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
    2009년 10월 16일 11: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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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 조각 <죽어가는 병사> BC 490~480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과 철학적 관심의 변화

영원할 것 같았던 그리스의 힘은 알렉산더를 정점으로 하여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전 방면에 걸쳐서 주변 지역을 압도하면서 황금시대를 구가하던 그리스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과 함께 노화의 길로 접어든다.

<죽어가는 병사>는 주변 지역에 대한 그리스의 영향력이 막강하던 황금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앞으로 닥쳐올 그리스의 몰락을 예고하는 듯하다. 한 병사가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 중장비 보병을 상징하는 원 모양의 커다란 방패에 의지한 채 일어서려고 하지만 이미 바짝 다가온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듯하다. 눈은 이미 체념한 듯 바닥을 향하고 있다. 바닥을 짚고 있는 한 손에 원래 칼을 쥐고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몸을 지탱하기도 힘든 모습이다. 언제나 승리만이 있었을 것 같은 이 병사의 운명처럼 그리스도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과 함께 그리스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리스의 이상도 전제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알렉산더 자신이 이미 전제 군주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집트에서 신의 아들로, 그리스에서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알렉산더가 죽은 이후에는 후계자들에 의해 엄격한 전제정치가 더욱더 지배적인 정부형태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스 본토의 일부 도시국가에 여전히 민주정이 남아 있었으나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제정치가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리스의 모든 요소가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동방의 여러 요소와 혼합되기는 했으나 헬레니즘(Hellenism) 문명의 주요 요소는 분명 그리스적인 것이었다. 또한 일정 기간 활발한 경제 활동이 이어지기도 했다. 알렉산더의 정복으로 형성된, 인더스 강에서 나일 강에 이르는 광대한 교역권은 경제적인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페르시아가 갖고 있던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쏟아져 나오면서 물가가 상승하고 그만큼 투기를 포함한 활발한 상행위가 뒤를 이었다. 또한 정부는 세금 증대를 위해 상공업을 장려하기도 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새로운 상황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철학과 문화를 만들어내었다. 과거에는 개별 도시국가의 삶에 기초한 철학이 중심이었으나 알렉산더가 정복을 통해 확립한 대제국 아래에서 도시국가 중심의 정치철학이나 도덕철학은 점차 의미를 잃기 시작했다.

이미 세계국가적인 성격으로 변화된 상황에서 국가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삶이 철학자들에게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를 찾아내고 하였고, 또한 새로운 도시국가의 이념을 확립하고 실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알렉산더에 의해 도시국가가 사실상 붕괴된 후 일종의 철학적인 도피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플라톤의 <국가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같이 어떻게 하면 좋은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해당하는, 세계에 대한 고민보다는 개인의 행복이나 구원의 문제를 천착하게 된다.

전제정치가 심화되고, 투기 행위가 횡행하고, 빈부격차는 심화되어 시민의 몰락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이 괴로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부도덕한 세상에서 어떻게 내적인 덕을 유지할 수 있을까와 같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문제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이렇게 개인적인 구원이나 주관적인 측면으로 경도된 철학은 나중에 내세주의적인 신비화를 통해 개인의 구원을 추구하는 기독교적인 요소가 결합할 수 있는 좋은 토양을 이미 스스로 만들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스토아학파(Stoicism)와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ism)는 헬레니즘 시대의 경향을 대표하는 철학이었다. 두 철학은 기원전 300년경에 등장했는데, 스토아학파는 무욕 상태의 자족생활(自足生活)을 통한 행복의 실현에 초점을 두었고, 에피쿠로스학파는 고통이 없는 쾌락의 상태를 통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현상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철학은 사회의 복리가 아닌 개인의 선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두 경향은 모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거대한 철학체계나 정치철학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인간의 내면으로 철학적인 관심을 전환시켰던 소크라테스로 다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두 철학은 어떠한 영적인 실체도 부정하고 물질주의적인 경향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었다.

