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토야마는 노동자 편이 될 수 있을까?
        2009년 10월 09일 03: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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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여름 일본인들은 정신적으로 고양되고 조금은 자신감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던진 한 표가 정치를 바꿀 수도 있음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정권교체’라는 빅뉴스는 4년 만에 중의원 선거가 실시된 지난 8월30일 저녁과 그 다음 날인 8월31일까지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에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일본 정변’은 왜 일어났나?

    당일 날 조간 편집팀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던 필자는 각 당 본부와 개표소로부터 날아들어 오는 ‘자민 대패’라는 뉴스에 놀라고 있었다. 선거 결과는 민주당이 전체 480개의 의석 중 64%에 해당하는 308석을 획득해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의 경우는 아니지만 진정한 ‘체인지(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9월 16일, 하토야마 신정권이 사민당, 국민신당과의 연립으로 발족했으며, 곧 바로 자민당 정권 시기에 결정된 정책이나 사업은 ‘중지’ 혹은 ‘재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 하토야마 일본 총리

    이 같은 놀랄만한 ‘정변(政変)’은 왜 일어났을가? 이번 선거는 ‘더 이상 자민당에게 정치를 맡길 수는 없다’라는 분노가 일본 사회에 가득 찬 상황 속에서 치러졌다. 전후 일본의 정치는 자민당 지배가 계속되어 왔다. 극적인 정치 변화를 경험 해 온 한국인들에게는 ‘혼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마치 ‘화석'(化石) 같았다.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어도, 설사 부패를 했더라도 그냥 단념을 하는 분위기였다. 선거 관련 보도도 긴장감이 결여된 ‘예정 조화’와 같은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야말로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사회적 기대가 분출하고, 그와 같은 기대감이 확산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작년 9월, 도중에 정권을 내던진 후쿠다 야스오(福田 康夫) 전 수상의 뒤를 이어 아소 타로 (麻生 太郎)가 새로운 정권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정권 발족으로부터 불과 2개월 후 지지율이 30% 아래로 떨어지는 등 아소 수상의 구심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돈 뿌리기 정책의 귀결

    그 이유는 국민1인당 1만2,000엔을 나누어준 ‘정액 급부금’으로 대표되는 바라마끼(‘마구 흩뿌리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나온 표현으로 돈을 뿌리는 것을 뜻함) 정책에 대한 비판 등 하나하나 열거하면 끝이 없다.

    올해 여름 임기만료를 맞이한 중의원은 언제 해산하게 될지, 각 당의 ‘의원 선생님들’은 때가 임박했다며 안절부절 못하면서 1년 가까이 애를 태우며 안달했다. 그러나, 아소 전 수상은 전혀 해산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해산이 연기되고 있는 가운데 지지율은 아예 한 자리 수까지 떨어졌다. 반면, 민주당은 순풍에 돛을 단 듯했다.

    그리고 결국, 8월30일 투개표일 밤, 텔레비전 뉴스에 비추어진 것은 자민당의 거물급 의원들을 쓰러뜨리고 "만세"를 부르면서 열광하는 민주당 신인 정치인들, 그와는 반대로 ‘오셀로(Othello) 게임’에서 패배한 자민당 ‘의원 선생님들’의 비통한 얼굴이었다.

    “나의 책임”, “부덕의 소치…”, “죄송합니다” 등등 밤샘하는 상가처럼 조용해진 선거 사무소에서는 자원봉사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사과하고, 눈물을 흘리는 전 각료들의 모습도 방송되고 있었다.

    자민당은 선거 전의 300의석에서 119의석으로 축소되어 민주당과 입장이 역전되었다. "왜, 더 빨리 해산하지 않았나"라며 당 집행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몰아쳤다. 국회의원 대기실의 “노른자위를 민주당에 내줬다”, “정말로 함락 당했다”라고 자조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놀라운 투표소 모습의 의미

    자민당을 향한 역풍이 분명해진 선거전이었기에 예정되어 있던 타 지역선거구에 대한 지원을 서둘러 취소하고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내 선거구를 필사적으로 돌았다”라고 말하는 전임 각료는 격전 끝에 어렵게 의석을 지켜 냈다. 그렇지만 “이번 선거는 이미 진 것나 마찬가지”라며 낙심했다. 당선을 순수한 마음으로 함께 기뻐하는 동지들도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참패로부터 1개월 이상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으로서 새롭게 출발한 자민당의 ‘의원 선생님들’과 이십여 년에 걸쳐 자민당과 ‘자•공 연립정권’을 구성해 온 공명당의 ‘의원 선생님들’의 요즘은 ‘보디블로’(body blow)를 얻어 맞은 것 같은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매일매일이라고 한다.

