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라톤, 서양의 공자
        2009년 09월 22일 11: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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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의 부분, 1510년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플라톤(platon, BC429~347)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집대성하여 체계화하고, 그의 관념론 철학을 더 진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로 유명한 화이트헤드(Whitehead)는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긴 각주”라고 했는데, 이러한 규정을 과장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정도로 플라톤의 사상이 서양철학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이는 서양철학에만 한정된 현상은 아닐 것이다. 동양철학 역시 수많은 사상적 분화 과정을 겪어왔지만 그 원류를 찾아 들어가면 필연적으로 공자, 장자와 만나게 된다. 철학의 발전 과정이라는 게 대체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철학이론을 점검하면서 보완하거나 극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사상은 철학체계의 패턴을 발전시키고 주석을 다는 과정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원류에 해당하는 철학은 그리 많지 않다. 플라톤은 바로 이러한 원류의 정점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이해하는 것은 서양철학의 절반을 이해한 것과 같을 정도로 중요하다. 물론 원류라는 말의 의미는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반대로 플라톤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상반된 관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이들의 철학적 관점과 체계에 대한 검토 과정에서 나타났다는 점에서 원류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라파엘로(Raffaello)의 <아테네 학당>을 보면 서양의 고대 철학을 풍요롭게 만든 수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라파엘로는 54명의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등이 등장하는 이 웅장한 벽화의 중앙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인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벽화는 바티칸 궁의 장식화만이 아니라 라파엘로의 그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화가의 상상에 기초하여 그려진 그림이지만 웅장한 규모,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생한 동작, 조화감 등이 보는 사람을 사로잡는다. 전체와 부분의 조화, 균형감각과 질서를 특징으로 하는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에 해당한다.

    이 그림에서 플라톤은 옆구리에 자신의 후기 대화편의 하나인 <티마이오스>(Timaeus)를 끼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화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습을 플라톤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자신의 주요 저서인 <윤리학>(Eticha)을 허벅지에 받치고 손가락으로 지상을 가리키고 있다.

    플라톤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것은 아마도 플라톤 철학의 정수인 이데아론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을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상을 가리키는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해 비판하면서 현실 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면을 묘사하려는 의도를 보이는 것 같다.

    플라톤이 정신적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처음 만났을 때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62세였고, 플라톤은 20세였다고 한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행적을 보고, 가르침을 받은 기간은 약 8년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으로 구성된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독배를 들며 죽는 것을 보면서 그는 철학적 진리가 무지한 편견에 의하여 유린되는 정치적 현실에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왔던 충격을 잊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는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많은 학자와 교우하고 새로운 사상을 흡수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새로운 사상 편력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의 주요 내용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초기 대화편의 대표적인 것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등을 들 수 있다.

    플라톤의 저작은 30여 편의 대화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화편은 대부분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하여 역사상의 실제 인물이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 철학사에서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생각이고 어디부터가 플라톤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구분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대체로 초기 대화편에는 플라톤 자신의 생각보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룬 <파이돈> 이후의 후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의 생각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평생에 걸쳐 윤리와 올바른 행위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이성과 영혼의 독립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논리를 도출한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문제의식을 더 확장하고 체계화하여 윤리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형이상학과 정치이론, 교육이론의 체계를 확립한다.

    또한 그는 여러 차례 현실 정치를 통해 자신이 생각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두 번이나 시칠리아 섬을 방문하여 시라큐스의 왕인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하여 이상 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했으나 좌절되었다. 이후 플라톤은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렸으며 아카데미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 <아테네의 철학자 모임>, 로마시대 모자이크

    플라톤은 아테네에 일종의 학원인 아카데미(Academy)를 개설하고 각지에서 청년들을 모아 연구와 교육생활에 전념한다. 아카데미는 야외에 편히 앉아서 쉬면서 담소할 수 있는 공간을 갖춘 숲속에 있는 체육관을 의미한다. 이 학교는 청년들의 심신을 수양시켜 국정에 공헌할 인물을 배출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의 현관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 안에 들어오지 말라’라고 써 붙였다고 한다. 기하학적 사고방식, 즉 논리적인 사고가 모든 학문의 기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플라톤이 아카데미의 조직 및 학문의 발전에 몰두하던 시기는 그의 전성 시기로서 많은 역작들이 완성되었다. 이 시기 대화편의 대표적인 것으로 <국가>, <향연>, <시어티터스>, <파르메니데스> 등이 있다.