또 다른 철학적 경향으로는 회의주의학파를 들 수 있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가 이성에 의지해 개인이 행복에 이르는 길을 모색했다면, 이들은 이성을 통한 진리의 획득 가능성을 부정했다. 또한 신비주의적인 종교적 경향들도 이 시기에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를 포함하여 이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고통과 악으로부터 개인이 해방될 수 있는가를 찾아내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은 예술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철학적인 관심은 서로 모순된 것 같은 두 방향으로 예술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먼저 전제정치와 상공업의 활성화는 기존 그리스 예술이 추구한 균형과 절제를 약화시키고 무절제와 사치 풍조를 만연케 하였다. 소박하고 장중한 도리아식 신전과 이오니아식 신전은 그리스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들이었다.

하지만 헬레니즘 시대에 접어들어 전제주의와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그리스인이 아꼈던 소박함과 중용의 가치는 사리지고 호화로운 궁전과 저택, 사치스러운 기념물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 <죽어가는 갈리아인> BC 220

다른 한편으로 고통에서 벗어난 개인의 삶과 행복을 추구한 철학적인 경향은 그리스 예술의 특징이었던 사실주의적인 요소를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간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의 증대는 해부학적으로 더욱 정교한 사실주의적인 조각으로 이어진다. 또한 표정과 동작에 있어서도 양식화된 틀을 벗어나서 과장된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함을 느끼도록 해준다.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조각인 <죽어가는 갈리아인>은 사실적, 감성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걸작이다. 그리스 황금시대에 제작된 <죽어가는 병사>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잘 확인할 수 있다.

한 사내가 빈사 상태에 빠져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비슷하다. 하지만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큰 차이가 나타난다. 먼저 소재가 그리스 신화나 전쟁터의 병사가 아닌 평범한 한 개인이다. 과거에는 건축이나 조각이 종교적인 목적이나 국가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상공업의 발달은 왕이나 장군뿐만 아니라 돈 많은 상인까지도 자신의 저택을 꾸밀 조각들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신화의 내용이나 군인의 모습이 아니고도 다양한 테마와 소재가 얼마든지 예술의 대상으로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예술이 구매자의 다양한 취향을 살릴 수 있는 상품으로 변했던 것이다.

종교적, 국가적 목적에서 벗어난 예술은 현실로부터 유리되었던 이전의 조각 대신 인간적인 감정 표현을 강조하는 경향을 강화시켰다. 사실적인 감정 표현과 자연스러운 인체의 표현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자리를 잡는다.

<죽어가는 갈리아인>을 보면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표정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눈은 이미 희망을 상실한 것처럼 힘을 잃었고, 반쯤 벌린 입은 마지막 단말마만 남겨놓은 듯하다. 미간과 뺨에 깊게 패인 주름은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죽어가는 병사>의 경우는 얼굴 표정이 다분히 양식화되어 있어서 전체의 상황이 아니라 표정만 보면 죽어가는 병사의 모습인지 짐작할 수 없었던 것과 비교할 때 차이가 현격하다. 또한 발을 보면 뼈와 힘줄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이어서 풍부한 해부학적 지식이 전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스토아학파 – 절제와 부동심을 통한 개인의 행복 실현

스토아학파는 BC 3세기부터 로마 제정 말기에 이르는 고대 후기의 철학을 대표하는 한 경향이다. 키프로스의 제논(Zenon)이 창설했는데, 그가 아테네의 광장에 있던 공회당 기둥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름도 기둥을 뜻하는 스토아학파로 불리게 되었다. 그 제자인 크리시포스(Chrysippos), 노예 출신의 철학자였던 에픽테토스(Epiktetos), 로마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Seneca),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가 이 학파의 주요 인물들이다.

이들은 도시국가 중심의 정치적인 삶을 강조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개인의 행복과 세계시민적 삶을 중시했다. 거대한 형이상학적 철학체계와 이상주의적인 요소는 약화되고 현실에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개인의 지혜와 윤리적인 삶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에게 철학이란 금욕과 절제를 통해 그 누구에게도 개인의 행복을 빼앗기지 않고 행복을 얻는 힘을 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자연과 일치된 삶을 추구했다. 그리고 인생의 목표인 행복을 위해서는 이성의 길을 따라야 하는데, 특히 부동심의 경지를 강조했다.

   
  ▲ 그리스 조각 <그리시포스> BC 300

스토아학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크리시포스의 조각상은 이들이 갖고 있던 삶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한 철학자가 의자 앉아 사색에 잠겨 있다. 먼저 그가 입고 있는 망토를 보면 아무런 장식이나 꾸밈이 없이 소박하다. 그들이 설파한 절제와 내핍 생활과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다.

