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청소년 역사 교류 ①
"공생 위한 역사 여행"
    2012년 08월 29일 07: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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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년 가량 되었다. 부산의 역사 선생님과 청소년들이 일본 고치현의 역사선생님, 청소년들과 매년 한국과 일본을 교대로 방문하면서 역사 교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 청소년 역사교류가  올해로 10년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과 기억을 서로 교류하면서 청소년들 스스로 역사를 생각하고 경험하고 공유하는 시간들이었다. 이런 교류의 경험들이 부산-고치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많이 이뤄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그 교류의 경험들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레디앙>은 이 교류 초기부터 지금까지 역할을 맡고 있는 부산 동래고등학교의 강철호 선생님에게 교류의 기록을 부탁하였다. 정부 사이의 갈등과 대립보다 더 깊고 넓은 것이 바로 이러한 민간과 민중 스스로의 교류와 연대일 것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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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 반환의 여행

만약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산다면
멀리 떨어진 친구를 만날 수는 없어
계속 내리는 비가 강이 되듯이
서로 맞잡은 손에서 한 줄기 강은 이루어졌네
과거 역사의 무게로는 이 강의 흐름을 막을 수 없어
포기하기보다 서로 믿자고 맹세한 우리들
흐르기 시작한 우정의 강

우리에게는 우정의 강이 있어서
멀리 떨어진 친구에게도 우정의 흐름은 이어지네
작은 여울이 큰 강을 이루듯이
서로 통한 마음에서 한줄기 강은 이루어졌네
나라와 말의 차이로는 이 강의 흐름을 막을 수 없어
포기하기보다 서로 믿자고 맹세한 우리들
흐르기 시작한 우정의 강

2003년 여름 교과서 운동본부(현재는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에서 한 통의 메일이 왔다. 일본의 청소년 단체에서 부산을 여행할 계획인데 안내를 부탁하면서 그 여행을 ‘유골 반환의 여행’이라고 불렀다.

여행의 이름을 ‘유골 반환의 여행’이라고 한 것은 일본의 청소년들이 자기 지역의 조선인 강제 징용 희생자들에 대해 조사하고 그 피해자의 본적지를 찾아 유족과 만남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여행을 한국의 청소년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이다.

잠깐의 스쳐가는 인연인줄 알았던 두 나라 청소년의 만남이 올해로 10년을 맞이하였다. 이 기록은 10년 간의 만남을 정리한 것이다. 위의 ‘우정의 강’이라는 노래는 두 나라 청소년이 여행을 마무리할 때 함께 부르는 노래이다.

일본, 피해자이자 가해자!

우리가 교류하는 곳은 일본의 시코쿠(四國) 고치현(高知県) 하타(幡多) 지역에 있는 청소년 단체이다. 이름은 ‘하타 고교생 평화세미나’(이하 ‘하타 세미나’)라고 한다. 이 단체는 1983년 지역의 문제를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결성 이후 첫 조사 활동은 비키니 수폭 실험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는 것이었다.

비키니섬에서의 수폭 실험 장면

1954년 3월 1일 미국은 서태평양 마셜 제도의 비키니 섬에서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1,000배(TNT 15mt)에 해당하는 수소폭탄 실험을 행한다. 이후 1958년까지 총 67회에 이르는 공개 핵실험을 하였다.

이 실험 당시 마셜 제도 인근 해역에서 일본의 어선 ‘제5후쿠류마루(第五福龍丸)’가 참치잡이 조업을 하고 있었다. 배에 타고 있던 선원 23명 전원은 죽음의 재를 뒤집어쓰고 피폭을 당했는데, 그 중 무선기사 구보야마 아이키치 씨는 반년 후에 사망하였다.

피폭 피해는 더욱 컸는데, 당시 미국은 핵실험을 하면서 위험 지역을 극도로 좁게 잡아 인근 해역에서 조업을 하던 어선 856척, 2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피폭을 당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은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 피해에 대해 미군정 아래에서 극심한 보도 통제 속에 피폭 문제를 제대로 발언할 수 없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일본 정부가 다시 정부 기능을 하면서 원폭 피해 문제는 조금씩 터져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터진 비키니 피폭 사건은 강력한 반핵 운동을 일으켰다. 사건 이후 1년 동안 원수폭 절대 금지에 서명한 일본인이 당시 유권자의 절반이 넘는 3,400만 명에 이르렀고, 이후 매년 3월 1일은 ‘비키니 데이’로 반핵 시위가 벌어진다.

제5후쿠류마루 관련 당시의 일본신문 기사

비키니 섬 근처의 론게랍 섬의 주민들은 방사능 낙진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받았지만 1990년 1월에야 핵손해배상 재판소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 일정한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조업 중이던 일본 어선 선원들에 대해서는 일정한 의료 검사 외에 피폭과 관련된 피해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타 세미나가 활동하는 지역은 그 당시 참치잡이 조업에 많은 사람이 나갔다고 한다. 1983년 하타 세미나의 청소년들은 지역의 문제로 핵 피해 문제를 잡고 비키니 피폭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증언을 들으며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본의 2차대전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듣기에는 곤혹스러운 점이 많다. <맨발의 겐>, <반딧불의 묘>와 같은 영화를 보면 전쟁의 참상에 대한 고백이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반전(反戰)의식을 고양한다.

