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회? 대통령이 바뀌어서 어려워"
        2009년 10월 07일 01: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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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이 가입되어 있는 공공운수연맹에서 일하는 상근자다. 요즘 우리 연맹에서는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기관 선진화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입장을 알리는 집회를 준비 중이다. 노동조합은 주장도 많고 집단행동도 많은 곳이라 집회 준비야 늘 하는 일이지만, 하다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3시간짜리 집회를 위해 스물여덟 번 집회 신고 내고 스물여덟 번을 퇴짜 맞았다.

    보다보다 이런 경우는 처음

    공공기관 선진화 정책이 워낙 공공기관 노동자들의 공분을 사는 정책인지라 집회 참여 인원이 최소 1만 명이었다. 1만 명 규모의 집회를 서울도심에서 하려면, 대학로든 어디든 차도를 잡고 해야 한다. 1만 명이 들어갈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 경찰청이 보내온 집회불허 공문 (사진=공공운수연맹)

    집단적으로 공통의 의견을 형성하고 확인하고 나아가 그것을 주장하려 하는 것은 인간 본래의 행동양식이고, 개인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건 민주정치의 기본 조건이다. 집회의 참여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때문에 정부는 규모가 크면 클수록 더더욱 비중 있게 그 집회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집회신고를 내기 위해 통화한 서울경찰청 정보관의 답변은 “요즘엔 그런 대규모 집회는 서울 도심에서 허가 못 해준다”는 것. "대통령이 바뀌었고 서울청장이 바뀌었지 않냐"는 거다. 특히 지난 2월 주상용 서울청장이 취임한 이후 ‘4대문 안에서는 집회를 불허할 것’이라는 얘기도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 중이다. 법 위에 대통령, 경찰청 서울청장이 있다는 얘기다. 말로만 서민, 말로만 법치 정권의 실상이다. 

    평화집회 각서도 안돼

    답답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인원이 많은 것이 원인인가 싶어 4대문 안 곳곳에 3천 명씩 다섯 군데로 쪼개서 행진을 포함해 집회신고를 냈다. 집회의 의제가 국민의 삶의 질과 직결된 공공적 요구이기 때문에 우리끼리 한 자리에 모여서 얼굴 확인하는 것도 좋지만 나뉘어서 시민들을 만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하루 만에 모두 불허 통보가 났다. ‘주요 도로’라 안 된다는 것.

    다시 갔다. 한번 해보자 하는 맘으로 서울시 전도를 펼쳐놓고 대통령령으로 정한 주요도로를 일일이 찾아 표시했다. 주요도로를 피해서 행진 경로를 잡아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다 표시해 놓고 보니 서울 중심부에 거미줄처럼 색칠이 되어 있어 주요도로를 완벽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지만 주요도로를 교차해서 행진하는 경로라면 협상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일부는 주요도로를 피해서, 일부는 주요도로를 가로질러서 그렇게 다섯 곳을 다시 냈다. 역시 모조리 불허.

    애초에 시민들에게 공공성을 파괴시키고 있는 정부 정책을 알리는 것이 목적인 집회이기에 전경들과 싸울 이유가 없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평화 집회를 약속하는 각서라도 쓰겠다는데도 무조건 안 된단다.

    또 갔다. “정 안되면 시내 곳곳으로 찢어져서 선전전이라도 하련다.” 인도에서 하는 선전전이라 교통을 방해하는 것도 아니고 인원도 적고, 이걸 못하게 할 순 없겠지. 믿기지 않게도 열여덟 곳 모조리 불허가 떨어졌다. 50명씩 모여서 선전전을 하겠다는데, 그걸 허가해 주면 떼거지로 모여서 차도를 불법 점거할 우려가 있어서 안 된단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편도 4차선 도로를 찍어 가면, “이 도로에 하루 교통량이 얼마인 줄 아냐. 교통체증 때문에 안 된다.” 편도 2차선 도로를 찍어 가면, “2차선 밖에 안 되는 도로를 3천명이 행진하면 교통체증 때문에 안 된다” 아예 인도에서 선전전만 하겠다고 하니, “너네는 인도에 있다가 차도로 내려갈지 모르니까 안 돼!”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이다.

       
      ▲ 사진=공공운수연맹

    그리고 추천하는 곳이 여의도 공원이었다. 민주노총이고 연맹이고 노조고 언젠가부터 대규모 집회는 다 이런 수순이다. 장소 협의가 빨리 안 돼 처음에는 “서울 도심”이라고 공지하고, 경찰과 협상하고 협상하다가 결국엔 “여의도공원”에 모여서 집회.

    여의도공원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집회의 목적에 맞는 장소가 있는 거고, 지금 이 집회는 밀폐된 장소에서 할 집회가 아니라는 거다.