       
      ▲ 투표 중인 일본 유권자들

    투표일 아침, 나는 투표소인 집 근처 초등학교에 갔다가 무척 놀랐다. 종래의 선거 때와 같은 시간에 나갔는데도 교문 앞에는 사람들이 쭉 늘어서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투표소에 들어갈 수 없어 줄을 서고 있었던 것이다.

    투표소에서는 안내 하는 남성이 큰 소리로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과 방송을 하고 있었다. 바로 전까지 비가 내렸기에 접는 우산을 손에 든 사람도 가득했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투표소에 들어갈 때까지의 30분간, 줄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좋은 현상이예요. 이제는 일본의 유권자도 화를 내지 않으며 안 돼요.” “자민당에 따끔한 맛을 보이지 않으면 안돼요”…

    고용 파괴, 사회 보장의 후퇴, 빈곤과 격차의 확대, 중소기업과 농업의 위기 등 자•공 연립정권 하에서 피폐해진 생계를 다시 꾸리고 안심할 수 있는 삶을 되찾고 싶다는 국민들의 바람은 절실하다. 선거 중에 아소 전 수상은 ‘안심할 수 있는 사회의 실현’을 반복했지만, 국민들에게 있어서의 ‘안심’은 자•공 연립정권의 정치가 하루라도 빨리 끝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울트라 우익도 당선시킨 민주당의 힘

    민주당의 ‘선거 정책 공약(manifest)’ 역시 전부 지지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실제로, 이번에는 자민당을 ‘퇴장’시켜야 한다는 네거티브한 이유에서 민주당을 선택한 사람도 많았다(실제로, 필자가 살고 있는 선거구의 민주당 후보의 경우 선택하고 싶지 않은 ‘울트라 우익’이었지만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다).

    그러므로, 옥석이 뒤섞인(옥석혼효. 玉石混淆) 민주당 신정권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그만큼 한눈을 팔 수도 없는 상황이다.

    현재 일본의 노동 환경은 한국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극도의 가혹한 상황에 처해 있다. ‘워킹푸어(working poor)’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아무리 일해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노동인구 3명 중 한 사람이 파견노동자 등 비정규 고용이다. 더군다나 생활보호 기준인 연봉 200만엔(2,600만원 수준) 이하의 노동자는 1,000만 명을 뛰어넘었다. "결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연금에 가입하는 것도 괴롭다"는 호소뿐만 아니라, 20대 후반의 연금 미납율은 50%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내지 못하고 있다.

    “파견 노동의 경우는 정규직 사원과 달리 우선 급여가 오르지 않는다” 대학졸업 후, 십 년간 파견 사원으로 전기회사 등의 제조업계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30대 남성 지방의원의 체험담이다.

    출생률 감소로 노동 인구가 줄어들고 머지않아 한 사람의 고령자를 두 사람의 현세대가 떠받들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온다고 하는데도, 현세대의 3명 중에 한 사람이 비정규 고용에 놓여 있는 한, 그 사람은 간신히 본인 한 사람만 먹고 살 수 있을 뿐이다.

    일본-한국, 가혹한 노동환경 닮은 꼴

    젊은이로 가득한 도쿄의 신주쿠나 시부야, 샐러리맨의 거리라는 신바시 등등 어떤 지역이든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 ‘인터넷 카페’의 간판을 찾을 수 있다. 주위에는 짐을 맡길 수 있는 코인 로커나 생활용품을 갖출 수 있는 ‘100엔 숍’이 나란히 위치해 있는 경우도 있다. 지방도시에도 역 앞에 인터넷 카페가 늘고 있다. 그곳에서는 생활이 곤란하고 집이 없는 파견 노동자들이 먹고 자는 경우가 많다.

    30세의 T씨(여성)도 인터넷 카페에서 숙식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매일 일당 5,000엔에서 6,000엔짜리 일을 파견회사로부터 소개 받는 ‘일용직 파견’으로 연명하면서 편의점 계산원이나 상품에 가격표를 붙이는 일을 하고 있다. 일 소개는 휴대폰 문자로 받는다.