하지만 왠지 불편하다. 일본은 우리가 보기에 명백히 전범 국가이다. 하지만 일본인 스스로는 기묘한 피해자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 피해자 의식은 교묘히 자신들의 가해 행위를 회피하거나 망각하게 만든다.

하타 세미나의 청소년들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피폭이라는 피해의 기억과 함께 자신들의 선조가 했던 가해의 역사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지역에서 가해의 흔적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가해자로서의 일본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60년 만의 성묘(省墓)

2003년 여름, 부산에서의 첫 만남은 다음 해 1월 일본에서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첫 일본 방문에서 우리가 소개 받은 곳은 가시와지마(柏島)라는 작은 섬이었다.

2차대전 말 일본의 패전이 확실시되며 일본 군국주의는 마지막 발악을 한다. 이들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자살 특공대까지 운영한다.

자살 특공정 신요(震洋)

하늘에서 가미카제(神風)가, 바다에서는 자살 특공정과 어뢰정 기지가 곳곳에 만들어졌다.제주도 송악산 아래 해안에 있는 동굴들이 바로 그것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교류하는 고치현은 미군 상륙 후보 중의 하나로, 곳곳에 이런 특공 기지들이 만들어졌다. 가시와지마란 섬도 그 중 하나였다.

1944년 여름 이 작은 섬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왔다. 그 중에 박이동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박이동 씨는 1920년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진산리에서 태어나 1939년 신혼 3개월만에 강제 연행되었다. 1944년 12월 가시와지마의 해군 특공 기지로 연결되는 군용 도로 건설 과정에서 1945년 2월 5일 암벽에 대한 폭파 작업 중 갑자기 날라온 철봉이 박이동 씨의 왼쪽 눈을 관통하여 즉사하였다.

박이동 씨의 주검은 조선인 동료들에 의해 조그만 무덤에 묻히게 되었다. 이후 이름 없는 이 사람의 무덤은 잊혀지게 된다.

하타 세미나의 청소년들은 이 분의 무덤을 알게되고 그 죽음을 기억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5년 50주기를 맞이하여 위령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위령비 건립 비용 170만 엔은 지역 주민들의 성금으로 모였고, 위령비의 주춧돌은 한국에서 가져왔다.

박이동씨의 위령비

위령비에는 “이 도로는 박이동씨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의 피와 땀과 눈물의 존엄한 희생으로 건설되었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신혼 3개월에 강제연행되었던 박이동 씨의 부인은 당시 임신 상태였다. 그리고 딸이 태어났다. 박이동 씨의 죽음 이후 딸 박효진 씨는 아버지의 상황에 대해 모른 채 살아갔다.

우리와의 교류가 진행되면서 박이동 씨와 관련된 유족 찾기가 같이 진행되었다. 대한민국의 훌륭한(?) 행정 시스템 탓에 당시 목포에 살고 있던 딸 박효진 씨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2005년 3월 19일 딸 박효진 씨와 외손자 조승훈 씨는 박이동 씨의 무덤에 성묘를 하였다. 박이동 씨의 죽음 이후 60년 만의 성묘였다. 딸과 외손자는 박이동 씨의 무덤을 고향인 완도군 소안면으로 이장하기로 하였다.

완도에서 박이동씨의 묘소를 한일 청소년들이 참배하는 모습

한일 청소년들이 함께 그리고 있는 박이동 작품화

2006년 8월 두 나라 청소년은 이장한 박이동 씨의 무덤을 찾아 완도의 소안도로 여행을 함께 하였다. 소안도 박이동 씨의 무덤에서 학생들은 준비해온 평화를 기원하는 다양한 만장을 설치하며 박이동 씨와 삶과 그런 삶을 만든 역사를 생각하였다. 역시 공부는 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래의 글은 참가한 한 학생의 보고서 중의 일부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강제 징용당한 박이동씨의 묘를 참배하고 그 곳에 돌을 세우는 일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가족과 조국을 떠나 끌려온 낯선 땅에서 최고로 힘든 노동을 요구받았던 우리 민족. 그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

그래도 박이동씨 묘는 일본에서 가장 잘 되어 있는 것이라 했다. 우리는 박이동씨 묘를 둘러싸도록 돌을 날랐다. 그 돌은 이미 일본 아이들이 글과 모양을 새겨 넣은 돌이었다. 크고 작은 돌을 묘비 옆에 놓고 꽃을 꽂고 절을 했다. 둘 씩, 셋 씩, 한국식 절을 올렸다. 일본 친구들도 무릎을 꿇고 자기 나라 전통의 재를 올렸다.

사실 절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박이동씨에게 이제는 편히 쉬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박이동씨의 묘는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다. 저 바다 너머로 대한민국이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넓고 그저 푸르기만 한 바다, 꼭 부산의 태종대 같은 이 곳을 박이동씨는 계속 보고 계실 것이다…

우리의 박이동씨 묘소 참배에는 일본의 많은 신문사에서 취재가 나왔다.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했다. 이렇게 묘 관리도 잘 해주고, 관심도 가지는 것 같아 고맙게도 생각했다. 가시와지마 섬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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