    로마시대의 모자이크 작품에 묘사되어 있는 <아테네의 철학자 모임>를 보면 당시 철학자들이 나무 그늘 아래서 활발한 토론을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중앙에 한 철학자가 책을 펼쳐들고 바닥의 흙에 나뭇가지로 무언가를 써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앞에 있는 철학자들이 턱에 손을 괴고 앉거나 혹은 선 채로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왼편으로는 또 다른 철학자들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모자이크 작품은 AD 79년 베수비오산의 폭발로 갑자기 파묻힌 2개의 도시, 즉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유적에서 발견된 것이다. 로마시대의 회화는 이 유적에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로 된 로마시대 회화양식은 헬레니즘시대의 회화를 반영하여 감각적·신비적·일상적인 주제가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로마인들의 그리스 세계 정복은 평소 그리스 미술에 절대적 동경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들에게 그리스의 미술을 단번에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의 우수한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로마인들은 국제적 성격을 띤 미술을 전파하게 된다. 오늘날 그리스 회화의 원작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폼페이에서 발견된 로마 회화는 그리스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데아론 – 감각적인 것에 대한 부정과 철학의 절대화·체계화

    플라톤은 단순히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글로 정리하는 작업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다. 그의 철학을 계승하되 몇몇 부분에서는 논리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아가는 작업을 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데아론과 철인통치론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파이돈>에서 문제의식이 나타나고 <국가>에서 체계적인 완성으로 나아간다. <파이돈>에서 영혼 불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이데아 이론의 단초를 마련한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이데아를 존재와 변화의 원인으로 제시한다.

    어떤 것이 뜨거워지는 것은 그것이 뜨거운 이데아에 관여할 때이다. 즉 그것에 뜨거움을 가져오는 불에 관여할 때이다. 불이 뜨거움을 가져온다면, 불은 뜨거움의 대립자인 차가움을 받아들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삶에 관여할 때, 즉 인간에게 삶을 가져다주는 영혼을 가질 때 살아있게 된다. 영혼이 삶을 가져오므로, 영혼은 삶의 대립자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따라서 영혼은 불멸한다는 것이다.

    이데아론은 인간의 감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물리적 사물들 외에 아음다움과 올바름 같은 형상(形相)들 즉 이데아가 존재하며, 최고의 단계로 선(the Good)의 형상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물리적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감각적 지식들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지성으로 파악한 이데아의 영역은 영원하고 불변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개의 이데아는 사물들의 특성을 결정하며, 사물들은 이 완전한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사물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플라톤은 자연을 ‘감각적 사물의 세계’라 불렀다. 그리고 플라톤 스스로 참된 실재로 불렀던 여러 이데아인 정신적 제 본질의 부동적이고 불변인 세계로부터 자연은 파생된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 관념론적인 이론에 의하면 감각적 사물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인 이데아와 감각적으로는 인식되나 결국은 가상에 불과한 것인 질료의 혼합물이라는 것이다. 즉 감각적 사물은 초자연적 이데아가 이데아의 수동적인 질료 속에 반영된 어두운 영상이다.

