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의 정치공간에 대한 통찰 부족
        2009년 09월 23일 07: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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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며칠 전 아시아 민주주의에 대한 국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적이 있다. 필자의 발표주제는 민주주의 지표개발과 비교연구가 가지는 한계에 관한 것이었다. 토론자는 인도의 ‘비판적 행동을 위한 기구’의 자이 센(Jai Sen)이었다.

    그의 비평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술적 담론, 특히 현실에 대해 개입하려고 하는 비판적 이론이 현실의 담론들과 괴리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론적 담론과 현실 담론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며 종국에 이론적 담론은 소수의 이론가들 사이에서만 소통될 수 있는 ‘암호’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론적 담론과 현실 담론의 괴리

       
      ▲손호철 교수(사진=레디앙)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론가는 거의 없다. 문제는 얼마만큼 ‘이론’이 ‘실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가의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반대의 편향도 존재한다. 이론은 분명 현실의 언어로 번역되고 현실과 소통해야 하지만 동시에 일상의 언어로는 파악되지 않는 구조적 실재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어야 한다.

    촛불시위를 목격하고서는 곧장 이명박 정권의 위기와 소위 대중지성의 출현을 선언하기보다 신자유주의적 사회라는 구조적 조건 속에서 누적되어왔던 대중의 불만이 특정한 정세적 조건 속에서 대중행동으로 전화되는 계기를 이론적으로 성찰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보수반동화와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으로부터 곧장 반MB 전선 구축을 주장하는 것도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기고한 글에서 밝혔듯이 ‘체제논쟁’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은 이 두 가지 편향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 종종 추상적 수준으로 치우치거나 반대로 현실에 대한 기술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지만 양자 사이에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추상적 선언과 경박한 구호

    유감스럽게도 <레디앙>에 요약 보도된 내용은 정반대로 읽혀졌지만 조희연·서영표의 “체제논쟁과 헤게모니전략”은 구조적(종종 경제적) 조건에 대한 추상적 분석을 어떻게 구체적인 정세분석과 연결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제기였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관료적인 국가, 그리고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의 필요충족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독점적 시장이 경험되고 공유되는 구체적 계기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반신자유주의의 추상적 선언과 반MB투쟁이라는 경박한 구호 모두는 이러한 구체적 계기들을 포착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본격적인 체제논쟁은 손호철이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반론 형식으로 게재할 “사회학적 서술주의와 추상성의 혼돈을 넘어서: 조희연, 서영표 체제론에 대한 반론”이 공개된 후로 미루기로 하고 아래에서는 <레디앙>의 기사가 포착하지 못했던 논쟁의 쟁점을 요약하고 앞으로의 토론 방향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조희연 그리고 손호철

    논쟁의 쟁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논쟁 당사자인 조희연과 손호철 사이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현실인식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구체적인 정치전선 형성과 연결시킬 것인가에 있다.

    손호철이 ‘반론’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그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반MB투쟁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조희연 또한 ‘국민정치전선’이라는 현실정치노선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민주당 중심의 반한나라당 선거연합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한마디로 손호철과 조희연은 좌파라는 공통의 지반 위에서 현실을 읽는 시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해서) 조희연과 손호철은 각각 본인들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해석될 약점을 가지고 있다. 조희연의 경우 정세에 대한 유연한 개입과 다양한 민주주의 투쟁의 계기에 주목하지만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 약하기 때문에 종종 단순한 반MB투쟁론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체제논쟁과 헤게모니전략”은 이러한 편향을 교정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좌파라는 공통 지반과 약점들 

    반면에 손호철의 97년 체제론은 반신자유주의전선과 반MB투쟁을 동시에 사고하고 있지만 두 가지 주장 모두 너무 높은 추상 수준에서 논의됨에 따라 반MB투쟁의 내용이 모호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원칙적인 반신자유주의 전선론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그의 반신자유주의 전선론에 근거해서 볼 때, 그의 반MB투쟁은 선거연합과 같은 정치집단들 간의 동맹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MB투쟁의 실체와 내용은 무엇인가? 조희연이 ‘국민정치적 공간’이라는 다소 모호한 개념으로 포착하려 했던, 사람들의 불만과 잠재적 저항이 교차하고 있는 정치적 공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조희연과 손호철은 공히 구조적 조건과 정세적 조건 모두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조희연의 경우 구조적 조건에 대한 분석이, 손호철의 경우 정세적 조건에 대한 분석이 약점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삶에 대한 성찰

    그렇다면 손호철의 추상성을 비판하면서 조희연이 노출되어 있는 경험주의적 편향을 동시에 교정할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개별적 이론가가 아닌 진보적 이론가들 사이의 생산적 논쟁이 필요하다.

    “체제논쟁과 헤게모니전략”이 약간의 막대 구부리기를 감수하면서도 손호철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이러한 생산적 논쟁을 촉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생산적 논쟁조차 진공 상태에서 시작될 수는 없다.

    필자들의 글이 의도했던 것은 논쟁을 위한 최소한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재인식이었다. 추상적 구호와 경험주의적 정치진단을 넘어설 수 있는 다양한 삶의 경험들과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맹아적 저항의 형식들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체제논쟁이 주목해야 될 곳

    체제논쟁이 한국 현실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대안적 사회로 전진하기 위한 이론적 성찰을 목적으로 한다면 반드시 주목했어야 할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구조의 변화와 그 안에 내재해 있는 맹아적 저항을 환기하려 했다. 우리의 구체적 현실은 민주당, 진보신당, 민주노동당 사이의 선거연합이 아닌 사람들의 일상에 있는 것이다.