얼굴과 손의 묘사를 보면 헬레니즘 예술의 특징인 섬세한 감정 묘사가 느껴진다. 그의 표정을 보면 기쁨, 두려움, 걱정과 같은 인간의 정념에서 벗어난 듯하다. 스토아철학이 강조한, 욕망이나 격정의 감정에서 벗어난 부동심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은 크게 자연학과 논리학, 윤리학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고, 그 근본은 자연학이지만, 목적은 윤리학의 실현이었다. 자연학, 논리학, 윤리학으로 철학을 구분한 것은 형이상학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형이상학적인 물음, 추상적이고 계산적인 사고를 비판하고 삶의 깨달음과 지혜를 중요하게 여겼다.

스토아학파의 자연학은 물질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불(火)의 철학, 즉 변화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이들이 보기에 세계의 모든 것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변화를 일으키는 모든 운동과 작용도 물질적 성질을 갖는 것이었다. 존재의 근원적 근거를 탐구할 때 존재 자체를 넘어서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세계의 근거는 세계 자체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우주와 자연에 어떠한 목적도 부여하지 않는 순수하고 철저한 유물론자였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우주와 자연을 지배하는 통일적인 원리가 있다고 보았고 이를 로고스(Logos)라 생각했다. 이 우주는 로고스, 즉 세계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자연의 법칙이 적용된다. 신의 섭리란 자연의 법칙의 다른 이름이라는 점에서 범신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자연학은 단지 자연의 원리를 파악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산다"는 계율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스토아학파의 자연주의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핵심이었던 정치적인 삶에서 이탈해서 개인의 삶으로 나아가는 논리적인 가교 역할을 했다.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은 이성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성은 철저히 인간의 주체적이고 내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었던 반면에 스토아학파에게 이성은 물질적인 자연의 원리와 상당히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앞의 자연학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이성이란 자연의 원리인 로고스의 분신이라고 보았다.

또한 플라톤은 지각되는 대상을 가상의 것으로 보았고, 진리는 이와 분리되어 별도로 존재하는 이데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진리는 지각되는 대상과 지각하는 주체 사이의 역동적인 연관성의 표현인 표상 자체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즉 진리의 기준이 이성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안에 들어오는 표상들인 것이다.

플라톤은 진정한 인식은 감각을 넘어서야 한다고 했지만, 스토아학파는 인식은 어디까지나 감각적인 표상에서 유래하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감각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식을 위해 의존해야 할 중요한 기반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표상들은 자명하고 명증한 것이라는 점에서 플라톤은 물론이고 아리스토텔레스와도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진리에 속하는 형상은 감각적인 대상, 즉 질료에 바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형상이 일차적이고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질료에 앞서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스토아학파는 우리의 인식 대상이 마치 도장처럼 우리의 영혼에 찍힌다고 보았다. 또한 이들은 인간은 누구나 이성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의 원리를 파악하고 이에 맞게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누구나 이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본 점에서 극히 소수만이 이성적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던 플라톤과는 다른 견해를 가졌다.

스토아학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윤리학이었다.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은 유물론적 사고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나타난다. 윤리학은 자연학에 근본을 두고 덕을 유지하며 사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자연에 일치하도록 살라, 자연의 법칙에 따르라"는 것이 바로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적 정언명령이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합목적적으로 질서 지워져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적인 충동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를 보존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고 이를 욕망과 욕구를 통해 채우려한다.

하지만 인간이 충동만을 따른다면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할 뿐이다. 오히려 충동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인간을 혼란시키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관한 우리들의 생각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죽음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죽음에 관한 우리들의 표상이 무서운 것이다."