       
      ▲ 켄스타우트(Kenstout), <플라톤의 동굴> 2007

    이데아론을 나름대로 친절하게 정리한 것이 <국가>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이다. 이 동굴의 비유를 그대로 묘사한 그림이 캔스타우트의 <플라톤의 동굴>이다. 플라톤의 설명과 이 그림을 통해서 동굴의 비유를 이해해보자. 현실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의 생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동굴 속에는 등을 입구로 향하고 있어서 얼굴을 밝은 쪽으로 향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쇠고랑에 연결된 죄인들이 있다. 그림의 중앙 하단, 동굴의 벽과 벽 사이에 다리에 줄줄이 쇠고랑을 차고 앞 쪽의 동굴 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이 죄인들의 뒤쪽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도구를 갖고 있는 여행자들이 지나간다. 태양의 빛은 이들 도구를 비추고 그 그림자가 동굴 속의 벽에 비친다. 쇠고랑에 연결된 죄인들은 이들 그림자를 보는 것이 가능할 뿐이고 태양이나 여행자 등 동굴 밖의 것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플라톤은 “사람들이 인공적인 제작물들의 그림자들 이외의 다른 것을 진짜라 생각하는 일은 전혀 없을 걸세.”라고 단언한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이렇게 동굴 속의 그림자를 마치 진리인 것인 양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이것은 동굴 안을 의미하는 현실의 감각적인 세계가 그림자, 즉 가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리의 세계는 현실적인 감각적인 세계, 혹은 그림자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동굴 밖의 그 어떤 세계,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의 세계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동굴의 비유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플라톤은 그림자만 보던 사람이 실재, 즉 이데아를 보게 될 경우를 가정한다. 이 경우에 그 사람은 “전에는 그 그림자만 보았을 뿐인 실물들을 눈부심 때문에 볼 수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데아의 세계를 본 사람도 감각적인 세계, 그림자의 세계를 더 진실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익숙해짐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어두운 극장에 오래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왔을 때 빛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익숙해져서 해를 본 사람이 동굴로 돌아오게 되면 다시 어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동굴 벽의 그림자를 판별하는 데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에, “자기들을 풀어 주고서는 위로 인도해 가려고 꾀하는 자를, 자신들의 손으로 어떻게든 붙잡아서 죽일 수만 있다면, 그를 죽여 버리려”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가 아닌 모사물의 세계인 감각적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데아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오직 감각적인 세계를 벗어날 때뿐이다. 이데아의 인식과정은 육체나 감각기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성에 의한 것인데 철학자는 육체나 감각을 죽이지 않고서는 절대로 순수한 진리를 직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이데아를 찾는데 필요한 고통을 끝까지 감내할 수 있는 지극히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그래서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 말미에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한다.

    “인식할 수 있는 영역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각고 끝에 보게 되는 것이 ‘좋음(善)의 이데아’이네. 그러나 일단 이를 본 다음에는, 이것이 모든 것에 있어서 모든 옳고 아름다운 것의 원인이라고, 또한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는 빛과 이 빛의 주인을 낳고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영역’에서도 스스로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또 장차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슬기롭게 행하고자 하는 자는 이 이데아를 보아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려야만 하네.”

    이렇듯 플라톤 사상은 감각적인 것과 지성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는 데서 출발한다. 감각적인 것이란 우리가 흔히 오감이라고 부르는 감각과 그 감각의 대상들인 물질적인 사물을 의미한다. 이데아는 오직 지성적인 접근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이데아가 감각적인 대상이 아니라고 해서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동굴 안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동굴 밖의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듯이 말이다.

    다만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이데아의 실재성은 일종의 관념적인 것이 된다. 예를 들어 2*2=4라는 명제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것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개별의 사람들을 감각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물이라고 한다면 플라톤은 이러한 개별성, 특수성을 넘어선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이데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책상을 책상이게 만들어주는 책상의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데아는 객관적으로 실재할 뿐만 아니라,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감각보다 더욱 실재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 관념적인 현실이 다른 어떠한 현실보다 강하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세계는 언젠가는 지나가 버리고 말 것이지만 이 명제들은 언제까지라도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데아의 세계만이 참된 세계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존재와 무의 한복판에 서 있는 모상(模像)이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유물론과 감각적인 경험론에 대한 반대자라 할 수 있다. 즉, 유물론이나 감각적인 경험론은 사물의 인식에서 감각을 통해 구체적 사물의 인식이 가능하다고 보는 반면에 플라톤은 감각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에 해당하는 이데아를 떠올리게 하는 역할뿐이라고 보고 있다.

