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상인가, ‘책상 그 자체’인가?
        2009년 09월 25일 02:27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그리스 철학의 종합과 새로운 모색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는 고대 그리스 사상을 집대성한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플라톤의 제자이기도 했는데, 16세 때 플라톤 아카데미에 들어가 그곳에서 20년 동안 공부를 했다. 플라톤이 죽자 3년 동안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자 알렉산더의 개인 교사로 지내다가 아테네로 돌아와 아폴론 신전 부근에 리케이온(Lykeion)이라는 학교를 창건했다.

    여기서 그는 제자들과 숲속의 산책로를 거닐면서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의 학파는 소요학파(逍遙學派)라 불리게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절 집필한 강의노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흉상> BC 330년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종합하고 체계화하였다. 종합의 과정에서 그가 다루지 않은 영역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었다.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은 물론이고 예술론, 심리학, 박물학, 물리학, 천문학, 해부학, 생리학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탐구욕은 끝이 없을 정도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까지는 학문의 여러 요소가 철학이라는 영역 속에서 형식적, 내용적으로 미분화된 상태로 존재했다. 또한 서술 방식에 있어서도 주로 시나 대화를 통한 산발적인 단편 형식으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그는 각 영역을 세분화하여 물리학, 경제학, 정치학, 시학, 윤리학 등 명칭을 붙이고 학문을 분류하여 체계화하는 작업을 하였다.

    학문을 크게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 등으로 분류했다. 이론학은 다시 학문의 대상을 중심으로 하여 자연학, 수학, 제일 철학 등으로 구분하였다. 자연학은 모든 자연물을 대상으로 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자연물들의 공통된 특징은 운동(성질의 변화, 크기의 증감, 생성과 소멸)에 있다"라고 주장했다.

    자연물이 특정한 공간을 점유하며 운동한다면 수학은 자연물 안에 들어있는 것을 추상화시켜 고정된 원리를 파악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제일 철학은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실체, 즉 신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했다. 실천학은 가족이나 국가에 대해서 선을 목적으로 행하는 실천적 행위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주로 윤리학이나 정치학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물건을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지식을 다루는 것으로 제작학을 구분하고 농학, 공학 등에 해당하는 학문을 포함시켰다. 그밖에 시학이나 수사학과 같은 영역을 구분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학문을 다양한 영역으로 구분하고 당시까지의 성과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집대성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방대한 저술 작업을 하게 되는데 115개의 주제, 550권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종합에 머문 것은 아니었다. 각 영역에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고자 하였다. 특히 스승인 플라톤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플라톤이 이데아 세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관념론을 펼친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과 자연에 내재해 있는 것으로 여기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실재를 지배하는 원리를 발견하려 했지만, 플라톤과는 달리 경험을 통해 그 원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 전제로부터 출발해 구체적 결론에 도달하는 삼단논법을 만들어내어 형식논리학을 수립했고, 이를 실제 탐구에도 사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철학이란 것이 시대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순수하게 독립적으로 자기 발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은 당시의 시대적인 과제와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을 맺으며 등장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한 시기에 주로 활동을 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비롯해서 당시 적지 않은 그리스인들이 스파르타에 대해 경탄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안정성에 있었다.

    그리스의 다른 도시 국가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스파르타의 제도는 여러 세기 동안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플라톤이 보기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불안정한 국가 제체, 불안정한 사상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진리관에 입각한 확고한 철학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이데아론은 그 정점에 위치해 있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플라톤과는 다른 시대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다. 그는 스파르타가 쇠망한 이후에 주로 활동을 했다. 자연스럽게 스파르타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스파르타는 퇴폐적인 나라였고, 법률이 지나치게 엄격해서 일반 시민들이 견디기 어려운 나라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스파르타는 더 이상 이상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플라톤이 일사불란한 정치체제를 강조하기 위해 이성의 영역을 극단화시키려 했다면, 스파르타의 쇠망을 목격한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이는 너무나 과도한 시도로 보였다.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절대론적 사고를 부정하고 상대론적 사고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 역시 기본적으로는 절대적인 가치를 옹호했다. 다만 플라톤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리한 측면을 가다듬고 보다 세련되고 체계화된 학문으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용을 강조한 것도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폼페이 모자이크 <알렉산더 대왕의 이수스 전투> BC 300년경

    아리스토텔레스의 활동기는 혼란의 시기였다. 그는 그리스 통일론자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그의 주장은 페르시아의 무력에 대항하는 통일국가가 분산된 도시국가보다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정치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마케도니아 필립 대왕의 초청으로 알렉산더의 교육을 담당할 때부터 이미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150여 개에 이르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정치 제도를 분류하고 탐구하는 저술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리스 통일국가에의 꿈은 그에게 공상에 해당하는 것만을 아니었을 것 같다. 필립의 뒤를 이은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 전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리엔트 원정에서도 승승장구를 했다.

