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거 환상'에서 벗어나는 계기 되어야
        2009년 10월 09일 08: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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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조희연/서영표와 손호철 사이에서 진행되는 ‘체제’ 논쟁은 여러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은 다양한 논쟁들이 가지치기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이 글에서 부족하지만 감히 체제논쟁의 중요한 의미와 향후 체제논쟁으로부터 전개되기를 바라는 의제들을 몇 가지 제시하고자 합니다.

    ‘체제’ 논쟁이 중요한 솔직한 이유

    첫 번째로 무엇보다 체제논쟁은 과거 80년대를 관통하고 90년대 전반부까지 한국 지식사회 내에서 커다란 쟁점을 형성했던 ‘사회구성체’ 논쟁만큼이나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단지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지적 계보를 정리하고 새로운 지식시장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체제논쟁은 10월 보궐선거는 물론 내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진행될 총선과 대선 등을 준비하는 정치권 내에서 뜨거운 감자가 될 ‘민주대연합론’과 ‘독자후보론’의 ‘토대적’ 논쟁이 될 것입니다.

    ‘토대적’ 논쟁이라고 의미를 붙이는 것은 체제논쟁을 시작으로 한국 사회성격과 정치동학, 나아가 대안적 공동체의 상과 이를 실현할 다양한 실천전략 등이 성찰적으로 충분히 논의될 때 ‘민주대연합-독자후보’ 논쟁이 과거처럼 감각적이고 상투적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거 때마다 유령처럼 출몰했던 위의 논쟁이 사람들을 얼마나 지치고 피폐하게 했는지를. 특히 이 논쟁이 선거 이후 패배의 좌절 혹은 승리의 도취를 이겨내는 힘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거 이후 보다 더 많은 일들을 준비하고 진행해야 할 사람들이 삶의 정치가 아니라 당리당략으로 정치를 오염시키는 후유증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남은 것은 많은 사람들의 정치적 허무주의와 보수화였습니다.

    따라서 진행 중인 체제논쟁은 사람들의 정치적 허무주의와 보수화를 막을 수 있도록 보다 풍성한 삶의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거환상’ 깨뜨리는 계기

    두 번째로 이번 체제논쟁은 언제인가부터 한국사회가 – 비단 한국뿐만 아니겠지요 – 푹 빠져버린 ‘선거환상’을 깨뜨리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선거에서 승리하면 마치 새로운 공간이 열릴 것이고 그 공간은 내가 꿈꾸고 갈망하던 삶의 형태를 보장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 말입니다.

    ‘선거환상’의 문제는 무엇보다 왜곡된 ‘대의정치’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희귀병으로 아픈, 그러나 가난해서 치료제를 살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위해 특정 정당의 국회의원이 보건복지위를 중심으로 입법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놓지지 말아야 할 것은 동시에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감당할 수 있는 비용으로 치료제를 공급하고 치료해주는 의사와 병원이라는 것입니다. 가격폭락으로 배추와 마늘을 묻어버려야 하는 농민에게 필요한 것은 알뜰한 시장입니다. 실업자들에게는 일터이고, 비정규직에게는 일자리의 나눔과 인간에 대한 존엄성입니다.

    국회가 하지 못하면 좌절만 해야 하는 것이 대의정치가 아닙니다. 대의정치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없기에 ‘타인’과 협력하고 연대해서 공존하는 방식입니다. 함께 병원을 만들고, 함께 알뜰 시장을 만들고, 함께 존엄성이 중심이 되는 일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당이, 국회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현재의 대의정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시치프스의 신화처럼 또 다시 선거에, 선거에 빠져듭니다. 빠져들면서 꾸준히 지속되어야 할 내 삶의 정치는 미궁으로 빠져듭니다.

    체제논쟁은 대의정치의 일부분인 정당정치와 선거가 마치 정치 일반인 듯한 왜곡된 의식구조를 바꾸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체제를 변화시키는 노력은 어쩌면 선거를 더 이상 필요없게 만드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방식, 공존을 위한 연대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열린우리당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이 정권을 잡았다고 한들, 크게 달라졌을까요? 이후 한나라당 대신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정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사회가 나아진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민주당을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을 우리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진보적 대안세력 혹은 좌파의 구심으로 받아드릴 근거는 확실한가요?

    헤게모니의 조건

    이번 체제논쟁에서는 유독 ‘헤게모니’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사람들에 대한 소위 진보적 정치세력들의 헤게모니적 실천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헤게모니적 실천이 특정한 시기에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 다양한 차이를 가진 집단, 세력, 개개인들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협력하는 모든 과정에는 헤게모니적 실천이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세력을 대표하는 특정세력이란 어떠한 이유로든 미리 결정된 특권세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헤게모니란 서로 다른 세력들 중 하나의 세력이 다른 세력들을 대표할 수 있는 (반강제적으로 동의된) 지적·도덕적 힘과 지도력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 ‘좌파’, ‘진보’,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먼저 사용한다고 해서 먼저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물론 헤게모니적 실천을 위해, 즉 특정 정치세력이 사람들로부터 지도력을 얻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가치로 모을 수 있는 이름, 거대 기표 혹은 지배어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이름에 담긴 기억과 경험, 그리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하나의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겠지요. 도덕적 실천없이 말로만 환상을 파는 발코니 정치는 순간일 뿐입니다.