    이데아의 실재를 주장하는 논리 때문에 플라톤을 피안의 세계라는 종교적 관념과 연결시키는 견해도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고대의 신학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 자체로 진리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며 단지 이데아의 세계를 상기하는 것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결국은 이성의 영역을 넘어 신학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정하게 이데아론에 대한 오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데아를 신비로운 것, 그러한 의미에서 종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중에 중세 기독교에 의해 신학적으로 각색된 이데아와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오해에 해당한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과거에서 이어져 내려오던 사고의 흐름을 두 가지 측면에서 넘어서고자 했던 철학자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신화나 주술적인 요소에 근거하는 신비주의로부터 벗어나서 인간 정신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의 대상을 자연의 원리 파악에서 인간 내면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했을 때, 플라톤이 보기에 그러한 만물은 바로 감각적인 세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감각적인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에 진리의 영역일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강조했듯이 진리는 부동적이고 불변의 것이어야 했다. 당연히 불변의 것은 감각적 대상을 넘어서는 인간 내적인 정신의 영역, 영혼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결국 플라톤이 이데아를 통해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는 사고였고 이를 극단으로까지 전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유를 추상적이거나 현실을 초월하려는 사유로 보는 것은 단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그 기준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데아라는 구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철학의 체계화와 관련이 깊다.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까지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완성된 철학체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개별적인 것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것들의 체계를 구성해야 했다. 일종의 철학적인 피라미드 체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가 <국가>에서 “많은 아름다운 것이 아닌 아름다운 것 자체가, 또는 많은 각각의 것이 아닌 각각의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은 개별적인 것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보편적인 것 가운데에서도 수직적인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의 세계는 여러 이데아의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정점에는 신격화된 선(善), 덕(德)의 이데아가 위치하고 있었다.

    철인통치론 – 국가의 절대화와 민주정에 대한 비판

    이데아론과 함께 플라톤 철학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 철인통치론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그의 사상을 충실하게 담고 있는 <국가>에 집중적으로 담겨있다. 철인통치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사상은 그 사상이 만들어지게 된 사회적 상황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은 당시 아테네라는 폴리스의 상황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주로 활동하던 시대는 아테네의 전성기가 지나고 폴리스에 몰락의 기운이 팽배할 때였다. 당시에 스파르타와 아테네, 테베 같은 폴리스 사이의 세력 다툼이 극심했고 소크라테스도 참전한 바 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이 일어났다. BC 431∼404년 사이에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각 자기 편 동맹국들을 거느리고 싸운 이 전쟁이 플라톤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리스 항아리에 새겨진 부조인 <아테네 중장비보병>이나 스파르타의 조각인 <스파르타 중장비보병>은 당시 그리스 병사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포도주와 물을 섞는 항아리에 새겨졌던 부조인데, 당시 아테네 병사들의 모습을 마치 사진처럼 확인할 수 있다.

       
      ▲ 아테네 중장비보병(BC 5세기)와 스파르타 중장비보병(BC 480-470)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병사의 위용이 그대로 전해질 정도로 세부 묘사가 뛰어나다. 전쟁에 나아가는 모습인 것 같은데, 목에서 무릎까지 가릴 수 있는 둥근 모양의 커다란 방패를 들고 있다. 머리 위의 깃털 장식과 뺨을 가린, 그리스 병사들의 전형적인 투구를 쓰고 있고 상체와 정강이를 갑옷으로 보호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스파르타 중장비보병>은 두상과 상반신 몸통만이 남아 있지만 강인한 스파르타 병사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해주고 있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전쟁의 두 축이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상이한 정치체제를 대표하고 있었다. 아테네는 민주정치를, 스파르타는 과두정치(寡頭政治)를 각각 대표한 폴리스였다. 따라서 이 전쟁은 두 정치체제의 싸움이기도 했다. 또한 각 폴리스 내부에서도 두 정치체제의 선호를 놓고 갈등이 계속되었다.

    아테네 시민들의 자기 문화에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플라톤 역시 사고의 중심에는 아테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플라톤의 관심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아테네의 입장에서 아테네를 잘 살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의 패배는 아테네 시민들은 물론이고 플라톤에게 깊은 충격과 회의를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 하면 아테네를 다시 가장 강하고 영원히 안정적인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폴리스로 만들 것인가에 있었다. <국가>는 그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먼저 국가를 절대화하는 작업을 한다. 그의 관점에서 국가는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존재였다. 그는 “내가 생각하기로는 나라가 생기는 것은 우리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일세.”라고 단언한다. 이러한 이유 말고는 나라를 수립시키는 기원으로서 다른 무엇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나라를 수립시키는 것은 우리의 ‘필요’가 하는 일”이었다. 그 필요 중에서도 “첫째이며 가장 중대한 것은 생존을 위한 음식물의 마련”이었고, “둘째 것은 주거의 마련일 것이며, 셋째 것은 의복 및 그와 같은 유의 것들의 마련”이었다.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의식주가 국가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는 논리이다. 개인으로서의 인간들은 국가 없이는 스스로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국가는 절대적인 요소가 된다.