    특히 막강한 페르시아 군대를 제압한 알렉산더 군대는 그의 꿈에 가능성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유명한 모자이크 <알렉산더 대왕의 이수스 전투>는 그러한 전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알렉산더 대왕과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의 이수스(Issus) 전투를 묘사한 거대한 모자이크 작품이다.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가 알렉산더 대군에 황급하게 쫒기는 장면이다. 다리우스는 불안하고 두려운 눈초리로 알렉산더의 돌진을 지켜보고 있다. 전차를 몰고 있는 뒤편의 군병은 다리우스의 전차를 끄는 말에 필사적으로 채찍질을 하고 있다. 왼편의 알렉산더는 도주하는 페르시아 왕을 향해 창을 높이 치켜들고 무서운 기세로 돌격하고 있다. 이수스 전투의 승리야말로 전 그리스의 자랑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확대일로에 있는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을 보면서 개별 도시국가를 넘어서는 거대 통일국가가 현실 가능한 것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갑자기 죽은 후 아테네에는 급속하게 반마케도니아 여론이 확대되고 마케도니아의 침략에 반기를 들고 혁명을 일으켰다. 마케도니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재정적으로도 많은 지원을 받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로서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법정에 불경죄로 기소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불경죄로 고소되었으나,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철학에 대해 또 한 번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라고 말하면서 리케이온을 떠나 다른 도시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오랜 지병이었던 위장병으로 사망했다. 

    이데아론 비판 – 관념론과 유물론의 종합 시도

    플라톤이 일상적인 경험과 감각의 세계로부터 물러나 이를 부정하고 독립적인 정신의 세계로서의 철학을 추구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전 영역에 걸쳐 경험적 사실을 탐구하는 작업을 강조했다. 플라톤은 사물의 재료를 이루는 질료와 구분되는, 사물의 고유한 원리를 의미하는 형상을 중시하고 이를 이데아와 연결시켰다. 그리고 ‘형상들’로 이루어진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파르테논 신전의 <말머리 조각>은 그냥 개별적인 한 마리의 말의 모양일 뿐이다. 그런데 현실의 말은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생김새도 각각이지만 크기나 색깔이 서로 다양할 수밖에 없다.

       
      ▲ 파르테논 신전의 <말머리 조각>

    여기에서 개별적인 특징을 갖는 말이 질료라면 말을 규정짓는 본질은 형상, 즉 이데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아가 독립적으로 실재한다는 주장이다. 플라톤이 보기에 실재한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궁극적이면서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것들을 넘어서 공통적 특질을 이루는 말 ‘그 자체’, 즉 말의 이데아이다. 현실의 말은 말의 이데아를 모방한 가상 것에 지나지 않고 말의 조각은 그 모방을 또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한다. 실재하는 것은 개체로서 한 마리 한 마리의 말들이다. 어찌 보면 상식적인 대답이지만 오직 영원하고 궁극적인 것만을 실재하는 것으로 여겼던 플라톤으로부터 벗어나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현실에 존재하는 우연한 사건과 사물을 넘어서는 데서 시작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현실의 우연적인 사건과 사물을 적극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더 고차적인 인식으로 나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먼저 플라톤의 이데아는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물에다 ‘그 자체’라는 말을 붙여 경험적 사물을 영원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책상에다 ‘책상 그 자체’라고 하면 책상의 이데아가 되고, 말에다가 ‘말 그 자체’라 붙이면 말의 이데아가 되고, 마찬가지로 사람에다 ‘그 자체’라는 말을 붙인 ‘사람 그 자체’가 사람의 이데아가 된다.

    그런 점에서 감각적인 사물을 머리 속에서 영원한 것으로 개념화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되어버린다. 다음으로 플라톤의 방식대로 하면 이데아는 하나가 아니고 무수하게 존재한다. 서로 다른 모양을 갖는 다양한 말을 유사성을 근거로 포괄적인 말의 이데아를 설정하면 그러한 말과 유사성을 가진 다른 종의 동물들과의 관계에서 또 다른 이데아가 발생한다. 이런 식으로 따지다 보면 무수한 이데아들이 나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비판으로서, 플라톤은 이데아를 경험적 사물의 본질이라고 하면서도 이데아를 경험적 사물에서 분리시키고 있는데, 이데아가 경험적 사물들의 본질이 되기 위해서는 사물들 속에 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질료와 형상이라는 개념을 통해 논한다.

