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반대의 거점에서만 맴돌아
    2009년 10월 09일 09: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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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말기 민주화와 관련된 진보 논쟁으로부터 이어진 최근의 체제론 논쟁들은 87년 체제의 극복이냐 완성이냐의 논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로 민주당’의 위험성

87년 체제의 완성을 주장하는 측은 현 정세에서 반MB 전선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반 MB ‘정서’가 반영된 이 같은 전선의 구축은 과거 ‘민주 정부'(김대중, 노무현 정부)들에 대해 환상을 키워 ‘도로 민주당’에 그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특히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 이후 지난 민주 정부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사라지면서 민주 정부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과거 민주 정부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반독재 자유주의 정치분파들은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를 마주하는 전략도 과거 민주화 운동 시기의 재탕이거나 관성적이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과거 독재정부의 재현으로 보는 견해와 일맥 상통한데, 과연 이명박 정부를 이렇게 단순하게 접근할 수 있는가? 이명박 정부는 민주정부 10년을 경과하면서 발전해 간 보수우익 세력의 진화이다.

한편 학계의 논의로 이어가자면 최장집 교수는 헌법의 개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완성이 중요하다는 입장에서 이는 87년 체제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분류해도 되지 않을 까 싶다. 다만 반MB가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최장집 교수는 좀 더 본질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민주주의 완성을 얘기한다.

   
  ▲ 손호철 서강대 교수(왼쪽)와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87년 체제의 극복을 주장하는 측은 여러 논의가 있는 것 같다. 헌정체제를 문제 삼으며 헌법 개정에 집중하는 박명림 교수가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87년 체제의 극복을 좀 더 복잡하게 다루는 것은 손호철 교수와 조희연 교수이다. 이 둘의 논의는 97년 체제를 삽입하면서 보다 풍부한 논의를 이끈다.

97년 체제, 경제주의적 해석 극복 필요

손호철 교수의 이전 논의는 97년 체제를 고려하여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강조했는데 최근에는 좀 더 날카롭게 정치적 전선을 투입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희연 교수는 역시 97년 체제를 염두에 두면서 ‘민주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립 전선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두 교수는 모두 반MB나 반신자유주의 전선의 단순한 설정을 넘어서려 한다.

손호철 교수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전선의 구축을 다양화함으로써, 반면에 조희연 교수는 급진민주주의를 제기함으로써 87년 체제와 97년 체제의 극복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 결과 손호철 교수는 경제주의적 해석이 좀 짙고, 조희연 교수는 정치적 해석이 좀 짙게 배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논쟁의 핵심은 97년 체제에 대한 해석과 이를 현 정세에서 어떻게 풀어내는가에 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논쟁의 풍부화’를 위해서는 97년 체제에 대해 자본 일방적 혹은 경제주의적 해석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97년 체제를 신자유주의 체제로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한 풍부한 논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조희연 교수는 ‘사회체제’로 이를 개념화하고 있는데 좀 더 완성시켜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에는 97년 체제가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접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접합되어 있는 체제라고 생각한다. 경제위기는 정권교체를 결과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측면이 접합될 수 있다. 정치와 경제의 접합은 오히려 단순하고 명확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이데올로기적 접합이 좀 더 역동적으로 작동한 국면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IMF 체제를 목도하면서 자본이 승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긴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이 위기를 통해 경제 개혁을 개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경우가 더 지배적이지 않았던가?

재벌해체 vs 기업하기 좋은 나라

경제 위기의 지형 변화는 자본 세력의 적극적인 정치적 사회적 계급 실천으로 인한 것이다. 특히 이데올로기적 각축의 장에서 ‘재벌 해체’냐 ‘기업하기 좋은 나라’냐의 논쟁은 결과적으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승리했다고 본다.

여기에서 미디어들의 적극적인 계급 실천이 있다고 본다. 미디어들은 단순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 제도정치권 그리고 시민사회에 적극적으로 친자본 이데올로기를 구체화시키면서 동시에 식민화시켰다.

내 생각으로는 97년 체제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강요가 외삽되었지만 김대중 정부가 나름대로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체제였다고 본다. 재벌해체의 주장이 그 당시 만큼 정부 내에서 강력하게 제기된 적도 없었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사회복지 예산이 증액되었던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되 그에 대한 상처를 치유할 ‘응급의약품’을 구비한 것에 그쳤기 때문에 사회양극화가 더욱 심화된 것은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김대중 정부 나아가 확실히 노무현 정부는 ‘다른 선택’의 가능성은 존재했다고 본다. 그런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전쟁에서 ‘자본주의의 역전승’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나는 정치적 경제적 측면의 접합에 이어 이데올로기적 접합이 결합된 복잡화 과정으로 자본의 위기 극복 과정을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97년, 자본의 위기극복 과정과 이데올로기

경제 불황의 위기 때마다 독점(산업독점, 금융독점)이 강화되듯이, 정치적 사회적 위기 때마다 민주주의 체제에 접속하는 형태로 자본은 정당화를 이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민주주의의 형식화’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당화에 활용된 대표적인 담론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확산이라고 생각한다.