이 세계의 괴로움이나 악이 자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나타나는 선입관이나 공상에서 유래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자연이란 자연적인 충동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갖추고 있고 이성을 통해 욕망과 충동을 억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과 조화롭게 산다는 것은 인간이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고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이성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자연의 원리는 오직 이성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는 인간들로 하여금 죽음의 교훈을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깨달으라고 한다. 가을에 열매가 떨어지듯이 인간은 초연한 상태에서 죽음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친다. 마치 자연과 그 질서가 우리를 있게 하고 살게 한 고향인 것과도 같이. 그런 정신이 바로 스토아의 윤리적 결론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성을 떠난 파토스(pahtos), 즉 정념은 자연의 원리를 벗어난 것이고 헛된 노력으로 영혼을 소진시킨다고 보았다. 정념은 특징상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희망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물질만이 존재하며 물질은 과거와 미래가 아닌 그 자체로서 정의되고 작용되는 존재인 것이다. 우주는 어떤 변화에도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 필연성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일어나야 할 것이고, 일어나야 할 모든 것은 일어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과거와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와 미래는 자연의 원리에 의해 움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바꾸기 위한 정치적인 삶은 의미가 없다. 자연의 원리의 일치하는 삶만이 인간에게 허용된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자유 의지도 이 원리와 일치할 때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만큼 이성을 강조했고 이성을 쫓아서 생활할 때 행복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스토아학파는 욕구와 유혹을 경계한다. 이들이 보기에 원래 인류는 자연의 법칙인 인간애를 통해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사유재산 제도와 실정법에 기초한 국가가 등장하면서 이기심, 소유욕, 지배욕과 같은 욕구들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국가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하에서 자신이 선함을 확증하고 악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욕구나 유혹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극기와 금욕, 도덕적 생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성적인 극기와 금욕에 의하여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는 부동심의 상태, 즉 아파테이아(Apatheia)를 통해 외부의 어려움이나 고통에 동요되지 않는 초연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인간의 최고선이며 덕의 근본이라고 생각했다.

스토아학파의 윤리학과 금욕주의 사상은 견유학파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견유학파의 한 사람인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자족(自足)의 이상”을 계승하여 재산은 물론이고 문화와 학문, 종교, 민족적 단결, 습관과 예의까지 경멸했다.

그는 정부, 사유재산, 노예제도, 결혼, 종교를 부정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쾌락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미치광이가 되겠다"면서 사치와 감각적인 쾌락을 비판하였다. 그는 인위적인 유혹과 욕구를 벗어나서 아무 걱정 없이 사는 동물, 즉 개처럼 살고자 했기에 그의 학파는 견유학파(犬儒學派)로 불리게 되었다. 반대로 그는 극기, 노고(勞苦) 및 불굴의 덕으로 나아가는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고자 했다. 그의 후계자인 디오게네스는 구걸을 해서 생계를 유지했다.

   
  ▲ <시장의 노파> BC 200년경

스토아학파가 중시한 "참아라! 그리고 버려라!"라는 지침은 다분히 견유학파의 철학과 삶의 태도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가난과 고통은 천시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었고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충동적 욕구에서 해방된 진정한 도덕을 위해서는 금욕과 절제가 필수적이었다.

이들의 삶의 태도는 헬레니즘 시기의 예술에도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과거의 그리스 조각은 영웅이나 신화 속의 인물을 대상으로만 이루어졌다. 또한 그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이상주의적인 전형을 창출하고 조화와 절제에 기초한 균형미를 추구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의 찌든 모습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시장의 노파>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에 해당한다. 한 노파가 시장에서 산 물건을 바구니에 들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허리는 구부정하고 흘러내린 옷 속으로 슬쩍 비치는 젖가슴은 초라해 보인다. 그리스 황금시대 조각에서 보이는 풍만한 여체나 계산된 균형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노파의 얼굴을 보면 세월의 풍파를 겪어 주름으로 가득하고 이가 빠져 안으로 오그라든 입술이 선명하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 인생의 초라한 면을 묘사하고, 인간의 고통에 대한 동정을 표현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은 스토아철학의 영향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단순히 금욕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게으름에 대해서도 경멸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어서 근면한 일을 강조했다. 스토아학파가 보기에 철학의 과제는 말이나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행위에 있었다.

세네카의 서간집에 나오는, "정상적으로, 규칙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짓을 할 시간이 없다. 일을 하는 것은 게으름의 악덕을 내버리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라는 언급은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는 말되, 근면하게 일을 하는 것이 도덕적인 삶의 태도와 일치하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이 이성에 의하여 의식적으로 유지될 때 삶의 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스토아학파가 누구나 이성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는 그리스인 우월주의를 넘어서는 것이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엄격한 신분 구분에 대해서도 일정하게는 진전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모두 보편적 이성이라는 것에 지닐 수 있는 존재라는 규정은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이 서로 평등하며,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에픽테토스는 "우리들은 모두 형제들이며, 꼭 같은 방법으로 신을 아버지로 삼고 있다"고 한다.