    그는 질료와 형상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형상은 질료를 통해 발현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이데아라고 지칭한 형상들이 질료에 해당하는, 보거나 만져서 알 수 있는 사물들과는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과 결합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데아라는 것은 단지 인간의 머릿속에만 있는 생각일 뿐이다. 즉 존재한다는 것은 사물들 자체 속에, 사물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현실주의적인 일원론을 펼쳤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질료와 형상은 가능태와 현실태의 관계와도 연관된다. 그는 모든 사물이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고 보았다. 하나는 사물을 바로 그 사물이게 해주는 형상이고, 다른 하나는 그 형상의 바탕이 되는 질료이다.

    다시 파르테논의 <말머리 조각>을 보자. 이 조각의 질료는 대리석이고 형상은 그 조각을 말로 보이게 해주는 갖가지 특징이다. 그래서 질료는 본질적으로 불확정의 존재이다. 대리석은 조각이 될 수도 있고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따르면, 질료는 가능태이다. ‘가능태로서 존재함’은 ‘현실태로 존재함’에 대비된다.

    대리석은 가능태로서의 조각이며, 완성된 조각품은 현실태로서의 조각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형상이 시간과 공간 개념을 배제한 초월적인 것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형상이 질료 속에 구현되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로 된다. 그에게 시간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며, 실재한다는 것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를 보편과 특수의 개념을 통해 보완한다. 그가 보기에 우리의 세계는 보편적인 측면과 특수한 측면으로 나눠져 있다. 여기에서 각각의 사물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측면은 앞서 말한 질료의 개념이며, 보편적인 측면은 그 사물의 본질을 말한다.

    책상을 예로 들어 말하면, 책상에는 나무로 된 책상, 철로 된 책상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완전한 책상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책상의 본질을 보편적인 측면이라고 한다. 나무든 철이든, 삼각형이든 사각형이든 책상의 용도는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보편적 특성을 형상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모양이나 재료는 책상의 특수한 측면에 해당하고 이를 질료라고 한다.

    그가 보기에 존재에 대한 인식은 이 세계 속에서, 감각에 의해 드러나는 현실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의해 관념으로 너무 나아가버린 철학을 다시 상식의 세계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인식에의 통로는 우리의 감각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확실한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자연에 대한 탐구와 감각의 역할을 중시했던 자연철학자의 탐구방법을 복원했다고도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해 거부당했던 경험과 감각의 역할을 철학의 세계에 다시 복원해낸 것이다.

    그는 물질적 세계의 객관적 존재를 인정한다. <형이상학>에서 그는 “실체들은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최초의 것들이다”라고 한다. “만물은 유전한다”는 자연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그러므로 만약 실체들이 소멸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들이 소멸될 수 있다. 그러나 변화와 시간은 소멸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들은 결코 존재하기 시작한 적도 없으며, 또한 존재하기를 그만둘 수도 없다.”라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자연이란 물질적 기초를 가지며 영원한 운동과 변화 속에 있는 사물이 총화인 것이다. 물질적 세계는 늘 존재해왔고 장래에도 늘 존재할 것이다.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 허구적인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리의 인식은 우선 첫째로, 자연현상의 인식이다. 감각, 표상, 개념은 실제의 사물로부터 파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전통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먼저 형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다음으로는 정신의 독립적인 역할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는 형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편 지속적이며 영원할 수 있는 유일한 변화는 공간속에서의 원(圓)운동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원운동이 존재함에 틀림없다. (…) 그런데 경험은 우리에게 하나의 영원한 원운동, 즉 항성들의 천체가 회전 운동을 하는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 이 천체를 움직이고 있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운동을 일으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부동의 운동자는 오로지 존재하는 것으로 증명된 저 순수하고 활동적인 ‘형상’일 수밖에 없다. 이 ‘형상’의 활동은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것, 즉 자기를 관조하는 영원한 삶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신의 관조에 적당하고 유일한 대상은 바로 신 자신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우선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신의 개념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절대자, 초월적 존재로서의 인격화된 신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사물의 변화와 운동을 있게 하는 궁극적인 원인으로서의 형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영역으로부터 신적인 창조자와 혹은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같은 그에 대한 불필요한 가설들을 추방함으로써 어떠한 종류의 초월적인 존재도 요구하지 않고서 자신의 학문적 세계를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질료에 대한 형상의 우위성, 일차성을 강조함으로써 플라톤과 밀접한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 사물의 본질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다른 의미에서는 사물의 형상 또는 원형이 그 사물의 원인으로 이야기되는, 그리고 이것은 그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는 설명방식”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질료는 자신 속에서 발전이 가능성을 포함할 뿐으로, 형상이 부여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는다. 바로 형상의 작용에 의해서 질료는 현실화하고 현실태로 전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형상과 질료를 결합시키려 했다는 점에서는 플라톤과 구별을 할 수 있지만 형상의 일차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다시 플라톤으로 접근한다.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한편으로는 플라톤을 넘어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플라톤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긍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혼, 즉 정신이라는 것이 생성되고 사멸하는 육체라는 물질과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혼 역시 사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육체의 사멸과는 무관하게 영혼의 불멸을 주장했던 플라톤과는 구분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물질에 대한 정신이 독립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플라톤의 전통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 또는 정신은 어떠한 육체적 기관도, 물질적 부수물도 갖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육체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정신의 영역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역시 정신을 통해 사물의 본질적인 원인과 원리를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이전의 철학을 집대성하는 과정에서 한 쪽으로 극단화된 주장들을 경계하고 상식의 틀 내에서 종합하고자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그의 사상은 경험에 충실하면서도 ‘진정한 학문은 형상을 탐구하는 것이다’라는 플라톤의 가르침과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관심들이 혼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철학적인 견해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관념론과 유물론적인 요소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선의지 – 일반 시민들이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도덕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 시민들이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도덕을 추구했다. 그런 점에서 실천적인 도덕철학을 원했다. 인간에게 무엇이 궁극적인 선인가? 즉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물음에 행복이라고 대답한다. 어떤 존재의 행복이란 곧 그 존재의 덕, 즉 잠재력의 실현이다. 인간에게 고유한 덕은 이성이기 때문에,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이성적인 삶을 이루는 것이다.

