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로, 우로…독일 정치의 양극화
        2009년 09월 29일 02: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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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에 실시된 독일 총선 결과,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우리나라에는 기독교민주당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과 자유민주당의 보수연립정부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번 선거의 최대 패배자는 불과 23.0%를 득표한 사회민주당이었다. 이것은 2차 대전 후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된 이래 이 당이 거둔 최악의 성적이다.

    하지만 사실 사회민주당만 득표율이 떨어진 것은 아니다. 기민연-기사연도 지난 총선에 비해 득표율이 1.4% 포인트 가량 감소했다. 대연정을 구성했던 기민연-기사연과 사회민주당이 모두 유권자의 심판을 받았다고 보는 게 옳다.

    반면 최대 승자는 단연 자유민주당이었다. 기민연-기사연과 사회민주당 사이에서 오랫동안 캐스팅보트 역할을 해오던 이 당은 최근 독일 정계에서 신자유주의의 가장 적나라한 옹호자로 나섰다. 이번에 이 당이 기록한, 14.6%라는 역대 최고 득표율을 만약 그 보답이라 본다면, 독일 사회는 꼭 그만큼 ‘우경화’한 게 맞다.

    한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역대 최고 득표를 거둔 게 자유민주당만은 아니다. 녹색당도 창당 이후 처음으로 두 자리 수 득표율을 기록했다(10.7%). 하지만 녹색당의 이 기록은 좌파당이 거둔 성적 때문에 빛이 바랬다. 좌파당은 사회민주당 득표율의 절반을 넘는 11.9%를 획득했다.

       
      ▲환호하는 독일 좌파당 지지자들

    좌파당은 총선과 함께 실시된 브란덴부르크 주 선거에서도 사회민주당에 불과 5%포인트만 뒤지는 지지를 얻었다. 브란덴부르크 주는 과거 동독 지역이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역시 이번에 주 선거가 실시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를 보면, 결코 예사롭지가 않다.

    과거 서독 지역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도 좌파당은 주의회 진출 제한선인 5%를 뛰어넘어 6.6%를 획득했다. 이로써 좌파당은 구 동독, 서독을 불문하고 독일 전체 16개 주 중 12개 주의 의회에 진출하게 됐다. 명실상부한 전국적 좌파 정당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아무튼 이 모든 그림을 요약해보면, 이번 독일 총선 결과는 한편으로 두 주류 거대 정당의 대연정에 대한 심판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좌와 우의 ‘화끈한’ 소수정당들의 승리였다. 우경화도 아니고 좌경화도 아니라 정치적 양극화가 정확한 진단이라 하겠다.

    좌파당 약진의 의미 – 좌파정치의 지각 변동이 시작되고 있는가?

    국내 보수 언론은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려 하지만 정작 독일 현지와 유럽 각국의 언론은 보수연정의 등장만큼이나 좌파당의 약진에 주목하고 있다. 유럽 자본주의의 중핵에 해당하는 나라에서 금융 위기 이후 처음 실시된 선거에서 사회민주당 왼쪽의 급진좌파정당이 사회민주당의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것은 정말 심상치 않은 일이다.

    이것은 일단 좌파당이 2차 대전 전 사회민주당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독립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의 지위에 올라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 역사상 사회민주당 왼쪽의 정당이 거둔 최대 지지율은 1920년 총선에서 독립사회민주당이 얻은 17.9%였다(당시 사회민주당은 21.7%를 얻었다). 좌파당의 이번 총선 성적은 이 당이 사회민주당의 경쟁자로서 과거 독립사회민주당 수준의 잠재력을 확보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굳이 독립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과 비교하면, 좌파당의 구성은 독립사회민주당 쪽에 더 가깝다. 독립사회민주당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도 포함했지만, 당원 중 상당수는 오히려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이나 노동운동가들이었다. 현재의 좌파당에도 혁명적 사회주의자 그룹들이 참여하고 있지만, 그 또 다른 구성 요소들은 사회민주당의 신자유주의 수용에 항의해 탈당한 당원들과 노동조합 운동가들이다.

    그래서 좌파당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혁명적 사회주의로 경쟁하는 정당은 분명 아니다. 이 당은 독일 현대사를 통해 반 세기 이상 정착한 의회 민주주의의 틀을 존중한다. 이 점에서 이 당은 사회민주당과 동일한 지평 위에서 경쟁하는 셈이다.

    하지만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좌파당은 사회민주당의 최근사에, 그리고 사회민주당이 좌파의 주류 자리를 차지해온 지난 수십 년의 역사에 도전한다. 좌파당의 약진은 이 도전이 독일 노동 대중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그 도전은 첫째,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적-녹연정 시기에 주류 좌파 내부에 형성된 신자유주의적 정책 합의와의 투쟁이다. 무엇보다도, 이로 인한 복지 축소에 대한 항의이고, 이에 더해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에 부화뇌동하는 독일군 해외 파병에 대한 반대다.

    사회민주당 대표까지 지냈다가 탈당해 좌파당 지도자가 된 오스카 라퐁텐만큼 이 도전을 잘 상징하는 인물도 없다. 슈뢰더 정부 시절 재무장관이었던 그는 통화주의 정책을 펼치는 독일 중앙은행과 작심하고 대결했다가 벽에 부딪혀 사임했다.

    이때의 좌절이 결국 사회민주당 탈당으로까지 이어졌다. 라퐁텐과 그의 동지들의 좌파당 합류는 신자유주의 도입 이전의 사회민주주의 전통이 사회민주당이 아닌 새 좌파 정당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데 좌파당의 도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당의 등장과 성장은 또한 1950년대 말 사회민주당이 바트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한 이후 독일 좌파정치를 지배해온 오랜 합의에 대한 도전을 뜻한다.