모든 인간을 존중받아야 할 이성적 존재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보편적 인간애와 철학적인 평등사상은 노예나 다른 민족, 그리고 여자와 어린이에게까지 평등하게 집행되는 법률을 강조한 로마의 만민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자연의 원리에 일치하는 삶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근대 자연법사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정치적인 입장이나 문화적인 개별성은 비본질적인 것이고 오직 자연의 원리, 인간들 사이에 자연적 공동체, 즉 평등과 자연권이 기초하는 공동체가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학파 – 정신적인 쾌락과 평정심을 통한 개인의 행복 실현

에피쿠로스학파는 에피쿠로스가 죽은 뒤 약 600년간 뚜렷한 수정 없이 이어졌다. 에피쿠로스가 제자들을 정원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이 학파를 정원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토아학파와 마찬가지로 단편적인 글들에 의해서 그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제자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저작인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에 그의 원자론과 쾌락설이 소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주로 자연학과 윤리학에 대한 이들의 생각을 접할 수 있다.

   
  ▲ 그리스 조각 <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가 그러하듯이 에피쿠로스학파의 윤리학도 기본적으로는 자연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의 자연학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근거로 하여 이를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는 세상 만물이 동질적인 물질적 특성만을 지닌 매우 작은 입자, 즉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원자의 결합물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로 실재하는 것은 오직 나눌 수 없는 무수한 원자와 공허한 무한 공간뿐이고 세계의 모든 것은 원자의 운동현상일 뿐이다. 원자는 실체이고 공간은 원자가 운동하는 장소이다. 원자의 운동은 정해진 방향이 없고, 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원자 상호간의 충돌에 의해 이 세계가 생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원자의 운동에 정해진 방향이 없다는 것은 이 세계가 우연의 산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어떤 목적도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사고를 부정한다. 그에 의하면 목적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허구적인 환상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에 의하면 인간도 원자로 구성된 결합물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도 원자의 작용에 불과하다. 인식이란 것은 원자에 기초한 감각적 지각에 지나지 않고, 물체가 방사(放射)하는 원자와 감각기관과의 접촉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죽으면 원자들의 구성체인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개별적인 원자들로 분해됨으로써 소멸한다. 인간의 사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주장한 영혼불멸설은 그의 원자론에서 설자리를 잃는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윤리학으로 이어지는 접점이 만들어진다. 인간이 원자이고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라면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걱정은 불필요한 것이 된다. 신도 인간과 동일하게 원자에 불과한 것이라면 두려워할 일도 없다.

그리하여 그의 원자론은 인류에게서 죽음과 신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죽음 이후에 대해 걱정할 일이 없다는 것은 인간이 오직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만 고민하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불안과 공포의 원천인 영혼이나 신에 대한 신비적, 종교적 사고를 배제함으로써 살아있는 동안 즐겁게 사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된다.

이로부터 고통의 부재로서의 쾌락을 추구하는 윤리학이 성립된다. 이제 인간에게 인생의 목적은 살아있는 동안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 에피쿠로스학파에 따르면 쾌락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이 불행한 것은 고통 때문이기 때문에 고통을 제거함으로써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에 의하면 고통은 욕망에서 발생한다. 특히 육체적 욕망은 무한한데,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고통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적 쾌락, 육체적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고통도 커진다. 에피쿠로스가 강조하는 쾌락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 그리스 조각 <술 취한 노파> BC 200년경

후대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에피쿠로스학파를 쾌락주의를 표방했다는 이유로 “술 취한 돼지들”에 비유하면서 비난을 퍼부었는데, 이는 지독한 오해이자 악의적인 왜곡이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오히려 사치와 향락 등 과거 어느 때보다도 육체적 쾌락에 몰두하고 있던 헬레니즘 시대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술 취한 노파>는 당시 사회 분위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조각이다. 한 노파가 커다란 술 항아리를 보물단지처럼 끌어안고 술을 마시고 있다. 목이나 손등에서 나타나는 뼈와 근육, 핏줄의 묘사를 보면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헬레니즘 조각의 특징인 해부학적인 사실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개를 들고 무언가 큰 소리로 주절거리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인데, 이미 상당히 마셔서 거나하게 취한 듯하다. 투기적인 상업의 확대 속에서 흥청망청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고통을 술에 의지해서 잊고자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모든 현상에 대해 에피쿠로스학파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경계했으며 명예욕·금전욕·음욕(淫慾)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또한 고통을 육체적인 쾌락을 통해 해결하고자 할 때 오히려 더 큰 고통에 빠진다고 보았다.