    인간의 덕은 습관에 의해 얻어지며, 습관은 의지와 책임을 전제로 한다. 이성적인 삶은 폴리스 안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그 본성상 결국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회적 삶의 가장 높은 형태는 가족이나 마을이 아닌 폴리스에서의 ‘정치적 삶’이다.

    그에게 도덕은 도시국가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실천적인 대답이어야 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처럼 이상적인 폴리스를 그리기보다는 구체적 현실 정치의 조건들을 탐구했다. 이를 위해서도 도덕철학에 있어서 일정한 정도에서 플라톤과의 구별 정립이 필요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윤리관은 소피스트와의 논쟁을 통해 절대론적 철학의 정립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철학적 전환점 역할을 했다. 덕(德)을 곧 지(知)로 바라봄으로써 윤리의 문제를 절대적인 영역으로 올려놓았다. 소크라테스는 덕을 지와 일치시킴으로써 윤리를 이성과 일치시켰다.

    보편적 이성에 의한 객관적, 보편적, 절대적 진리로서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였던 것이다. 즉,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을 행한다고 함으로써 절대적 진리의 깨달음이 곧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유일한 방법임을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본적으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명제, 즉 자연과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 절대적 진리의 지향 위에 서있다. 하지만 일정한 범위 내에서 철학적인 수정을 가한다. 소크라테스의 도덕관이 이성을 절대화하면서 덕을 극히 소수만이 터득하고 체현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당시 일반적인 시민들이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것으로 전환시킨다.

    그러한 의미에서 도덕의 실천적인 성격을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러셀이 <서양철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주로 당시의 교양 있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견해를 대표하고 있다.

    그의 윤리관은 플라톤의 그것과는 달리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요소가 개재되어 있지 않으며, 또한 플라톤의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재산과 가정에 대한 비전통적인 견해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윤리학에서 행실이 바르고 고상한 일반시민들은 어떤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조직적인 설명을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은 경청할 만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 실천과 상식적 감각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스승 플라톤의 초월적 이상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했고 동시에 소피스트들의 ‘궤변적’ 상대주의에 치열하게 맞섰다. 이 두 방향의 싸움 속에서 상식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탄생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당대 윤리적 견해들 전체와 벌인 싸움의 기록이자 그의 상식주의적 통찰이 윤리적 사유에서 도달한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윤리학의 측면에서 그는 이성의 역할과 함께 실천 및 습관화의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즉 모든 악은 무지에서 나오고 모든 덕은 참된 앎에서 나온다고 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점을 수정하고 현실 속에서 참다운 존재를 찾고자 함으로써 실천적인 측면에서 도덕의 의미를 확장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소크라테스는 올바름 즉 진리가 곧 훌륭함(덕)이라고 한다.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인식하는 것이 진정한 덕임을 강조한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흔히 “나는 그것이 잘못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지만 이는 잘못된 태도이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러한 앎은 결코 진정한 진리일 수는 없네. 당신은 다른 사람이 당신의 행동을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수도 있으며, 또한 당신의 행동이 나쁘다고 평가되고 있었음을 알았을 수도 있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당신 스스로 그것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당신은 그 일을 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당신의 잘못은 올바로 통찰하지 못한데 있다네.

