전유할 부분을 전유하고 재해석할 부분을 재해석하면 될 것이다.

    라클라우․무페에서 배우면서도 다른 경로로

    필자는 급진민주주의적 전략에 대한 라클라우․무페의 논의를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재해석하면서도 그들이 전거하고 있는 그람시의 논의를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급진민주주의를 정초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가 고민하고 있다.

    이 점에서 필자는 담화이론(사회의 불확정성과 우연성, 경제적 사회구성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사회구성체로서의 사회를 보는 시각이나,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중심성은 역사적이고 우연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시각 등)이나 포스트맑스주의적 내용과는 다른 경로를 탐색해보고자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산 정상에 오르는 다양한 경로와 능선이 있듯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다양한 경로를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경로로서 자본주의의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잠재적 급진성을 확장하여 자본주의와 대결하는 경로로서 민주주의적 변혁주의가 존재한다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변혁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20세기 초반의 사회민주주의와 2차 대전 이후의 유로콤의 근간이 되었던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주의’라는 테제를 연상케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20세기 초의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후반의 유로콤은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주의적 길’이라는 테제 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포기하면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내부에서의 투쟁전략을 주된 전략으로 채택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주의적 길?’

    여기서 필자는, 사민주의나 유로콤의 민주주의적 경로가 자본주의에 포획되었던 것과 다른 가능성으로서의 ‘민주주의적 변혁주의’를 상상해보고 있다. 아마 ‘유로콤 좌파’가 고민하였던 것과 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차베스의 실험 같은 데서 통찰력을 수혈받을 수도 있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다른 사고의 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 첫째는 유로콤이 채택한 ‘선진자본주의론’이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주의적 길’로 작용하지 못하고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길로 갔을까 하는 점이다.

    여기서 필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개방성(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주의적 길을 허용할 정도로)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좌파 정당의 의회 내의 자유로운 활동공간을 허용하고 좌파정당이 집권당이 되는 것을 허용할 정도의 개방성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고유한 내재적 속성’이 아니라 계급적・사회적 투쟁의 ‘효과’로서 존재한다.

    그람시적으로 이야기하면, ‘능동혁명의 위협 속에서 수동혁명’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서 있고 이를 심화시켜 볼 생각이다. 여기서 풀란차스가 이야기한대로 이중투쟁 전략, 즉 의회 내부과 의회 외부의 대중투쟁의 결합이 필요할 것이다. 의회 ‘외부’의 대중투쟁의 힘이 살아 있지 않는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대단히 제한적이며, 그 내부에 존재하는 진보정당은 자본주의에 포획된다.

    피티독재론은 ‘재해석적 전제’ 위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다음으로 민주주의적 변혁주의라는 시각에서 고민하고 있는 점은, ‘국가사회주의의 붕괴’를 급진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그 붕괴와 실패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체제내화’된 것과는 정반대로, 국가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로서 경직화되면서 자체 붕괴해갔다.

       
      ▲ 2008년 촛불시위 (사진=노동과세계)

    여기서 국가사회주의의 모든 실험들을 단순히 ‘패배’로 사장시키지 않으려면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실 국가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의 많은 개념들은 ‘괄호 안의 개념’이 되었다. 이 괄호는 일종의 ‘유리상자’와 같은 것이다. 이 개념들을 유리상자의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재해석적 과정’이 필요해진다. 그러한 재해석의 과정에서 지젝이 이야기하는 대로 ‘잃어버린 대의’를 다시 찾아낼 수 있다.

    이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예로 하여 간단히 설명해보자. 국가사회주의에서 이른바 ‘피티독재의 피티 전체주의로의 전락’으로 인하여 이미 ‘사수냐 아니냐’의 구도는 무의미하게 되었다. 문제는 새로운 재해석의 지평이다.

    피티독재론을 사수하려고 한다면, 피티독재론의 ‘합리적 핵심’을 기존의 타락의 역사를 성찰하면서 새롭게 재해석해야 한다. 그것도 현대적 언어로 말이다.

    현재의 체제 논쟁에서 부차적인 쟁점을 여기서 서술하는 것은, 한국의 진보주의 혹은 급진주의가 바로 이러한 무수한 쟁점들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수한 쟁점들을 80년대적인 ‘사수냐 아니냐’의 차원으로 암묵적으로 전치해버림으로써, 새로운 성찰적 재해석을 통해 풍부화되어야 할 많은 진보적・좌파적 쟁점들이 천착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재해석적 전제’ 위에서 피티독재론은 의미를 가질 수도 있고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최소한 국가사회주의의 붕괴 이후에 말이다. 9월 24일자 <레디앙> 기고문에서 손호철 교수 역시 알튀세를 인용하면서 피티독재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필자에게 그 인용의 의미가 명확하지는 않다. 필자는 한국에서 진보・좌파진영의 새로운 천착이 이러한 방향에서 더욱 심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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