자본분파들은 헤게모니를 갖는 언어인 민주주의나 개혁에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위기 국면에서 그런 반대는 시민으로부터 역공을 받을 위험이 있다. 그들은 그들을 긍정하는 담론으로 위기를 돌파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건설을 위해 매진해 주도록 유인해냈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주의 그리고 진보적 진영은 현 정세의 돌파구로서 헤게모니 전략이 모색되어져야 한다. 조희연 교수가 말하는 ‘유연한 헤게모니 전략’의 구체화가 필요할 것 같다. 유연한 헤게모니 전략이 개량화의 위험이 좀 있지만 꼭 그렇게 볼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반독재 리버럴 정치분파나 진보적 분파들에게는 정말 ‘유연한 헤게모니 전략’이 없었다고 본다.

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 맞선 ‘삼성공화국’ 같은 담론의 전파가 자본주의의 공격에 맞선 대표적인 민주주의적 저항이었다고 본다. ‘삼성공화국’은 무엇에 반대하는 논리가 아니라 우리가 주장하고 우려하는 바를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나아가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나라’ 같은 포지티브적 저항 담론을 제안하고 싶다.

비록 이 담론은 ‘노동중독’의 냄새가 나지만 보육의 걱정없이, 교육의 걱정없이, 먹거리의 걱정없이, 주택의 걱정없이, 해고의 걱정없이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 헤게모니적 성격을 가지며 폭넓게 구성할 수 있는 담론이라고 생각한다.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나라’

전술적으로는 담론의 선점이 중요하다. ‘녹색성장’을 이명박 정부가 선점하는 순간 저항 담론으로 인용될 가능성은 탈각되고 본래의 의미는 왜곡되었던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녹색성장과 비슷하게 ‘복지성장’ 담론은 또 어떤가? 고용과 복지를 함께 이루려는 사회서비스를 강조한 ‘복지성장’ 담론도 제기해볼 만하다. 진보좌파 진영에는 보다 분명한 성장 담론이 없다. 어떤 형태로든 ‘성장’을 폐기한 담론은 헤게모니를 가질 수 없다.

성장에 반대하는 단순한 분배 담론이 헤게모니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결국 이것도 궁극적으로 ‘성장’을 지향한다고 비판하면서 우리의 담론 경계 밖으로 내몬다면 과연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자문해 볼 일이다.

무엇에 반대하는 담론으로는 헤게모니를 가질 수 없다. 반MB든, 반신자유주의든 무엇에 반대하는 네거티브적 소극적 전략으로는 진보 진영이 늘 반대의 거점에서만 맴돌고 만다. 일전에 우리의 담론이 헤게모니적일 수 있었던 경우는 한 가지였는데 민주 대 반민주 담론구도에서 그랬다.

이때 반민주 진영이 궁지에 몰렸던 것은 세력적으로 뿐만 아니라 혹은 세력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담론적으로는 분명히 헤게모니적 열세였다.

그 이후는 어떤가? 시장주의 대 반시장주의라는 보수 우익의 담론 전략은 우리를 궁지로 내몬다. 반MB, 반신자유주의는 우리 자신을 협소하게 규정한다. 현 정세를 타개해나갈 수 있는 담론 지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반MB, 반신자유주의는 협소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담론으로 경쟁하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민주당과 다른 세력의 범민주 단일화든 연대 세력의 형성보다 중요한 것은 연대의 의미를 묻는 것인데, 우리의 담론으로 경쟁하고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나라’, ‘복지성장’ 담론이 반독재 자유주의 세력이나 진보세력이 서로 경쟁하듯 자기 정당의 담론으로 각축을 벌인다면 그 상승 효과는 자못 클 것이다. 반독재 자유주의 세력과 극우 보수 세력이 서로 경쟁하듯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둘러싸고 총선, 대선 그리고 지방선거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경쟁한 결과를 우리는 분명히 목도한 바 있다.

나는 정치분파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동단결이든 좌파일색 단결이든 그 형식적 주체의 구성보다 진보적 헤게모니적 담론의 경쟁과 전염이 중요하다고 본다. 어느 세력 혹은 어느 정치 분파와 연대할 것인가의 문제 만큼 중요한 것이 어떠한 담론으로 묶여질 수 있는 가의 문제라고 본다.

97년 체제에서 08년 체제로의 진화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성공 신화였다고 본다. 돌이켜보면 97년 체제에서 ‘재벌해체’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핵심적 담론이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본다. 민주주의 대 자본주의 전쟁에서 자본주의를 좀 더 궁지에 몰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것이 가능한 지형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있다. 그래서 지나치게 희망적인 접근일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 사회적 접합은 상당한 유동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 민주주의 체제의 역동성은 그런 면을 반영한다고 본다.

보수 우익의 담론 각축이 97년 이후 08년 체제의 완성으로 나아갔듯이 우리가 재생하는 진보 담론의 각축이 이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를 좀 더 민주적으로 단련시킬 것으로 본다. 요컨대 체제론적 접근들이 복합적으로 풍부화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 접합을 끼워 넣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다. 이것은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경제의 산물로서만 생각하던 경제환원론을 극복하는 접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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