    즉 당신은 선한 것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당신은 바로 그 순간에 선한 것으로 보였던 어떤 쾌락에 잘못 인도되었던 것일세. 만약 당신이 선한 것을 파악했더라면, 당신 또한 그것을 의욕 했을 것이며, 이에 따라서 행동했을 것이네. 의지가 순수하고 분명한 통찰력에 의해 일단 자신의 대상에, 즉 선한 것에로 향하게 되면, 아무도 그 자신의 참된 의지에 거역해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네.”

    그는 악덕은 무지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무지는 악덕으로서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역으로 덕은 지에서 오는 것, 이 두 가지가 동일한 성격을 띠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이것들을 안다고 해서 곧 그것을 행하는 경향이 조금이라도 증가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건강하고 건전한 것들의 경우와 같다. 즉, 우리는 의술이나 체육을 알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실천적 경향을 증가시키는 것은 아니다.” 덕을 안다고 해서 곧 그것을 행하는 경향이 조금이라도 증가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반박한다.

    그는 보기에 안다는 것과 실천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있고, 덕과 지의 간극을 매울 수 있는 ‘선의지’(善意志), 즉 실천지(實踐知)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알고 있는 것을 실행에 옮길 실질적인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덕이 실천적인 성격을 지니려면 반드시 방법론의 문제까지 고민의 대상이 외어야 하는데, 선의지가 바로 이를 담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나 선의지와 도덕적인 덕을 다 같이 따라서 해야 성취되는 법이다. 왜냐하면 덕은 우리에게 올바른 목적을 목표 삼게 하고, 선의지는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수단을 사용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것에는 목적과 수단이 있는데, 덕은 우리에게 올바른 목적을 목표로 삼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목적이 있다고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선택을 했고 이를 실현하려고 노력했지만 잘못된 방법에 의지하면 원래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심지어 반대의 결과를 맺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선택을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을까의 문제는 덕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고 별도의 능력이 필요다. 목표에 잘 도달할 수 있게 하는 능력, 즉 선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실천적 지혜와 이론적 지혜를 구분한다. 이론이 곧 실천을 의미하지 않을뿐더러 이론적 삶과 실천적 삶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조정할 필요가 생기고 이 사이에서의 중용의 태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덕을 깨우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중용은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을 해야 하는 과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주장은 지식에 대한 태도와도 연관된다. 그가 보기에 지식 그 자체는 윤리적으로 중립적인데, 플라톤이 과도하게 지식과 윤리를 일치시킴으로써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립적인 지식에 의지의 태도가 좋은 목적을 향함으로써 선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선의지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목적에 해당하는 덕을 실현시킬 수 있는 올바른 수단을 사용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다시 말해서 덕은 선택을 올바르게 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선택을 수행하기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덕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능력의 영역, 즉 선의지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의지가 없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그는 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윤리의 문제가 학문적으로 엄밀하게 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리가 하나의 학문으로서 정립되기 위해서는 목적을 넘어서는 수단, 방법론의 문제로까지 인식의 지평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덕의 문제를 인식의 문제에 대충 섞어놓는 것을 넘어서 윤리학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을 담아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집필한다. 도덕의 문제를 그 이전까지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하나의 학문 체계로 집대성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윤리학이 형이상학, 정치학 등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되 일정하게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자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관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윤리관을 기본으로 하되, 선의지를 가미함으로써 한 걸음 더 발전시킨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 두 가지 윤리관의 차이는 어느 것이 부족하고 어느 것이 더 완성된 것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부족한 무엇을 더 가미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문제의식의 문제이고 논쟁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과연 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지혜와 진리, 영혼의 향상을 진정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이를 실행할 의지도 함께 포함하고 있을 상태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덕과 지를 구분하고 지를 중립적인 그 무엇으로 여긴다면 이성은 가치판단과 분리된 기술적인 문제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앎의 문제와 실천의 문제를 분리될 때 단지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 지혜로운 자의 행세를 하는 것으로 연결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지식이 윤리적인 가치판단과 분리될 때 자칫 지식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근대에서 나타나는, 도덕적인 가치판단에서 독립한 학문을 추구하는 경향, 이성을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하나의 방식이나 수단으로 인식하는 경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태도를 단지 학문이 발전하는 단계에서 미분화된 단계를 상징하는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구분함으로써 학문의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단견일 수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와 필리스> 14세기 후반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필리스>는 그 일화를 묘사한 청동 조각 중의 하나이다. 한 젊은 여인이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의 등에 올라타 있다. 마치 말을 몰듯이 머리채를 휘어잡고 엉덩이를 손으로 때리면서 앞으로 가라고 재촉하는 모습이다.