    이어서 그는 “바로 이런 경위로 해서, 즉 한 사람이 한 가지 필요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고, 또 다른 필요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는 식으로 하는데, 사람들에겐 많은 것이 필요하니까, 많은 사람이 동반자 및 협력자들로서 한 거주지에 모이게 되었고, 이 ‘공동 생활체’에다 우리가 ‘국가’(polis)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네.”라고 한다.

    국가의 수립이 어떠한 외적인 요소에 의해 강제로 이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없는 인간이 내적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모여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국가는 절대적인 존재로 규정된다.

    다음으로 국가가 어떤 정체에 의해 운영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넘어간다. 그가 보기에 스파르타에 패할 정도로 아테네가 허약해진 일차적인 원인은 민주정에 있었다. 그리고 민주정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구성원들이 각자 자신의 직분에 맞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고 모두가 정치에 대한 권리를 갖는 데 있었다.

    그로 인해 일사불란한 국가 운영이 파괴됨으로써 국가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국가>의 화두는 올바름이란 무엇인가이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올바름은 전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부분들이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고 다른 부분의 기능에 간섭하지 않을 때 이루어지는 조화이다.

    “각각의 것이 더 많이, 더 훌륭하게, 그리고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 적기에 하되,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한가로이 대할 때” 가능하다고 한다. 개인과 공동체의 올바름은 그의 혼을 이루는 세 부분, 즉 이성·욕구·기개 등이 저마다 제 기능을 수행할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부분은 세 부류의 계층으로 연결된다. 즉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자, 욕구와 충족을 바라는 생산자, 용기와 의지가 생명인 군인으로 구분된다. 지혜·절제·용기 등은 그들에게서 각기 중요한 덕목이 된다. 그리고 올바른 국가는 “그 안에 있는 세 부류가 저마다 ‘제 일을 함’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다.

    반대로 올바르지 못함은 이 세 부류가 섞일 때 나타난다. “이들 세 부분간의 일종의 내분이며, 참견과 간섭, 그리고 혼 전체에 대한 어떤 일부의 모반임에 틀림없지 않겠는가? 이는 자신이 지배함에는 적합하지 아니하되, 오히려 지배할 부류의 것인 것에 복종하는 것이 그 성향상 어울릴, 그러한 것이 혼에 있어서 지배하려 드는 것일 테고. 이런 등속의 것들이, 그리고 이들 세 부분의 혼란과 방황이 올바르지 못함이며 무절제요, 비겁이며 무지라고, 요컨대 일체의 악덕이라고 우리가 주장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네.”

    국가에 있어서 이렇게 서로에게 맡겨진 일에만 충실한 것을 올바름으로 규정함으로써 지배와 피지배는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면 누가 지배, 통치를 해야 하는가? 먼저 개인에게 있어서 이성·욕구·기개의 세 가지 요소 중에 무엇이 우선하는가? 앞에서 살펴본 이데아론에 근거하여 볼 때 당연히 이 가운데 선의 이데아에 접근할 수 있는 이성만이 유일한 권한을 갖는다.

    국가의 차원에서는 이성을 대표하는, 선의 이데아를 통찰할 수 있는 철학자가 지배의 배타적인 권한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데아론과 철인통치론은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에 의해 공동체가 지배될 때 비로소 올바름이 실현되고 조화가 달성된다. 그러므로 시민 모두가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정은 국가에 있어서 올바르지 못한, 조화를 깨뜨리는 주범이 되어버린다.

       
      ▲ <그리스 철학자 두상> BC 2~3세기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의 모습은 두상의 형태로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그나마 로마시대의 복제된 조각상의 일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맨 왼쪽부터 보면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견유학파의 시조에 해당하는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스토아 철학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크리시포스(Chrysippos), 에피쿠로스학파의 시조에 해당하는 에피쿠로스(Epicurus)의 두상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플라톤의 철인통치론은 단순히 철학자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국가를 의미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이 모여 국가의 운영에 필요한 것을 의논하고 합의하여 결정하면 되는가? 플라톤에게 있어 철학자의 통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단결의 문제이다.