       
      ▲ 도쿄에 위치한 하루 1,500엔짜리 ‘net room’ 내부 모습

    그 여성은 몸집이 작아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였지만 전혀 웃지 않는다. 옆에 어떤 사람이 있는 지도 모른다. 건물의 한 층을 베니어 합판으로 칸막이를 해 만든 1조 정도(약 반 평) 크기의 좁은 공간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으면 감정을 억누르는 경향이 생긴다고 한다.

    매일 파견처가 바뀌기 때문에 직장에서는 제대로된 이름으로 불릴 일도 없다. “점점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고 누굴 만나고 싶지도 않게 되었다”고 한다. 타인의 눈을 피하며 3년 이상을 보냈다. 어디를 가든 어깨에 짊어진 커다란 배낭은 생활 도구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인터넷 카페에서 숙박하면서 전전하는 ‘워킹푸어’ 젊은이들에 대해, 규제 완화를 추진한 고이즈미 전 수상이 자주 했던 말은 ‘자기책임론’이었다. 빈곤의 원흉은 기업 측의 편의에 따라 개정되고 규제 완화를 반복한 ‘노동자 파견법’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가의 말 속에 자기 자신의 책임에 대한 언급은 쏙 빠져 있다.

    파견노동자 19만명 계약해지

    파견 사원이나 아르바이트, 일용직 파견노동자 등 모든 불안정 비정규 고용을 인정한 ‘노동자 파견법’이라는 악법은 노동자를 기업의 형편에 따라 언제든 1회용처럼 쓰고 버릴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냈다.

    세계 동시불황에 의해 작년 가을 이후 제조업 등에서 ‘파견 해지’가 행해졌다. 도요타, 캐논 등 대기업의 비정규직을 포함한 19만 명이나 되는 파견 노동자가 고용계약이 해지되어 직장을 잃었다고 한다. 다음 일자리를 찾을 시간도 없이 회사 기숙사에서도 쫓겨나 갈 곳을 잃은 노동자가 작년 말과 올해 초 도쿄의 관청가 공원에서 시민단체가 식사 공급을 위해 천막을 쳐서 임시로 만든 ‘파견 마을’로 모여 들었다.

    한참 일할 나이인 20대에서부터 40대가 가장 피폐해 있다. 파견마을 관련 뉴스가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파견 해지’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고, 직접 고용이나 정규직 사원으로의 고용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해졌다.

    중의원 해산으로 폐기되었지만, 민주, 사민, 국민신당은 일용직 파견이나 제조업에 있어서 파견 노동의 원칙적 금지 등을 담은 파견 노동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민주당 공약에는 노동자 파견법의 재검토가 포함돼 있지만, 개정안들을 종합한 당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야당안 들 중에서는 가장 우려되는 내용”이라고 한다.

    파견업계에서는 ‘규제 강화’라면서 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으며 “노동자 파견법을 개정하면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한다”는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반격을 강화하고 있다. 업계의 말대로라면 파견 노동자의 목숨은 위기에 계속해서 노출될 뿐이다.

    일본 국민들, 민주당 감시 게을리 말아야

    선거 당시, 당사자인 대다수의 파견 노동자들 일 때문에 주소지를 떠나 있거나 인터넷 카페를 전전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투표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파견 노동자였던 이케다 잇케이(池田 一慶)씨는 파견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사민당의 비례구에 출마했다.

    올해 다시 한번 파견노동자의 대량해고가 예측되고 있다. 하토야마 신정권에게는 한시의 여유도 없다. 경제학자인 우석훈씨는 올 3월 도쿄에서 두 번째 만났을 때, “일본이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었으면 한다”라는 성원을 보내주었다.

    일본과 한국이 비정규노동이나 젊은이들의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저널리즘의 조건를 서로 교류하고 함께 해결해 갔으면 한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토야마 정권이 국민의 신뢰에 반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감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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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토우 나오코(佐藤直子 さとうなおこ)

    도쿄신문(쥬니치신문 도쿄본사) 사회부 기자. 비정규고용의 파견 노동자, 청년 워킹푸어, 아이들의 이지메, 소년범죄와 재생교육, 사형제도, 전후보상-전후책임 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전후 60주년이었던 2005년 이후부터 일본 국내 뿐 아니라 한국, 중국, 인도네이사 등의 전쟁 체험자를 취재.

    ‘기억~신문기자가 이어받는 전쟁’이라는 타이틀로 신문 지면에 연재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공저로는 『그 전쟁을 알리고싶다』, 『저널리즘의 조건』, 『이라크 "인질"사건의 자기책임론』 등이 있다.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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