    여인을 태우고 졸지에 말 노릇을 하는 사내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리고 이 대철학자를 가지고 노는 여인은 알렉산더 대왕의 애인이었던 필리스(Phyllis)이다. 그녀는 고급 창녀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색에 빠져 있는 제자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따끔한 충고를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필리스는 앙심을 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유혹했는데, 대학자도 아름다운 여인의 교태에 굴복하여 애욕에 사로잡히게 된다. 알렉산더대왕은 철학의 대명사로 통하던 스승의 이성마저도 사랑의 노예가 되어 한 여인 앞에 처참히 무너지는 것을 보고 정말 여자를 멀리 했다나…

    조각은 모든 체면을 던져 버리고 그녀의 말이 되어 엉덩이를 맞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여인에게 머리채를 휘어 잡힌 채 바닥을 기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표정이 익살맞게 표현되어 있다. 여러 갈래로 뻗은 수염이 우스꽝스럽다. 눈은 사랑에 눈이 멀어 흐릿하다. 이와 반대로 여인의 표정은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처럼 당당하고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스친다.

    이 일화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기회를 제공해서 많은 회화와 삽화, 조각으로 남아 있다. 어떤 삽화에서는 완전한 나체 차림으로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필리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채찍질을 하고 있다.

    이 일화가 얼마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우스갯소리로 연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안다는 것과 행한다는 것, 이론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가 구분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경우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가 말한 이론적 삶과 실천적 삶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는 순간일 듯하다.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을 해야 하는 중용의 필요성을 스스로 일깨워주는 경우라고 생각하고 웃고 넘어가면 될 듯하다.

    정치학 – 플라톤의 이상 국가론 비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정치학>에 집중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국가가 개인에 앞서고 안정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플라톤과 큰 차이는 없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의 해결을 위해서 국가가 필수적임을 강조했던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국가는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본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가족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해 국가를 다룬다.

    “매일 되풀이되는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최초의 결사 형태는 가족이다.(…) 그 다음 형태의 결사는 하나 이상의 가족이 모여 이루어지는 최초의 결사인데, 매일 되풀이되는 필요 이상의 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부락인 것이다.

    (…) 우리는 끝으로 최종적이고 완벽한 결사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은 여러 개의 부락으로 이루어지며 이것이 바로 국가이다. 이 결사는 말하자면 완전한 자급자족을 이룬 것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국가란 그저 생존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반면에 일단 완전히 성숙하고 나면 좋은 생활을 위하여 존재하며, 따라서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자급자족한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에 속하는 것이며 또한 사람은 본질적으로 국가에서 살도록 되어 있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떤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성질상 국가가 없는 사람은 보잘것없는 존재이거나 아니면 인간 이상의 존재이다.”라고 강조한다.

    국가를 절대화하는 것은 플라톤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결론적으로 개인이나 가족이 시간으로는 국가에 선행되지만 논리적으로는 국가가 개인이나 가족에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전체는 필연적으로 부분에 선행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몇 가지 점에서 그는 플라톤의 청치철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인식론과 윤리에 있어서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상이한 정치철학을 만들어낸다. 안다는 것만으로 도덕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윤리가 한 인간의 영혼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의 문제와 연관된 것이라면 윤리는 반드시 사회적인 성격을 지니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에 대한 인식을 총체적으로 정립한 <니코마코스윤리학>의 마지막 장을 ‘우리의 목적이 달성되려면 입법이 필요하다’라는 주제로 마무리하면서 윤리학과 정치학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자 한다. 그가 보기에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올바른 법률 밑에서 양육을 받지 않는다면, 어릴 때부터 덕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올바른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된다. 절제 있게 또 애써 일하면서 산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유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윤리와 관련하여 그들의 양육과 여러 가지 종사하는 일이 법률에 의하여 규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습관이 되면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 시민들이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도덕을 추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는 플라톤처럼 이상적인 폴리스를 그리기보다는 구체적 현실 정치의 조건들을 탐구하는 것이 당연했다. 플라톤의 철인통치론은 극소수의 철학자에 의해 국가의 운영이 이루어지고 나머지 시민은 이에 일방적으로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은 소수의 철학자나 귀족이 아니라 다수의 중간층 시민이어야 한다. 국가의 권력은 부자도 빈민도 아닌 노예 소유자의 중간층에 속해야 한다. 이들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어야 튼튼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중간층이 올바른 삶을 살고 통치에 기여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도덕 통치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고 습득할 수 있는 도덕이 필수적이다. 플라톤처럼 극소수의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고도의 이성 능력이 있어야만, 오직 이를 통해서만 도덕이 형성될 수 있다고 보는 도덕관은 오히려 안정된 국가에 해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인식론과 윤리학에서 나타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적인 태도와도 깊은 연관을 갖는다. 그가 보기에 현실의 국가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부딪히면서 살고 있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 다양성은 국가에 있어서 전제에 해당하는 사항이다. 그런데 플라톤처럼 극소수에 의해 모든 국가 행위가 일사불란하게 정해지고 이에 의해 안정된 운영이 가능하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또한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철학자에 의한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해 재산은 물론이고 처자까지도 공유하여 이상적인 국가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아리스토텔레스 입장에서는 지극히 비현실적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공동소유물로 되어 있는 것은, 그만큼 돌보지 않게 마련이며, 만일 ‘아들들’이 여러 ‘아버지들’의 공동소유가 되면 아무도 그 아들들을 돌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 그리스 항아리 그림 <농부>와 <상인> BC 530년경