    그는 “나라를 갈라놓아 하나 아닌 여럿으로 만드는 것보다 나라를 위해 더 나쁜 일이 무엇이라 우리들이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반대로 나라를 단결시켜 하나로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바로 “한 사람에 가장 가까운 상태에 있는 나라”가 가장 바람직하고 올바른 상태라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총괄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철학자들이 그들의 나라들에 있어서 군주들로 되거나 아니면 현재 군주 또는 지배자로 불리는 이들이 참으로 그리고 충분히 지식 또는 지혜를 사랑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권력과 철학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당하게 되지 않는 한,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네.”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에둘러 표현하고 있지만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에서 온갖 악덕의 원인 역할을 하고 있는 민주정을 폐기하고 “한 사람에 가장 가까운 상태”에 있는 집중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플라톤이 스파르트의 정치체계를 아테네에 그대로 복제하자고 주장한 것은 전혀 아니다.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는 형식은 유사할지 모르나 중요한 차이는 과두정의 주체가 철학자여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철학은 올바름, 즉 윤리의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에 의한 일사불란한 통치체제는 단순히 군사적으로 강하거나 부유한 국가가 아니라 윤리정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철인통치론은 귀족정치와도 분명한 구분을 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계층의 구별은 출신이나 부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제공한 교육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시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영혼에서 어느 부분이 더 우세한가에 따라 그가 속할 계층이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철인통치론은 선동에 의해 국가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참주제나 귀족적인 과두정치와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의 미학 – 절대적·정신적 아름다움과 조화·균형의 추구

    이데아론으로 대표되는 플라톤의 인식론은 정치철학으로, 더 나아가서는 미학으로까지 연결된다. 현실의 감각적인 세계는 가짜이고 본질은 별도로 실재하는 이데아에 속한다는 그의 주장은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은 가짜이고 아름다움 그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미 플라톤 이전에 아름다움에 대해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 사이의 대립이 있었다. 아름다움을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소피스트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는,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의미하는 프로타고라스의 명제는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에도 적용된다. 그들은 아름다움은 눈과 귀의 즐거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눈과 귀는 인간에 속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관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미학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소피스트와는 반대로 절대론적 미학을 전개한 대표적인 경우가 피타고라스학파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아름다움은 비례, 질서, 조화에 달려있다는 수학적 이론을 펼쳤다. 만물의 근원이 숫자라고 생각한 피타고라스는 현실의 경계를 정하고 질서를 부여하며,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규칙을 숫자에서 찾았다.

    이들에 의하면 만물은 질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존재의 조건인 동시에 아름다움의 조건인 수학적 법칙의 구현이기 때문에 질서 있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에 의한 완벽한 질서를 아름다움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피타고라스학파는 절대주의적인 미학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비례가 잘 맞는 것은 아름답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황금비율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8등신 미인이라는 말도 한다. 아름다움과 비례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은 피타고라스학파에 의해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고대 그리스의 건축과 조각은 수학적인 비례에 충실하고자 했다. 수에 의한 비례는 그리스 예술에서 아름다움의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스 신전의 크기, 기둥들 간의 간격을 규정하거나 건물의 여러 면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비율은 수학적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인체를 묘사한 조각상들도 이상적인 인간의 아름다움을 찾아냈고, 철저하게 균현과 비례에 충실하고자 했다.

       
      ▲ <밀로의 비너스> BC 2~1세기

    그리스 여성미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밀로의 비너스>(Vinus of Milo)는 이를 잘 보여준다. 기원전 2세기경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으로 알려진 이 상은 그리스인의 예술적 표현이 도달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한쪽 다리를 구부려 살짝 기울어진 몸의 균형을 잡고 있다. 유연하게 휘어 곡선을 이루고 있는 몸의 윤곽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또한 의복의 주름이 미끄러질 듯 내려오면서 다리의 아름다운 선을 절묘하게 묘사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 조각상은 전체적인 표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당시 그리스 미학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던 비례에도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비율로 인식되었던 ‘1:1.618’의 황금비가 적용되어 있다.

    이 비너스상에는 여러 부분에 황금비가 담겨 있다. 배꼽을 기준으로 상반신과 하반신이 이 비율에 해당한다. 상반신만 놓고 보면 머리끝에서 목까지와, 목에서 배꼽까지의 길이의 비율, 또한 하반신에서는 발끝부터 무릎까지와 무릎부터 배꼽까지 길이의 비율이 여기에 해당한다.

