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레스타인, 총구 앞의 삶과 희망들
    By mywank
        2009년 10월 10일 05: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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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한국 문단와의 인연으로 일 년 동안 한국에 머물던 팔레스타인 작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십대 젊은 나이의 그 작가와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그 작가는 자신이 약해지는 것이 두렵노라고 했다.

    젊은 팔레스타인 작가와 빗방울

    이렇게 비가 내리는 가운데 평화롭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날이 서늘해지고 비가 내리는 것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단 하루뿐인 오늘이 아니라, 그저 돌고 도는 계절의 순환으로 여겨지는 무심한 세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슬프다고 했다.

    초청 프로그램에서 기약한 일 년이 다 되어 가고, 이제 자신은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것인데 이 빗방울이 마지막 빗방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젊은 작가의 현실이었다. 이미 어릴 적 친구들 가운데 살아남은 숫자보다 죽은 숫자가 더 많다는 그 작가 앞에서 늦가을 밤을 적시는 빗방울 하나하나가 새삼스러웠다.

       
      ▲영화의 한 장면. 

    외신을 통해 이스라엘과 끝까지 맞서 싸우는 저항군의 모습 정도로나 알던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악수를 나눌 때 따스한 체온을 함께 나누고, 서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실망과 두려움을 이야기하며 눈물도 함께 흘리는 그런 이웃이요, 벗으로서의 팔레스타인을 경험하는 것이 흔한 경우는 아니다.

    그런 드문 경험을 선사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영화다. 그런데 막상 팔레스타인 영화를 볼 기회도 쉬운 일은 아니다. 마침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엘리야 슐레이만 감독의 <팔레스타인>이 상영된다는 것은 그래서 참 반가운 일이다.

    푸대접이나마 고맙다

    굳이 팔레스타인 감독의 영화라는 희소성만이 아니라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를 정도로 작품성도 뛰어난 영화라고는 하지만 한국 극장에서 개봉될지는 기약할 수 없는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영화제의 미덕 가운데 하나다. 비록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백화점 안에 차려진 시설 좋은 메인 상영관에서 한 시간을 더 가야하는 낡은 극장으로 밀려난 푸대접은 아쉽지만.

    이스라엘 국적의 팔레스타인 남자와 팔레스타인 여성이 예루살렘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국경을 넘는 과정을 그린 전작 <신의 간섭Divine Intervention>에서처럼 슐레이만 감독은 <팔레스타인 The time that remains>에서도 연출과 연기 모두를 해낸다.

    떠나려는 이를 태운 자동차가 아차하는 사이에 길을 잘못 들었다. 설상가상 하늘이 우렁우렁하더니 천둥 번개에 폭우까지 몰아친다. 뿌옇게 밀려드는 비안개 속에 낯선 길을 헤매던 운전사가 뇌이고 또 뇌인다. “여기가 어디지?” 나자렛 출신인 팔레스타인 감독 엘리아 슐레이만의 <팔레스타인>은 이렇게 시작한다.

    추방당하거나 죽어 나가기는 쉬워도 마음 편히 살거나 자유롭게 떠나기가 힘든 그곳, 팔레스타인. 떠나려던 이는 바로 감독 자신, 그러므로 떠나지 못하는 이도 바로 감독 자신이다. 스스로 스크린 안에 들어와 부모 세대의 기억과 역사를 더듬고, 젊은 세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스라엘이 건국되던 해인 1948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팔레스타인을 지켜본다. 말없이, 그리고 표정도 없이. 그러나 그 시선이 공명시키는 울림은 깊다.

       
      ▲영화의 한 장면. 

    <팔레스타인>은 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분쟁 지역, 지구촌의 화약고라는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돌아보지만 굳이 설명하거나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기록영화도 아니고, 대하 역사드라마도 아니고, 선동적인 정치 영화도 아니다.

    총구 앞에서 자연스럽게 즐기기

    무거운 역사적 사건의 주름을 펼쳐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자잘한 일상을 그린다. 그러면서 그 일상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어떻게 바뀌어 나가는지, 그러므로 어떻게 삶이 곧 역사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영화적 전략은 총성이 울려 퍼지는 긴장 속에서도 웃음보를 터지게 만들고, 아슬아슬한 상황이 아무리 옥죄어 들더라도 그 상황을 넘어서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항복을 요구하고, 통금을 선포하고, 가택을 수색하고, 사람을 체포하고, 재판 없이 죽여 대는 이스라엘의 침략과 정복이 지속되는 동안 팔레스타의 사람들은 저항은 무기로 맞서는 표면적 행동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한편에서는 스스로 점령군의 진지에 걸어 들어가 치욕스럽게 살아가느니 명예롭게 죽겠노라며 스스로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열까지 셀 동안 총을 감춰둔 곳을 밝히라며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헤아리는 이스라엘 군의 요구를 뚝 잘라 바로 ‘열’로 건너뛰는 극단적인 용기로 맞서는 저항도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군인들이 순찰을 도는 밤 바다에 밤이면 밤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고, 시위대를 진압하는 군인들의 총구 앞으로 태연하게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윽박지르는 이스라엘 군인에게 너희나 돌아가라고 맞받아치는 젊은 엄마가 있고, 통행을 감시하는 탱크의 기다란 포신 앞에서 괜스레 쓰레기 버리러 오가고 시시덕거리며 전화질 하느라 왔다갔다하는 앳된 청년도 있고, 손목에 수갑을 채운 경찰관을 외려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건들거리는 힙합 스타일 청소년도 있다.

       
      ▲영화의 한 장면. 

    이스라엘 점령군이 확성기로 외쳐대고 총구로 위협하는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즐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맞선다.

    이스라엘이 높이 세워놓은 콘크리트 장벽을 높이뛰기용 장대를 이용해 뛰어넘는 슐레이만의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어머니의 임종을 앞둔 병원 응급실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펼쳐지는 엔딩 장면에서, 여전히 살아있다고 노래하는 ‘스테잉 얼라이브(Staying Alive)’ 리믹스 곡의 경쾌한 선율은 총구나 깃발보다 선명하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세대가 바뀌면 바뀌는 대로 그곳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지속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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