    그에 의하면 플라톤식의 공유는 나태한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게 될 것이며 이웃 간에 시비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재산은 개인 소유여야 하고 다만 사람들은 그 사유재산을 자비로운 마음에서 나누어 쓸 줄 알도록 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그가 생각하는 조화로운 국가, 질서 있는 국가는 생물학적 체계에도 수직적인 구조가 있듯이 신분의 차이와 빈부의 차이가 인정이 되고 이들 사이의 조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연적으로 지배적인 요소와 자연적으로 피지배적인 요소의 결합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양자의 존속에 다 같이 필요한 것이다. 지성에 의하여 예견의 능력을 갖는 요소는 자연적인 주인 즉 지배계층이며, 육체적인 힘으로 지배층이 계획한 것을 실행하는 요소는 자연적으로 노예상태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인과 노예는 서로 상대방의 결함을 보충해준다는 점에서 공통의 이해를 갖는 것이다.” 그는 생활을 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시민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의 항아리 그림에는 당시 생활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다. <농부> 그림을 보면 땀을 흘리며 쟁기를 사용하여 농토를 갈고 있는 농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상인>을 보면 상인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저울질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직공이나 상인은 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런 생활은 명예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유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농부 역시 시민일 수 없다고 한다.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여가가 필요한데, 농부는 그러한 여가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농부는 이민족 출신의 노예이어야 했다. 당시 고대 노예제 사회의 현실적인 사회구조를 인정한 위에서 정치체제를 꿈꾸었다는 점에서도 현실주의자의 특색을 살필 수 있다.

    정치체제에 대한 생각도 피력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사회 전체의 선을 위해 힘쓸 때 좋은 정부가 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노력할 때 악한 정부가 된다. 훌륭한 정치체제에는 군주정치, 귀족정치, 법치체제가 있고, 나쁜 정치체제에는 참주정치, 과두정치, 민주정치가 있다고 한다.

    올바른 정체인 왕정에는 일탈된 유형인 참주 정치가 대응되고, 귀족 정치에는 과두 정치가 그리고 법치 체제에는 민주 정치가 대응된다. 그는 귀족 정치, 즉 다수의 선한 사람들에 의한 통치가 일인 군주제보다 낫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귀족정치도 이상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법치체제를 강조한다.

    법치체제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공적에 따라 관직을 부여하는 법에 의해 번갈아가며 복종하고 통치할 수 있는, 다수의 전사(戰士)들이 자연스럽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중간계급에 의한 통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페르시아에 대항한 그리스 통일국가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다소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왜냐하면 <정치학>에서는 이상적인 국가의 규모를 상당히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가 너무 작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국가는 자족적일 수 있을 만큼 거대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의 크기는 백성들이 많아 통치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서는 안 되며, 언덕 위에서 바라볼 때 전체가 다 내다보일 만한 넓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혼란은 이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고민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적인 측면에서는 지나치게 거대하지 않은 적정 규모의 국가에서 안정된 정치체제를 구현할 수 있을 테지만 현실적으로 페르시아의 무력으로부터 그리스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분산된 도시국가를 넘어서는 거대한 통일국가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 없는 당시의 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알렉산더에 대한 태도에서도 모호함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페르시아로부터 그리스를 지킬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알렉산더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정치철학과는 괴리되는 모습에서 갈등을 느꼈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를 절대화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과 악을 초월한 존재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 역시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도덕정치를 꿈꾸었다. 이는 그의 스파르타 비판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정치를 전쟁과 통치로 대신하는 스파르타를 비판한다. 국가는 선한 삶을 위해서 존재하며 개인들이 따르는 것과 똑같은 도덕적 계율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 및 국가에 최선인 것은 서로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입법자는 군사적 수단 및 다른 수단들을 평화를 확립하는 쪽으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군사적인 안정과 세력 확장에 초점을 둔 알렉산더에 대해 혼란스러운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 – 시학