그들의 생활 자체는 매우 검소하였으며, 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빵과 물과 야채 등만을 먹었다고 한다. 기독교 신학자들이 에피쿠로스학파에 대해 악의적인 왜곡에 열을 냈던 것은 아마도 이들 철학자들이 원자론에 기초하여 사후세계를 철저하게 부정한 것에 대한 불만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추구한 쾌락은 정신적인 것이었다. 육체적 쾌락이 고통으로 귀결되는 반면에 정신적인 쾌락은 고통으로 귀결되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정신적 쾌락이 고통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정신적 욕구도 고통을 만들어낼 수 있다.

지적 욕구의 충족이 여기에 해당한다. 고통은 충족되지 않는 욕구로부터 발생하는데, 지적 욕구도 욕구의 일종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또한 헛된 미신에 이끌려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그릇된 정신적 욕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정신적 쾌락은 어떠한 욕망도 없는 정신의 구현을 의미한다.

고통의 최소화는 욕망의 최소화에 의해 달성되기 때문에 욕망을 줄일수록 인간은 행복해 진다는 것이다. 욕망을 최소화한 상태를 에피쿠로스학파는 아타락시아(ataraxia), 즉 번뇌가 없는 마음의 평정 상태라고 부른다. 마음의 평정은 이성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진정한 행복으로 보았다. 감각적인 쾌락을 물리치고 간소한 생활 속에서 영혼의 평화를 찾을 때 행복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삶이 곧 윤리적인 삶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피쿠로스학파가 강조한 아타락시아는 이성적인 극기에 의해 외부의 어려움이나 고통에 동요되지 않는 초연한 경지에 도달할 것을 강조한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Apatheia)와 상당히 유사한 문제의식에 기초해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에피쿠로스학파는 정치적인 삶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삶의 행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도 스토아학파와 만나는 지점과 차이가 나타난다. 두 철학 모두 개인의 행복을 중심으로 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토아학파가 도덕의 사회성을 일정하게 강조한 반면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주의는 철저히 개인주의적이어서 보편적 법칙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점은 차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불필요한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공생활의 잡다한 것들을 피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에 의존하는 것은 고통을 증가시킬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에피쿠로스 자신이 “숨어서 살지어다”라는 모토를 내결기도 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갖고 있는 개인주의적인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회의주의학파 – 판단 유보를 통한 개인의 행복 실현

에피쿠로스학파보다 더욱 심하게 개인으로의 도피 성향을 보인 것은 회의주의학파였다. 헬레니즘 시기의 회의주의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은 기원전 200년경에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카르네아데스(Karneades)이다.

   
  ▲ <카르네아데스>

이들은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행복을 추구했다. 또한 마음의 평정을 통해 현실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 점에서 에피쿠로스학파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와는 달리 행복에 이르는 길이 진리에 대한 이성적 인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뿌리는 소피스트와 맞닿는다. 모든 지식은 감각적 인식으로부터 나오며 따라서 지식은 제한적, 상대적이라고 한 소피스트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이 어떤 사물에 대해 인식을 할 때 본질에 해당하는 것을 알 수 없고 오직 이러이러하게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스토아학파가 강조한 로고스는 인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판단도 내릴 수 없다는 점에서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가 시도한 윤리학적 결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판단 유보를 요구한다.

객관적인 인식은 물론이고 개인의 올바른 삶의 문제에 대해서도 판단을 유보할 때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마음의 평정은 판단을 유보하고 진리 탐구나 선과 악의 문제에 연연하지 않음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외부세계와 일체 접촉을 하지 않는 삶, 정치, 사회문제로부터 더 철저하게 벗어난 삶을 추구했다.