    고데스베르크 강령의 핵심은 사회주의의 실질적 내용 중 하나인 ‘자본의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환한다’는 과제를 삭제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회민주당의 목표는 결코 자본주의 자체의 극복이 아니라 기민연-기사연이 기독교 온정주의와 독일 특유의 질서자유주의에 따라 수립한 독일식 복지 체제를 단지 ‘(기민연-기사연과 함께) 유지’하거나 아니면 ‘양적으로 확대’하는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 좌파 내에 고데스베르크 강령의 수준을 넘어서는 문제제기와 대안을 제시한 세력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사회민주당 안에도 그러한 당내 좌파는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기존 조직(사회민주당이든 녹색당이든 노동조합이든) 내의 상대적 소수파에 불과했다.

    좌파당은 바로 이 두터운 역사적 한계선을 허물어뜨렸다. 복지국가의 유지 수준을 넘어서 자본주의 자체의 극복을 자신들의 비전과 의제로 내세우는 정치 세력이 현실 정치 안에 의미 있는 지분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유럽 전체를 관통하는 좌파 재구성의 흐름

    물론 현재 좌파당이 이러한 강령적 이상을 현실에 구현할 정치적 힘과 전략, 정책 등을 구비하고 있는지는 더 따져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금융 위기가 열어젖힌 기나긴 혼란기의 초입에,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좌파대중정치의 역사를 지닌 나라에서 이러한 예기치 않은 도전자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일단 그 자체만으로도 ‘지구적인’(global) 의미를 지닌다.

    아니, ‘지구적인’ 의미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것은 분명 ‘전 유럽적인’ 현상이자 흐름이다. 독일 총선과 같은 날 실시된 포르투갈 총선 결과가 이를 웅변한다. 이 나라에서도 사회민주주의 왼쪽의 급진좌파정당이 약진했다.

    사회민주주의정당인 사회당이 36.56%를 얻어, 연립정부 구성의 주도권을 획득하기는 했다. 하지만 과거 40%를 넘던 사회당 지지율에 비하면, 크게 감소한 수치다.

    사회당으로부터 이탈한 유권자들은 고스란히 급진좌파정당들로 이동했다. 트로츠키주의 그룹과 마오주의 그룹이 연합해 만든 ‘좌파블록’이 무려 9.85%의 지지를 얻었고, 공산당-녹색당의 선거연합이 그 뒤를 이어 7.88%를 얻었다. 어찌 보면 독일 좌파당보다도 더 왼쪽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정당이 10%에 육박하는 지지를 받은 것이다.

    이러한 독일, 포르투갈 총선 결과는 결코 낯선 일만은 아니다. 이미 네덜란드에서는 사회민주주의정당인 노동당의 왼쪽에서 사회당이 노동당의 강력한 경쟁자로 성장해왔다. 프랑스에서는 비슷한 양상이 사회당의 노회한 정치인들을 안절부절하게 만드는, 반자본주의신당의 젊은 지도자 올리비에 브장스노의 ‘신비로운’(?) 바람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럽 각국에서 사회민주주의 왼쪽으로부터 좌파정치 전체를 재구성하는 이런 움직임은 과연 얼마나 지속 혹은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속단할 수 없다. 기회 요소와 위험 요소가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령 독일 좌파당은 순전히 선거 공학적인 차원에서 보아도 지지 기반을 더욱 넓힐 가능성을 갖고 있다. <쉬트도이체자이퉁> 지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을 지지했으나 이번에 지지를 철회한 유권자들 중 절반은 이번 총선에서 다른 어느 정당으로도 이동하지 않고 차라리 기권하는 길을 택했다. 나머지 절반 중 일부만이 좌파당이나 녹색당이 이동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좌파당이 사회민주당 실망층을 흡수해서 10% 후반대로, 즉 20% 가까이까지 지지율을 높일 여지가 충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약 좌파당이 그 정도까지 성장하게 된다면, 그 때에는 사회민주당과 좌파당 사이의 대등한 경쟁이 가능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기존 사회민주당 지지층의 다수가 특별한 고민과 우려 없이 좌파당을 선택하는 상황도 결코 공상만은 아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우파와 경쟁하는 상황에서 다수 좌파 정당 사이의 연합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우리로 치면 ‘반MB연대’식의 요구. 한국 진보정당들의 고민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급진좌파정당들도 이런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의 공조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다.

    반우파 연합과 좌파 재구성 사이의 충돌과 고뇌

    이 문제를 잘못 풀면, 급진좌파정당들은 좌파정치 전체를 재편하는 새로운 주도자보다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대한 왼쪽 압력 세력 정도로 왜소화될 것이다. 최근 노르웨이 총선에서 사회주의좌파당의 지지율이 10% 대 아래로 떨어진 게 그 좋은 사례다. 사회주의좌파당은 노동당(사회민주주의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면서 노동당의 한계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지게 됐고, 이것이 지지표 확장보다는 오히려 이탈을 낳는 주요인이 되었다.

    아무튼 좌파 재구성과 관련해서 우리의 관심의 눈길이 향해야 할 다음번 나라는 프랑스다. 독일만큼이나 유럽연합의 방향에 결정적인 이 나라에서도 지금 사회민주주의정당(사회당)은 장기 침체 상태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당 탈당파로 이뤄진 좌파당과, 올리비에 브장스노와 구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반자본주의신당이 좌파 재구성의 주도권을 놓고 경합하고 있다.

    과연 좌파당과 반자본주의신당이 독일 좌파당과 같은 현실정치의 대안을 형성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이 과정에서 사회당, 공산당, 녹색당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이것은, 이번 선거 결과들에 이어, 또 다른 ‘지구적’ 관심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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