    “가스 산업에 경쟁체제가 도입되면 서민들의 도시가스 요금이 엄청 오를 텐데, 지금 정부에서 그 법안을 추진하고 있어요!” 라는 얘기를 우리끼리 얼굴 맞대고 여의도공원에 앉아서 하면 뭐하나. 기획의도 자체가 그 법안 통과로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될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하는 집회인 것을.

    경찰에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 모골이 송연

    배짱부리고 깽판 쳐서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허가를 받아보겠다고 경찰서를 돌며 구걸을 하고 있던 나는 어느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게 정말 보통 문제가 아니로구나.”

    이제 우리는 이명박의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서울도심 집회는 못한다는 거였다. 집회를 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무기를 들어야만 한다는 거였다. 어느덧 우리는 집회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했고, 무엇보다 우리가 이 상황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이렇게 체념하듯 한발 한발 물러서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내어 주고 있을까.

    싸움이 필요하다. 설사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양새가 될지언정, 헌법에 보장된 집회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봉쇄해 버린 정부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 다수인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하는 회합에 대해서 국가권력이 제한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는 게 바로 헌법에서 보장하는 정신 아닌가. 월드컵 거리응원은 되고, 이명박 정책에 반대하는 회합은 안 된다고 선별해 허가할 권한이 경찰에게도 대통령에게도 없다.

    노조 상근자이기 이전에 이 나라의 국민이고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나는 나의 기본 권리를 박탈한 혜화경찰서장, 남대문경찰서장, 종로경찰서장, 중부경찰서장을 상대로 권력남용과 직무유기 혐의로 고소할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소속된 연맹과 민주노총, 같은 방식으로 피해를 봤던 수많은 단체 혹은 개인과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싸울 것이다. 그리고 빼앗긴 내 권리를 되찾을 것이다.

    모든 시민들이 각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이러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이유로 처벌받지 않을 권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관련 일지

    2009.9.3 훈련원공원→서울광장 3천명
    2009.9.3 마로니에공원→서울광장 3천명
    2009.9.3 장충단공원→서울광장 3천명
    2009.9.3 서울역광장→서울광장 3천명
    2009.9.3 한국전력공사→뱅뱅사거리 3천명
    * 2009.9.4 5곳 모두 불허 “집회 장소의 면적 상 3천명을 수용하기 어렵고, 행진구간 일부가 주요도로에 해당돼 심각한 교통 불편을 줄 것이 명백함”
    2009.9.7 종묘→명동성당 3천명
    2009.9.7 서소문 근린공원→독립문 3천명
    2009.9.7 대학로→독립문 3천명
    2009.9.7 장충단 공원→명동성당 3천명
    2009.9.7 한국전력공사→서초4동 3천명
    * 2009.9.9 5곳 모두 불허 “좁은 도로라 3천명이나 되는 인원이 행진할 경우 교통소통에 장애를 발생시켜 심각한 교통 불편을 줄 것이 명백함”
    2009.9.14 을지로 4가 경명빌딩 앞 50명
    2009.9.14 중구 저동2가 평화빌딩 앞 50명
    2009.9.14 중구 예관동 중부시장 서3길 앞 50명
    2009.9.14 을지로 6가 KT을지지사 앞 50명
    2009.9.14 을지로 4가 대림상가 앞 50명
    2009.9.14 무교동 여성가족부 앞 인도 50명
    2009.9.14 사직공원 50명
    2009.9.14 종로3가역 1,2번 출구 앞 인도 50명
    2009.9.14 종로2가 서울YMCA앞 인도 50명
    2009.9.14 광화문역 1,8번 출구 앞 인도 50명
    2009.9.14 종로 수송동 서머셋팰리스 앞 인도 50명
    2009.9.14 보신각 앞 인도 50명
    2009.9.14 문화체육관광부 앞 인도 50명
    2009.9.14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50명
    2009.9.14 종로3가 현미기업 앞 인도 50명
    2009.9.14 종로성당 앞 인도 50명
    2009.9.14 종로5가역 2번 출구 앞 인도 50명
    2009.9.14 종로5가 흥일빌딩 앞 인도 50명
    * 2009.9.15 혜화경찰서 관할 4곳 모두 불허 “단체 홈페이지를 보니 같은 날 2만명 규모의 도심권 집회 일정이 공지되어 있고 서울시내 곳곳에 50여명씩 선전전을 한다고 한 점 등을 검토해 볼 때,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것이 명백하다는 판단”
    * 2009.9.16 종로경찰서 관할 8곳, 남대문경찰서 관할 1곳, 중부경찰서 5곳 모두 불허 “단체 홈페이지를 보니 같은 날 2만명 규모의 도심권 집회 일정이 공지되어 있는 바, 위 장소를 허용시 도심권 대규모 집회로 확산되어 차도 등을 불법점거 할 우려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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