    예술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는 보다 뚜렷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은 <시학>(詩學)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플라톤은 이데아론의 자연스러운 귀결로서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한 현실을 다시 모방하는 회화나 조각 등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플라톤은 회화와 조각을 “환영의 창조, 기만적인 눈속임이다”라고 비판한다. 회화나 조각을 인간적인 제작 활동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영혼으로 다가가는 길을 방해하는 행위쯤으로 여겼다. 이에 비해 시에 대해서는 신적 영감의 소산으로 간주하며 긍정적인 태도를 지녔다.

    하지만 형상이 질료와 분리된 채 독립적으로 실재한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하고 둘의 결합을 지향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현실의 모방은 거부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었다. 그는 <시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것으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체의 형체처럼 실물을 볼 때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매우 정확하게 그려 놓았을 때는 보고 쾌감을 느낀다.”

    이성적 동물로서 인간에게 모방은 본능적이며 모방을 알아보는 것, 즉 인지하는 것은 상당히 즐거운 행위라는 것이다.

    모방에 기초한 예술의 사실성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진출과 함께 꽃핀 헬레니즘 시대에 정점을 이룬다. <사모트라차의 니케>(Nike of Samothrace)는 헬레니즘 시기를 대표하는 조각상 중의 하나이다. 루브르 박물관 대형 홀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조각을 마주하면 경탄의 소리가 절로 새어나오게 된다.

    단지 규모의 웅장함만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 것 같은 사실성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날개를 보면 거대한 독수리의 깃털 하나하나를 이어 붙인 듯 생생하다. 또한 바람에 하늘거리는 의복 주름은 대리석 조각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다. 의복 속에 감추어진 여성의 육체는 지금도 피가 흐를 것만 같다.

       
      ▲ <사모트라차의 니케> BC 220-190년

    아리스토텔레스는 회화, 조각은 물론이고 시도 인간적 제작 활동으로 보았다. 그는 모방적 활동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보았다. 먼저 색채와 드로잉을 통해 사물의 시각적 외양을 모방하는 활동, 즉 회화와 조각이다. 다음으로 시와 같이 운문, 노래, 춤을 통해 인간의 행위를 모방하는 활동이다. 그는 인간에 있어서 본성적인 모방을 발전적·단계적으로 구분한다.

    최고의 단계로 드라마적인 모방을 두고 있는데, 성실하고 고귀한, 즉 선량한 행위의 모방인 비극이야말로 진정 그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비극은 상당한 길이로 완결적 특성이 있고, 리듬과 음악적인 언어가 있으며, 등장인물은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행위의 카타르시스(淨化)를 성취한다는 점에서 최고의 단계를 이룬다고 보았다.

    앞서의 다른 경우도 그러했지만 미학에 있어서도 플라톤을 완전히 거부한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보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는 연관성을 지닌다. 보편적인 원리를 파악하고자 하는 욕구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마찬가지였다. “보편적인 것의 인식이 개별적인 것의 인식보다 가치 있다”는 것은 일맥상통한다.

    모방이 의미 있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보편에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비단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그 밖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최상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것은 봄으로써 배우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모방은 일종의 학습 효과를 창출하기 때문에 즐겁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인 것이 초월적 형상이라고 생각했던 플라톤과 달리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 내에서 발견된다고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로서는 개체에 대한 모방과 탐구를 통해 보편적인 것으로 다가서는 인식활동은 매우 긍정적인 것에 해당한다.

    그는 시와 역사를 비교하면서 보편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법한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점은 운문을 쓰느냐 산문을 쓰느냐 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일어날 법한 일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실제로 일어났던 개별적인 사건들에 관심을 두는 반면, 시는 어떤 보편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 보편적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어떤 경우에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말하고 행위 하는 방식”을 의미하며, 시가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이런 보편성이다. 그러므로 시는 “보편적인 인간 행위의 모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자신의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 집대성하고 종합하기 위해서도 한쪽 극단을 이루고 있는 플라톤을 넘어서야 했다. 하지만 그 넘어섬은 플라톤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보다는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여러 측면에서 수정을 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신적인 열망을 추구한 소크라테스의 관념론적 전통 위에 서서 유물론적인 요소, 현실적인 과제와 정서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을 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