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범 사태와 위선이 지배하는 사회
    2009년 09월 21일 09: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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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소장파 가수 재범의 발언과 탈락, 출국 등이 문제가 되면서, 제게 자주 기억이 나는 것은 최근에 읽은 이혜경 교수의 『량치차오: 문명과 유학에 얽힌 애증의 서사』 라는 신간입니다.()

량치차오(양계초)라는, 한 때에 안중근과 신채호, 안창호의 아이돌이었던 청말 민초 논객에 대해서 저도 몇 편의 글을 쓴 게 있기에 그 관련의 저서라면 다 꼭 읽는데, 또 특히 이혜경 교수가 유교로 돌아온 1920년대의 량치차오, 즉 제가 비교적으로 덜 공부한 그의 말년에 초점을 두었기에 아주 재미있게 봤어요.

유교문화와 법

거기에서 유교의 예치 논리를 논하면서 이혜경 교수는 아주 중요한 발언을 하나 했습니다. 유교에서 ‘법’보다 더 중요한 것, 공공영역의 중심이 되는 것은 ‘도덕’, ‘예의’, ‘염치’이기에 유교 문화권에서 ‘향원'(鄕愿), 즉 위선자들이 판을 치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상당 부분 사회가 강압적으로 강요하는 윤리적 규범들이고 거기에다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뜯어맞출 수 있는 ‘교과서적 인간’들은 그래도 소수일 수밖에 없으니까 (인간의 사회에서는 광신도의 수가 늘 제한돼 있는 게, 인류 멸망을 방지하려는 신의 섭리가 아닌가 싶어요….) 나머지는 일단 실제 이상의 ‘도덕성’을 과시해야 이런 사회에서 생존이 가능합니다. 싫든 좋든 ‘도덕군자’인 척하는 것이지요.

없는 ‘자기 과오’까지 만들어서 자아비판을 열심히 하는 이북의 ‘생활 총화’를 보시면 이러한 ‘향원 문화’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북의 정치, 생활 문화란 거의 ‘근대판 유교적 왕정’의 완성형에 가까운 부분들은 꽤 많습니다. 그런데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남한 사회에서도 그러한 요소들은 쉽게 감지됩니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재범’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생활 총화’는 없지만 ‘정답 문화’라는 게 있어요. 공인의 입장이 되면 일단 "백성 교화 의무가 있다"는 유교적 무의식이 있기에 ‘국시’라 할까, 일종의 (어용적) ‘사회적 합의 사항’을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북한의 ‘생활총와’와 남한의 ‘정답문화’

따르지 않으면 물의를 일으키고 졸지에 ‘문제적 인간’, 좋게는 기인, 나쁘게는 기피 인물이 되기에 일단 따르는 게 보신상 유리합니다. 예컨대 대한민국 거물 정치인들을 보시지요. 애독 도서를 물으면 상당수의 ‘정답’은 <백범일지>입니다.

과거에 낙방하고 동학도라는 반란자 집단에 합류한 사생의 결단을 한 백범과 달리 이들은 도심에서 얌전하게 살았으며 그 어떤 모험도 겪은 적이 없는, 모범적 중산층 생활을 살아온 것이지요. 온갖 ‘과거’에 다 붙었고요.

그런데도 그들에게 내려진 ‘모범 답안’은 바로 ‘백범에 대한 존숭의 념’입니다. 이유는? 총독부와 미군정의 통치기구를 인수한, 이렇다 할만한 민족주의적 명분이 없는 남한의 우파가 그 명분을 만들기 위해 1960년대 이후로는 ‘임시 정부 법통설’을 열심히 주장하고 특히 우파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적극적 투쟁을 해온 백범을 기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본인의 생각이 무엇이든간에 무조건 ‘모범 답안’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향원 문화에서의 공인으로서의 생존 방략 또 하나, "남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입니다. 즉, 말을 ‘둥글게 둥글게’ 하고 그 누구에게도 항의를 일으킬 수 있는 부분을 적극 기피해야 합니다.

