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성도착증 환자와 이웃 또는 우리
    2009년 10월 02일 12: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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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더운 여름날, 보스턴 교외의 한적한 수영장은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햇볕을 즐기는 어른들의 나른한 휴식과 교제 공간이다. 물장구 소리, 웃음소리, 쏟아지는 햇빛, 그 안으로 물안경을 쓰고, 오리발을 신은 왜소한 중년 남자가 걸어들어가 섞여든다.

물속을 거닐며 주위를 바라보는 그를 사람들이 알아보는 순간, 한여름 햇살과 웃음으로 출렁이던 수영장이 한순간 얼어붙는다. 비명과 고함 속에 아이들로 가득하던 수영장이 텅 비고 그 사내 혼자 남는다. 곧바로 경찰이 출동해 그 사내를 데려간다. 그 사내는 항변한다. 자신은 그저 수영이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영화 속 장면. 

이 장면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보면 어린 아이처럼 원초적인 욕망 앞에 비틀거리는 미숙한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서로 실수도 하고 상처도 입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린 서늘한 영화 <리틀 칠드런>에서도 가장 오싹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들여다보면 자기들도 흠집 많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매정하게 볼품도 없고, 힘도 없어 보이는 그 사내 로니를 꺼리는가? 그가 아동 성추행범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죄는 우발적인 한 번의 성범죄가 아니라 ‘정상적’인 관계 속에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유아 성도착증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 욕망은 로니 자신에게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도 치명적이다. 감옥에 다녀오고, 신상명세가 공개되었다고 해서 그 욕망이 다스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 ‘괴물’이 된 것이다. 오직 로니의 늙은 어머니만이 아들이 ‘정상적’이 되어 젊은 여성들과 관계를 트고, 따돌림이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미 잔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머리도 벗겨진 중년의 아들 로니를 애써 보호하려는 늙은 어머니의 자기 아들 좀 가만히 내버려 둬 달라는 호소가 아무리 절절하다고 해도 로니에 대한 사회의 냉대는 거두어지기 쉬운 것이 아니다.

그 어머니가 보호하려는 아들은 젊은 여성과 정상적인 데이트를 하러 나가서는 가뜩이나 신경쇠약으로 힘들었다는 여성을 자동차 옆자리에 앉혀두고 자신이 자위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 포스터. 

그다지 위협이 될 것 같아 보이지 않던 사내가 헐떡이며 자위하는 모습을 지켜보도록 강요받은 여성은 영혼에 가해진 충격과 공포로 울음을 터뜨린다.

그 여성이 성인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옆에 있는 대상이 어린아이였다면 그의 욕망은 아이의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에까지 평생 아물지 못할 고통과 공포를 깊이 아로새겼을 것이다.

스스로를 잘 아는 로니는 늙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이니 정상적인 관계를 통해 만족하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고 못박는다. 그런 욕망은 스스로가 포기하지 못하는 장애이며 위협이기 때문에 교정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인 치유와 관리의 대상이다.

그저 어머니의 사랑으로 감싸서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로니의 욕망은 로니 자신을 고립시킬뿐더러 끝내 자신을 지켜주던 어머니까지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집구석에 틀어박힌 로니를 더 이상 갈 곳 없이 내몰려는 위협에 맞서던 어머니는 로니에게 부디 착한 아이가 되라는 당부를 남기고 죽는다.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착해질 수 있었다면 아마 로니는 벌써 착해졌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감옥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회로부터 흉측한 괴물 취급받으며 그토록 철저히 소외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진심으로 믿어주던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로니는 자신의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 칼을 든다. 그 칼은 한사코 로니를 밀어내기만 할 뿐 그릇된 욕망의 치유와 관리를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던 외부로 향한 것이 아니라 로니 자신에게 겨누어진다. 스스로 욕망의 뿌리를 잘라내 피투성이가 되고서야 비로소 로니는 ‘친구’라는 관계 속에 받아들여진다.

그를 소외시킨 <리틀 칠드런>의 다른 사람들이라고 그다지 올바른 삶을 사는 건 아니다. 아이들을 돌본다고 공원에 모여서는 잘 생긴 이웃 남자에게 유혹의 눈빛을 보내는 주부들, 아내 몰래 컴퓨터로 음란물을 보며 여자 팬티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자위를 일삼는 남편, 그런 이웃 여성들과 남편에 대한 경멸을 잘 생긴 이웃 남자와 나누는 불륜의 쾌락으로 다스리는 젊은 지식인 주부 새라, 아름답고 유능한 아내를 만나 아이를 돌보며 변호사 시험에 붙을 때까지 뒷바라지를 받는 게 너무 답답하다며 불륜과 땡땡이로 숨 돌리는 잘 생긴 이웃 남자 브래드, 로니를 핍박하지만 정작 자신도 총기 사고로 무고한 아이를 죽인 적이 있는 전직 경찰 래리.

이미 약점이 세상에 낱낱이 드러난 괴물 로니 뿐 아니라 <리틀 칠드런>의 어른들은 모두 자기 안에 그릇된 욕망이라는 괴물들이 깃들어 있는 존재들이다. 그 괴물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남을 비방하고, 허위의식으로 삶을 포장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사회, 욕망을 다스리는 윤리라는 것이 겉으로 그럴싸하면 넘어가는 얄팍한 사회에서 로니는 표적이자 희생양으로 그려진다.

   
  ▲영화 속 장면. 

한 어린 여자아이가 성폭행 끝에 영혼과 신체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은 사건에 대한 판결을 두고 지금 온 사회가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있다.

만취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를 심신 미약해진 상태라서 그렇거니 감안해서 12년 징역형을 구형한 검찰이나, 그 형량대로 확정 선고한 법원이나 상식적인 법감정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지은 죄에 비해 처벌이 너무 관대하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들추어보면 현행법에서 형량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은 사실 이 사회의 윤리관이 그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여기자를 성추행해도 만취상태라고 넘어가주고, 대학 총장이 여학생을 두고 성희롱 발언을 해도 외려 그런 태도를 비난한 겸임교수를 해임하는 일이 벌어지고, 노조 간부의 여성 조합원에 대한 성추행 사건을 쉬쉬하고 넘어가려 하면서 스스로를 진보라 일컫는 민주노총이 옹호되고, 신인 여배우를 자살로 내몬 성접대 강요 파문에 유력 언론사 사주 집안 형제가 한데 엮이자 수사도 보도도 흐지부지 끝나버리고, 여성 연예인을 옆에 끼고 질펀한 술자리를 벌이다 부하에게 총격당해 죽은 전직 대통령의 추접스런 사생활을 심지어 영웅호색이라면서 덮어주는 딱 그 정도의 윤리관이 관행화된 사회에서 성범죄에 대해 어느 수준의 양형이 가능할 것인가?

범인 하나하나의 신상명세 공개나 무거운 처벌이 성범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범죄를 남자가 저지를 수 있는 실수로 가벼이 여기게 만들고, 여성과 어린아이에 대한 폭력에 관대한 이 사회의 성의식과 윤리의식 수준이 여전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죄의식이 없는 사회가 범죄를 처벌하려는 의지를 가지기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기대다.

윗물부터 아랫물까지 성범죄에 대한 의식이 싹 물갈이 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음습한 시궁창 속에서 성범죄는 이 사회를 썩어들게 만들 것이다. 거세나 영구적 격리라는 극단적 처벌을 거론하기 전에 우리 사회 전반의 성의식을 반성하고 고쳐나가지 않는 한 이런 끔찍한 욕망은 결코 억제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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