신플라톤학파 – 헬레니즘에서 중세로 가는 가교

신플라톤학파(Neo-Platonism)는 플로티노스(Plotinos)를 정점으로 하는 그리스 최후의 철학 유파이다. 플라톤으로의 복귀를 주장한 이들의 철학은 종교적, 사변적, 신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데아론을 비롯한 플라톤의 중요한 사상을 토대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 동방에서 전래된 종교사상을 결합시키고자 하였다.

신플라톤학파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근원적 일자(一者)’ 이론이다. 플로티노스는 최고의 것은 존재를 초월하는 일자(一者)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다양한 세계는 이 일자로부터 유출(流出)을 통해 단계적으로 만들어진다. 이 단계는 완전한 것에 해당하는 근본 원리에서 불완전한 것에 해당하는 삶의 현실로 내려오는 길이기도 하다.

   
  ▲ <플로티노스>

근원적 일자에서 첫 번째로 정신, 즉 누스(nous)가 유출된다. 누스는 사유와 존재라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이 둘은 통일적으로 모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사유와 동일한 것으로 정의된다. 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계와 마찬가지로 단지 원리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면서 현실을 움직이는 힘이기도 하다.

근원적 일자의 두 번째 유출은 영혼이다. 그리고 이에 이어서 감각계가 뒤따라 유출된다. 영혼이 자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영혼의 가장 완전한 산출은 우주이다. 천체의 운동은 어떤 변화도 없이 일정하며 영속적이다. 영혼의 자연으로의 유출은 동물, 식물과 같은 생물로까지 개별화된다. 근원적인 하나로부터 이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성이 산출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는 감각적인 삶의 예속을 넘어서 사유로, 더 나아가서는 사유까지도 넘어서 상승한다면 인간은 근원적인 일자로의 귀환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물론이고 신비주의적인 요소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요소가 혼합되어 나타난다.

최종적으로는 이성적인 사유를 넘어서 접근할 때 근원적 일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섞여 있다. 이성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기도나 주술과 같은 신비적인 영역이 개입할 자리를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근원적 일자로 향하는 과정에서 물질이나 감각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도 닿아있다. 그는 감각 세계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물질은 유출의 가장 낮은 단계로, 물질은 그것에 영혼을 부여하는 형상에 의해서만 현실화된다. 따라서 영혼은 항상 물질 속에 있으며 물질로부터 엿보이거나 지각된다. 근원적 일자가 감각적인 물질에 방사하는 것으로서 영혼이 나타날 때 이것이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작품을 감각적으로 파악할 때 관찰자는 조화로운 다양한 모습을 체험함으로써 근원적 일자와 하나가 될 수 있다. 형상과 질료의 결합, 형상의 일차성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성적인 사유를 넘어서 접근할 때 근원적 일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그리스철학이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이라는 기독교적인 요소와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물론 그가 곧바로 기도를 얘기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영혼을 육체와 감성으로부터 정화하여 이성적으로 만들고 그 위에 사유가 없어지는 엑스터시스(ekstasis), 즉 의식을 넘어서는 망아(忘我)의 경지에서 신과 직접 교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신은 존재를 초월하고 사고를 초월한 근원적인 ‘일자’를 의미한다. 일자는 최고의 신이고 완전한 신이다. 누스에 해당하는 이데아계는 물론이고 영혼계나 자연계까지도 모두 신의 내용이며 모방된 상이자 반영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즉 신은 어디에나 있으며 만물은 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범신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신플라톤주의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실제 관장하는 근원적인 일자의 개념을 통해, 또한 사유를 넘어서는 접근으로 일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통해 그리스 철학에서 중세 기독교로 나아가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아무런 마찰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 기독교는 신플라톤주의의 범신론적인 경향을 막으려 했다. 물론 그리스 철학의 중세 기독교에의 영향은 신플라톤학파에 제한된 것만은 아니다.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은 여러 측면에서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다. 금욕주의적인 도덕, 정치적이고 외부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삶보다 인간의 내적인 요소를 강조한 스토아 철학은 중세 기독교 철학의 중요한 기반 역할을 하게 된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그리스도교 보호를 선포하고,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플라톤의 학원을 폐쇄한 후 그리스 철학은 시대는 막을 내리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중세 철학의 시대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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