    비례에 의한 질서와 조화를 추구한 피타고라스학파의 생각은 플라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은 미와 척도의 관계에 대해서 선한 것은 모두 아름다우며 아름다운 것은 비례를 결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사물의 아름다움은 사물의 모습 그 자체로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사물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척도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그의 기준에 의하면 이상적인 척도에 기초한 예술은 좋은 예술이고 인간의 감각이나 감정에 의지하는 예술은 바쁜 예술이 된다. 하지만 플라톤은 형식적인 척도, 질서, 비례만이 아니라 내용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피타고라스학파와는 구분된다.

    플라톤은 모든 미적 대상은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일정하게 포함하고 있음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성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물과 감각을 초월한 절대적인 미의 원리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아름다움은 우선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둘째로 이 아름다움은 부분적으로는 아름답고 부분적으로는 추한 것도 아니고, 또한 그것을 보는 사람에 따라 여기서는 아름다우나 저기서는 추한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아름다움은 얼굴이나 손이나 그 밖의 다른 육체적인 것의 아름다움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사상이나 학문의 아름다움으로 나타나지도 않으며, 그 자체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움으로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이 아름다움은 절대적이고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고 독특하며 영원하고 모든 다른 아름다운 것은 이 아름다움을 분유(分有)하고 있지만, 이 아름다운 것들이 생멸(生滅)하더라도 이 아름다움에는 결코 증감이 없고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름다운 사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아름다움, 즉 아름다움 그 자체가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현실의 사물은 아름다움의 일부만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현실의 아름다운 사물은 생성되고 사멸하는 과정 속에 있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는 어떠한 변화의 과정도 없는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아름다움의 이데아인 것이다. 아름다움의 이데아는 아름다운 사물들에 공통된, 그것 없이는 아름다울 수가 없는 본질적인 속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감각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이데아론이 그러하듯이 오직 정신에 의해서,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플라톤은 눈과 귀에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주장한 소피스트에 반대하였다.

    아름다움은 그들이 주장하듯이 청각과 시각이라는 감각을 통해 우리가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신의 영역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단지 사물의 형식적인 영역에, 눈과 귀를 위한 아름다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혜, 덕, 고귀한 행위, 올바른 법률까지 포함되는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순수하고 혼합된 것이 없는 절대적 아름다움 자체를 본 사람, 인간의 살과 색깔과 보잘것없는 폐물에 의해 더렵혀진 아름다움 대신에 홀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신적인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의 지복(至福)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적절한 능력을 갖고 절대적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절대적 아름다움과 일체가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의 생활을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절대적 아름다움을 보는 곳에서만 진리의 반영이 아니라 진리 자체와 접촉하기 때문에, 선의 영상(映像)이 아니라 참된 선을 알게 되리라는 것을 당신을 모릅니까? 그리고 참된 선을 알고 그러한 덕을 쌓았기 때문에, 그는 신의 사랑을 받고, 만일 인간이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영생할 특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에게 회화나 조각은 그리 찬양할 만한 좋은 예술은 아니었다. 회화나 조각은 이데아의 모방에 해당하는 ‘실제’를 한 번 더 모방한 것에 불과하므로 이데아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저차적인 것에 해당했다.

    특히 그가 만들고자 했던 국가는 철학자에 의한 국가, 즉 철학의 나라였는데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연극이나 공연을 너무 좋아해 철학에 신경 쓰는 것을 방해받고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래서 플라톤이 그린 미래의 이상 국가에서 예술가는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한다. 예술가는 경험적 현실의 세계나 감각적인 인상, 즉 완전한 가상 내지 부분적인 진리에만 집착하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예술가들이 순수한 정신의 세계인 이데아를 저속하게 만들고 왜곡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아름다움은 단순히 형식적인 것을 넘어서는 내용적인 것이기도 하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절대적인 진리이자 선(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선과 미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이고 최고의 이데아로서 존재한다.

    그에게 미학의 문제는 진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의 문제였고 윤리의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에게 있어 아름다움의 개념은 이상주의, 정신주의, 도덕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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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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