예컨대 최근 언론에서 인도네시아의 한 종족이 한글을 쓴다고 난리입니다. 그 종족(의 수장)들에게 대한민국(내지 그 대표자, 또한 대표자로 행세한 이들)이 과연 무엇을 제시했기에 이렇게 된 것인지, "한글을 쓰는 인구가 늘었다"는 쾌재를 부르는 언론들의 아류 제국주의적 심리의 심층적 구조가 어떤지 열심히 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무궁무진한데 국내의 ‘진보’ 언론들도 이 주제에 대해서 비판을 잘 안 하지요.

민족주의와 진보언론의 한계

적을 왜 만듭니까? 더군다나 ‘국위선양’과 직결된, 다수의 민족주의적인 긍지 심리 내지 제국주의적 욕망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라면 더욱더 몸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문화에서는 강준만 선생 식의 ‘실명 비판’은 결국 고립된 하나의 ‘문화적 실험’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었어요. 요즘 강준만 선생 본인도 ‘실명 비판’을 거의 그만 두신 것 같은데, 그러한 결말은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향원 문화에서는 그러한 실험은 원칙상 지속되지 못합니다.

그러한 문화에서는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바로 자신의 ‘일탈적 욕망’의 노출입니다. 다수가 공유하는 욕망이라 해도 그렇지요. 물론 사석에서야 ‘선진화 시대의 위대하신 수령님’처럼 ‘마사지 걸’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좋습니다. 오히려 늘어놓을 수록 ‘진짜 싸나이’ 대접 받지요.

공석은 재미 없을수록 사석은 재미 있는 법, 이북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공석은 다릅니다. 고대 법학부의 모 선생처럼 공석에서 미국 국적 취득시 한국에서의 병역을 치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었다는 언급을 하면 곧바로 <조선일보>라는 독수리의 날쎈 부리에 물리고 맙니다.

확신컨대 <조선일보>의 애독자가 많은 남한의 지배계급 중에서는 그렇게 해서 자신의 남자 아이의 인생을 편안하게 만든 이들은 꽤 많습니다. 아, 참, 지금 권석에 앉으시려는 영의정 영감을 보시면 상국으로의 유학과 병역 사이의 재미있는 상관 관계에 대해 약간 알아볼 수도 있고요…

그러나 어쨌든 행동을 어떻게 해도 말을 얌전하게, ‘공인답게’ 해야 합니다. ‘혼네'(本音. 속마음이라는 뜻의 일본어-편집자)를 잘못 노출시키면 당장 뭇매를 맞지요. 혼네가 똑같은 인간들에게 말입니다. 우습지 않아요? 그런데 그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재범 사태와 위선적 사회

이 사회에서 한 소장파의 대중 문화 아이돌의 ‘공인답지 못한’ 사석 발언이 (불법적으로, 인권 침해적으로) 공개돼 그에 대한 ‘인민 재판’과 추방의 근거가 됐습니다. 소련 시대 같았으면 그럴 때에 "우리 집단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하곤 했지요.

공산당 간부의 위치가 높을수록 외제 물건에 대한 탐심은 더 심했지만 특히 소련 망하기 전, 1980년대 초반의 신문들을 보면 주요 논의 테마는 ‘우리 나라의 고유한 영성'(dukhovnost)이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정신문화와 저 서방의 저급한 물질 문화의 대조법… 참, 거기에서도 기록적으로 위선적인 사회이었던 것이지요.

소련 사람과 한국인의 공통점 하나는, 유난히 안좋은 일 – 관료주의 등등 – 을 당할 때에 "우리 나라답다"와 같은 표현을 사석에서 잘 쓰는 것입니다. 주변부에서 사는 이의 열등감이 몸에 밴 것이지요. 그 ‘정신 문화/영성’에 대한 모든 정신병적인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화자찬을 하면 할수록 콤플렉스가 더 심해집니다. 그게 거짓이라는 걸 속으로 아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사석에서 그렇게 해도 괜찮은데, ‘남’, 특히 제국 내지의 시민권을 운좋게 얻은 과거 ‘우리’ 구성원이 그렇게 하면 무조건 때려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서로의 면목이 서고, 자존심이 세워지고 군기가 잡힙니다. 그리고 – 옛날 소련 표현대로 – "우리 위대한 영적 문화의 창달의 위업을 계승, 발전"할 수 있게 되고 좋지요. 도덕 공화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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