       
      ▲ 조희연 교수(사진=레디앙)

    2009년 한국 사람들은 자본주의적으로 소비하고, 투자하고,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시장과 경쟁의 원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결과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문제의 고리는 ‘행복하지 않음’을 체제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개인의 능력 또는 정치인과 관료들의 부패로 생각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지형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바로 당신들의 생활양식이, 자유, 평등, 정의, 인권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라고” 외치는 것은 정치적으로 무력하다. 21세기 대항헤게모니는 계몽주의적 전략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계몽주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대항헤게모니 전략은 현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이상주의적 규범에 기초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이 처한 일상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것이다.

    대항헤게모니 전략의 출발점

    화폐소득의 증가에 따른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지만 언제나 경쟁적인 일상에서 피로감을 느낀다. 한편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상당수는 우리의 일상에서는 도저히 실현되기 어려운 전원적인 삶, 생태적인 삶, 느린 삶을 보여준다.

    일상에서는 대형 할인마트에서 판매되는 플라스틱 용기에 포장된 식재료에 의존하고, 값싼 외식과 정크 푸드를 즐기지만 텔레비전 속에는 유기농으로 재배되는 싱그러운 먹거리들이 등장한다. 요리할 시간조차 없이 쫓기는 삶을 살지만 텔레비전, 신문, 잡지에는 요리에 관한 프로그램들과 기사들이 등장한다. 재개발에 동반되는 이익과 보상금에 목을 매지만 아련한 기억 너머 속의 시골 풍경이 사라져 가는 것을 한탄한다.

    사람들은 일상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리고 스스로가 느끼는 인간적 필요들이 끝없는 일과 그에 대한 보상으로 얻어지는 소비를 통해 충족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삶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비록 맹아적인 형태이지만 저항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인식과 이로부터 생겨나는 대안적 삶에 대한 열망은 상품-소비사회의 구조적 조건의 무게에 짓눌려 체계적인 저항의식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만과 대안적 삶에 대한 열망마저도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소비해야 하는, 그리고 돈을 주고 상품으로 구매해야 하는 조건은 화폐소득-소비의 악순환으로 사람들을 되돌려 넣는 것이다.

    대안적 공동체 운동에 주목해야

    자본주의적 시장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불만과 저항 또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표현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적 논리가 아무리 지배적 논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사회적 관계를 완벽하게 자본주의화 또는 상품화할 수는 없다.

    지금은 이것마저도 붕괴하고 있지만 가족공동체와 지역공동체를 자본의 논리로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러한 공동체들에서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 원리는 상호이해와 존중 그리고 협동이기 때문이다. 경쟁의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 수세에 몰려 있는 기존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대안적 공동체들도 존재한다. 생활공동체, 생활협동조합 같은 대안적 운동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노동조합의 활동이 조합원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을 넘어 지역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쟁점을 제기되고 그것들을 민주적으로 해결하는데 앞장설 수 있다면 이러한 대안적(비시장적) 사회관계로 역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대안적 생활, 실천의 공간을 지키고, 만들고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 속에서 대안적 인간관계, 타자를 배려하는 공동체적 윤리와 더불어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인간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적인 방식과 ‘다르게 살 수 있으며’, 다르게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이다. 이러한 권리 주장은 자본주의적 삶 속에서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그래서 행복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잠재적 저항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헤게모니적 실천 또는 민주주의의 급진화

    헤게모니전략은 잠재적 저항이 조직화된 저항으로 전화되도록 하는 지적인 지도력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명박 정부에 의해 조성된 특정한 정치지형에 개입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 지적된 신자유주의적 일상으로부터 발생하는 맹아적 저항을 민주주의, 인권, 공공성, 사회정의 등의 가장 보편적 원리조차 흔들리는 구체적 정세의 계기들과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반신자유주의전선론의 경제환원론을 넘어 실질적인 헤게모니전략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다. 이것을 급진적 민주주의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급진적 민주주의 전략은 일상의 저항과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결합시킬 수 있는 유효한 계기일 수 있다. 민주주의란 형식과 절차가 아니라 적대적 투쟁을 통한 기존 체제의 변화과정의 계기를 제공해준다.

    급진적 민주주의 전략의 유효성

    그 변화란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이 스스로의 필요를 표현하고 각 집단 사이 서로 다른 필요의 정의와 요구에 대해 합리적으로 토론하며, 비록 잠정적지만 합의에 이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제들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민의 힘으로 국가를 민주화하고 시장을 사회적으로 관리하는 체제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국민은 확장된 민주주의를 강제하고(시민사회의 활성화), 그것에 따라 국가는 국민의 참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재편되며(국가의 민주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시장을 사회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시장의 사회화).

       
      ▲ 필자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대항헤게모니 전략이며 이것은 미리 주어진 규범적 당위나 초월적 원리가 아닌 대중의 삶에 존재하는 모순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이 전개되는 구체적 공간이 바로 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조성된 ‘08년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체제논쟁은 지금-여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시민사회의 활성화’, ‘국가의 민주화’, ‘시장의 사회화’의 형태를 포착해야 한다. 그것은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사회구조가 정세적 효과들과 결합함으로서 형성된 조건 속에서 사람들의 불만과 욕구가 어떻게 왜곡되고 좌절되는지, 그리고 그 좌절의 장소에서 출현하는 맹아적 저항의 내용과 형식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론적 통찰이어야 한다. 손호철의 “사회학적 서술주의와 추상성의 혼돈을 넘어서”가 이러한 방향에서의 문제제기이기를 바란다.

    필자소개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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