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막하고 허튼 영화평 쓰기
        2009년 10월 18일 09: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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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의 스타디움에 말이 달린다. 경마장도 아닌데. 이 몽환적인 말의 질주는 꿈인가, 현실인가? 제 14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유일한 경쟁 부문인 뉴커런츠 상을 공동수상한 이라크 쿠르드족 출신 이란 감독 샤우캇 아민 코르키 감독의 <킥 오프>는 살아야 할 곳에 살지 못하고,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 가슴 저린 작품이다.

    한쪽 다리 없는 소년 축구선수

    넓은 스타디움은 경기를 하기 위한 그라운드와 경기를 지켜보기 위한 관람석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이라크 북부도시 키르쿠크에 있는 스타디움도 한때는 그라운드를 내달리는 선수들과 경기를 즐기는 관람객들의 환호로 들썩이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 

    그러나 영화의 첫 장면에서 불쑥 나타난 말은 이곳이 이미 스타디움이면서 스타디움이 아닌 다른 공간이 되어있는 기묘한 상황을 보여준다.

    한쪽 알이 빠진 선글라스를 쓰고 양복을 갖춰 입은 사내는 관람석에 염소를 끌고 다니고, 골포스트에는 가축들이 매어 있고, 얼핏 황량한 듯 보이는 스타디움 여기저기에는 사람들이 쓰레기로 공간을 나누어 머물고 있다.

    그 생뚱맞은 공간에 마침내 축구복을 입은 사람이 등장한다. 등에 지단의 이름이 새겨진 축구복을 입은 소년이 등장해서 비로소 킥오프가 시작되고, 스타디움이 제격에 맞는 공간이 되리라 기대를 걸기도 전에 땅에 발은 내딛는 소년에게 한쪽 다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타디움 안의 삶

    아마도 축구를 좋아하고, 축구선수가 되기를 동경했을 그 소년은 앞으로 마음껏 달리지도, 공을 차지도 못할 것이다. 소년은 방금 다리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축구를 하러 스타디움에 온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기 위해.

    둘러보면 그곳에서 사는 것은 소년의 가족만이 아니다. 스타디움은 넓고, 넓은 만큼 여러 사람들을 품을 수 있다. 그래서 집을 잃고 쫓겨난 난민들의 거처가 되어있는 것이다.

    스타디움을 원래 목적에 맞게 경기장으로 써야겠다며 걸핏하면 나타나 윽박지르는 관료가 아무리 험악해도, 갈 곳 없는 난민들은 날마다 어디선가 테러 폭발 사고가 잃어나는 스타디움 바깥 어디로도 떠날 수 없다. 그 안에서 그들은 작은 학교도 꾸리고, 기도도 하고, 사랑도 하고, 싸움도 하고, 화해도 한다.

       
      ▲영화의 한 장면.  

    난민의 삶은 팍팍하다. 그 팍팍한 삶에서 서로 어울려 축구 시합을 하고, 때때로 중계되는 축구 경기를 보는 정도가 그들이 누리는 즐거움이다.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지뢰밭에 떨어진 공을 찾겠다고 나섰다가 다리를 잃은 동생이 못내 안타까운 형 아수는 손바느질한 천으로 스크린을 만들어 스타디움에 사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축구 경기 중계를 보게 하지만, 동생에게는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상실감이 있다.

    동생을 위해, 그리고 여러 난민들을 위해 아수는 아랍, 쿠르드, 앗시리아, 터키 출신 아이들의 축구 경기를 기획한다. 방송국을 찾아가고, 관청에 편지를 보내고, 다른 민족을 초대하면서 아수는 꿈을 꾼다. 그 소박한 경기를 통해 스타디움이 스타디움으로 거듭나는 광경을.

    아수의 꿈은 모두의 꿈이 되고, 마침내 경기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시합하는 모습을 통해 여러 민족들이 화합하기를 기대했던 아수의 바램은 그저 바램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벌어질 테러가 두려워 관람석은 여전히 휑하게 빈 채, 염소들만 거닐 뿐이다.

    현실과 꿈에 대한 영화

    막상 시합에 나선 선수들은 서로의 민족 출신 심판에 대한 불신으로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다툰다. 시합을 취재하러 온 외국인 촬영기사에게 심판을 맡기고서야 겨우 경기가 시작된다. 마침내 킥 오프!

    휘슬이 울리고 아이들이 공을 따라 달리지만, 그토록 꿈꿔오던 이 시합이 제대로 치러지는 것은 아이들이 공을 좇아 달리는 경기장을 한 마리 말이 함께 누비며 달리는 것보다 더한 기적이 필요하다. 그 기적을 바라는 감독의 바램은 거의 흑백의 화면에 가끔씩 배어나는 색의 찬연함으로 나타나지만 단 한순간도 그 색은 화면을 압도하지 않는다. 그런 총천역색의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킥 오프>는 현실에 대한 영화이며, 꿈에 대한 영화다. 월드 프리미어, 그러니까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상영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 작품이 상을 받게 되기를 바랐다. 굳이 수상 여부로 작품에 대해 평가를 매기는 것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이 영화가 부러 영화제를 찾아가 300편도 넘는 상영 목록 가운데 이 작품을 선택해서 보는 소수의 관객들 말고도 더 많은 관객들이 보게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아수가 남루한 스타디움에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모처럼 경기를 보며 함께 응원하고 환호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던 것처럼 샤우캇 아민 코르키 감독과 <킥 오프>를 함께 만든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전쟁과 테러로 얼룩진 현실의 고통을 넘어서서 함께 나누고픈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 희망은 아마도 이 영화가 유명한 영화제에서 번듯한 상을 타고,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게 되더라도 쉬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부산영화제가 거대 백화점을 거점으로 한 멀티플렉스 체인과 손잡고 거둔 상업적 상영 방식을 성공이라고 자화자찬하는 것처럼, 그리고 많은 미디어들이 흥행이 확실한 영화에 출연한 스타들의 행보에 집중하면서 보도 자료나 별도의 파티 따위 홍보행사를 마련하지 못한 영화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 것처럼 한국의 영화산업은 상업적이 아닌 꿈과 희망을 나누는 데는 인색하기 때문이다.

    한류와 다른 꿈을 배급하는 나라들

    난민 출신의 감독이 정치적 탄압을 받으며 열악한 환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 때 힘을 보태는 데서부터 영화의 꿈은 함께 꾸는 것이다. 물론 이런 영화를 골라 영화제에 초대해서 세계 최초의 상영기회를 마련한 영화제측도 대견하지만 <킥 오프> 엔딩 크레디트에 제작협찬으로 오르는 프랑스나 일본 유명 방송사의 로고는 참 부럽고 두렵다.

    한국 영화산업이 한류라는 이름으로 스타를 중심으로 한 이미지를 파는데 골몰하는 동안, 그들은 다른 꿈, 다른 희망을 함께 만들고 배급하는 데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난민 청년 아수가 스타디움 한가운데 스크린을 내걸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축구 중계를 함께 보도록 만든 것보다 제대로 된 극장 스크린에서 <킥 오프> 같은 영화를 볼 기회를 갖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한국 영화계가 풀어야할 숙제다.

    영화제에서 본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혼자 누린 호사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받은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이지만 다른 사람이 볼 기회조차 없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 얼마나 막막하고 허튼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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