    국회의원 선거가 시작되면 진보정당조차도 수십억씩 드는 선거자금을 유인물 배포하고 선전하는 데 쓰고 있습니다. 오히려 반환경적이지요. "내가 당선되면 000를 하겠다. 의원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뽑아달라"는 약속을 적은 유인물보다 차라리 선거비용으로 모은 돈으로 선거를 포기하고 작지만 저소득층 병원을 짓거나 우리식 은행 혹은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더 큰 희망을 안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국가의 책임방기를 동조하는 것이다’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지난 십여년 간 패배와 분열로 얼룩진 진보정치판을 본다면 차라리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국회의원 한두 명 원내진출 시키는 것보다 사람들에게는 더 소중한 의미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권력자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를 무시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권력자에 대항하고 권력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권력자를 인정하는 것이 되버립니다. 권력자를 무시하고 권력자의 법칙이 아닌 우리의 법칙으로, 우리의 재원으로,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고 살아간다면 그 자체로 그 권력자는 제거되는 것입니다.

    물론 강제와 억압이 존재하는 한 쉽지 않으며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은 우리가 권력에 순응하는 현실을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몰라서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때문에 순응을 선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선거가 권력자를 무시하는 가장 집중적인 정치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려하는 것은 선거가 다른 모든 필요한 정치활동들을 대신할 수 있다는 환상, 그래서 사람들이 모든 정치를 ‘선거정치화’하려는 경향성입니다.

    공동체를 향한 일상의 다양한 정치

    세 번째로 체제논쟁은 현재의 정치국면 속에서 구체적인 정치적 선택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민주대연합과 독자후보론의 이분법적 택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일상에서의 다양한 정치적 선택을 포함합니다.

    우리동네 재개발 사업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중앙 혹은 지방정부가 거절하는 우리의 요구에 대해 거리에서 싸울 것인지 혹은 우리끼리 조세거부를 하고 그 돈을 모아 우리끼리 우리의 다양한 요구들을 실현해보려 할 것인지 말입니다.

    우리끼리 우리의 은행을 만들 수도, 우리끼리 우리의 노동의 터전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에 대한 비판적 접근도 중요하지만, 우리 식의 사회적 기업을 우리가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나눔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어떤 연대에 대한 언급도 지적 유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거대비판을 거론하는 훈고학적 반복보다는 한 사람을 살리는 반지성적 작은 실천이 연대의 시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성경에서 언급되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기적은 어쩌면 나눔으로 시작된 연대의 결과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체제논쟁은 이론적 추상수준의 논의와 함께 다양한 대안적 삶의 방식들을 논의하고 나누고 협력하는 실천적 공간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민주주의라는 상징은 구체적인 정치적 선택과 연대를 위한 나눔을 위한 평화적 원칙일 수 있겠지요. 조희연과 서영표가 주장하는 급진민주주의란 바로 단지 ‘반대투쟁의 급진화’가 아니라 이러한 평화적 원칙의 확장일 수 있을 것입니다.

    최원의 글이 잘 설명했듯이, 라클라우와 무페가 급진민주주의의 기원을 프랑스 혁명에서 찾은 것은 무엇보다도 절대권력의 상징인 프랑스 왕의 목이 피지배자들에 의해 잘리면서, 바로 권력이란 더 이상 특정한 인격체나 체제에 영원히 종속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바뀔 수 있으며, 도전가능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급진민주주의란 바로 그러한 것이겠지요. 권력은 스스로 절대성을 포기해야 하고 피지배자의 도전을 두려워해야 하며, 어느 누구나 권력은 나눌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사실 권력은 점차 소멸되고 민주적 합의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급진민주주의란 단지 대항/저항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바로 특정한 공동체 구성을 위해 권력을 필요로 하면서 끊임없이 권력을 부정하는 삶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공동체 구성의 새로운 대안 체제 혹은 공동체를 위한 정치적 선택과 나눔의 연대를 위해 ‘급진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은 이러한 가치지향 때문일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 ‘우리’는 누구인가?

    제 생각에 조희연·서영표는 ‘체제’를 바로 특정한 목적에 기반한 ‘권력관계’로 이해하면서, 체제로서의 권력관계를 해체하고(탈독점화 과정) 급진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급진민주주의를 언급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진행되는 체제논쟁은 어쩌면 한국에서 대안 체제 혹은 대안공동체가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를 가름할 수 있는 이론적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논쟁이 흐지부지 끝나거나 서로의 차이만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면 어쩌면 한국에서 소위 민주/진보세력의 연대의 가능성, 나아가 대안공동체 구성의 가능성이 점점 더 적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최악의 경우는 체제논쟁이 선거전술논쟁으로 축소되어 결국 어느 당 후보로 단일화 할 것인가 여부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이는 구래의 악습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체제논쟁은 용감한 출발이자 동시에 책임이 무거운 논쟁인 것입니다. 따라서 체제논쟁은 조/서 vs 손의 논쟁으로 혹은 ‘체제’ 논쟁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 구성을 위한 다양한 학적, 실천적 논쟁으로 폭발해야 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끝으로 남는 과제는 체제논쟁에서 바라보는 ‘우리’, ‘인민’, ‘좌파’, ‘대중’은 누구인가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하지 못한다면 과연 체제논쟁이 계속해서 진행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 ‘인민’, ‘좌파’, ‘대중’에 대한 정의와 합의과정이 논쟁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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