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정원 사찰’ 구체적 의혹, 침묵한 언론
        2009년 09월 18일 09: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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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인 박원순 변호사는 유연함이 강점이다. 진보성향의 시민사회 인사로 알려졌지만, 진보는 물론 보수 성향 인사들과의 친분도 두텁다. 한때 이명박 대통령의 유력한 대항마로 거론될 만큼 정치적으로도 주목받는 인물이다.

    박원순 변호사가 국가정보원 사찰 의혹을 제기했다. 현 정권의 핵심 권력기관과 각을 세우는 일은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박원순 변호사 기자회견에 수많은 언론이 취재에 나선 것은 의혹이 지닌 여파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은 ‘대한민국’ 명의로 박원순 변호사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핵심은 두 가지다.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할 수 있는지와 박원순 변호사가 밝힌 국정원 사찰의 실체이다.

    다음은 18일자 주요 아침신문 1면 머리기사이다.

    경향신문 <박원순, 사찰 의혹 15건 공개>
    국민일보 <‘여성 공무원 관리’ 보고서 행안부, 입맛대로 바꿨다>
    동아일보 <입학사정관 선발 신입생 4명 중 3명 일반고 출신>
    서울신문 <한은법 개정 충돌 양상>
    세계일보 <신용 나쁜 저소득 25만 가구 대상 10년간 2조원 무담보 소액 대출>
    조선일보 <‘서민 은행’ 문연다>
    중앙일보 <이들에겐 ‘기부 DNA’가 있다>
    한겨레 <민자사업 손실, 세금으로 1조5천억 메웠다>
    한국일보 <한은법 윤-이 충돌>

    박원순 변호사의 국정원 사찰 의혹은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언론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박원순 변호사가 제기한 의혹의 실체를 파헤치는 것은 언론의 몫이다. 사실로 드러난다면 ‘검은 그림자’를 세상에 알리는 특종이 될 수도 있다.

    언론 생리상 구미가 당길 수 있는 현안이지만, 언론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경향신문 한겨레 한국일보 중앙일보 세계일보 동아일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조선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의 공통점은 또 무엇일까.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은 기사의 비중은 달라지만 박원순 변호사의 의혹제기를 기사로 다룬 신문이고, 조선일보 서울신문 등은 기사를 내보내지 않은 신문이다. 박원순 변호사의 주장은 기사로 내보낼 필요가 없는 얘기가 안 되는 사안일까.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를 보자.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 국정원 사찰 의혹 보도

       
      ▲ 경향신문 9월18일자 1면.  
     

    경향신문은 18일자 1면 <박원순, 사찰 의혹 15건 공개>라는 머리기사에서 "국가정보원으로부터 2억원의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박원순 변호사가 자신과 시민단체를 향한 국정원의 사찰과 압력 사례를 공개했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박 변호사는 17일 서울 평창동 희망제작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이유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고, 세계적으로도 선례가 없을 것’이라며 ‘이는 국민의 비판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시도’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이 전한 박원순 변호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박 이사는 불법 사찰 사례로 ‘지난 4월 아름다운가게가 모 대학에 매장을 개설할 때 국정원 직원이 그 대학 총무과로 찾아와 좌파단체들의 자금줄이며 운동권 출신 직원들이 다수인 아름다운가게를 후원한 사유가 무엇이냐고 문의했다’고 말했다.

    또 지난 6월에는 국정원 직원이라 밝힌 한 인물이 아름다운가게를 지원한 은행에 전화해 ‘아름다운가게와 무슨 관계에 있기에 많은 돈을 지원했느냐’고 물었으며, 지난 5월 경기지역 자선바자회 때는 행사 관련자가 ‘아름다운가게의 행사를 하지 말라’는 국정원 측의 전화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어 어느 시민단체의 평생회원인 기업의 임직원이 국정원으로부터 ‘어떻게 시민단체의 회원이 될 수 있느냐’는 압력을 받고 평생회원 신분을 정리한 사례, 여성민우회에 후원을 약속했던 중소기업에서 ‘불법시위를 하는 단체라는 명단이 와서 지원을 못하게 되었다’며 후원을 취소한 사례 등을 공개했다.”

    박원순 변호사 "국정원 사찰행위, 정권 끝나면 심판 받을 것"

       
      ▲ 경향신문 9월18일자 3면.  
     

    경향신문은 3면에 박원순 변호사가 밝힌 문서내용을 요약해서 실었다.

    “2007년 7월 하나은행과 희망제작소는 기자회견을 열고 ‘하나희망재단’ 설립을 발표했다. 하나은행이 300억원을 출연했다. 재단은 지난해 가을 설립 등기를 완료했다. 그러나 며칠 뒤 재단 이사회는 희망제작소와의 사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한 두 달 후 하나은행의 한 임원으로부터 ‘국정원 직원들이 이 사업에 개입을 하여 희망제작소와의 협력관계가 중단됐다’는 얘기를 들었다…국정원의 최고 책임자인 국정원장과 나아가 대통령이 이런 일을 모를리 없다. 이렇게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사찰과 감시가 일어나고 있다면 이것은 국정원을 운영하고 집행하는 책임자의 철학과 원칙, 기능과 활동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국정원장과 대통령의 지휘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박원순 변호사는 17일 기자회견에서 “대선이 끝나고 촛불시위가 일어나고 그리고 언젠가부터 세상이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까 완전히 20~30년 전 세상으로 돌아와 있었다”면서 “국정원의 비열한 사찰행위와 그 은폐는 이 정권이 끝나면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다. 그것이 인과응보이고 역사의 필연의 법칙”이라고 주장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온건한 인물이다. 격한 언어보다는 합리적 언어를 즐겨 사용하는 인물이다. 그런 박원순 변호사가 직설화법을 통해 권력과 각을 세운 것은 이례적인 모습이다. 박원순 변호사가 제기한 의혹을 가장 비중있게 내보낸 신문은 경향신문이다.

    한겨레 1면에 박원순 변호사 사진 실어

       
      ▲ 한겨레 9월18일자 1면.  
     

    한겨레도 1면에 <‘대한민국’이 준 눈물>이라는 제목의 사진 기사를 실었다. 대한민국으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박원순 변호사가 17일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보인 사진을 기사로 내보냈다.

    한겨레는 10면 <‘피고’ 박원순 이사가 밝힌 또다른 국정원 사찰>이라는 기사에서 “박 이사는 17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희망제작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대한민국 최고 권력기관 가운데 하나인 국가정보원을 상대로 허위 진술을 할 수 있겠느냐’며 ‘국정원이 민간인을 사찰한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한국일보도 기사와 사설을 싣는 등 이번 사안을 비중 있게 다뤘다. 한국일보는 14면 <박원순 "국정원 상대 허위주장 하겠나">라는 기사에서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된 박원순 변호사(희망제작소 상임이사·사진)가 17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공개 반박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한국일보 "박원순 ‘국정원 상대 허위주장 하겠나’"

    한국일보는 “국정원은 지난 14일 ‘박 변호사가 충분한 확인절차 없이 허위사실을 말해 국정원과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박 변호사는 지난 6월 위클리경향과의 인터뷰에서 ‘국정원이 시민단체와 관계 맺는 기업 임원까지 조사해 시민단체들이 재정적으로 힘겹다. 명백한 민간사찰’이라고 말한 바 있다. 국정원은 소송을 내면서 원고를 ‘국가’로 명시했다”고 설명했다. 

    중앙일보 동아일보 세계일보 등은 1단 또는 2단 기사로 지면 하단에 배치했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공방’에 무게를 둔 기사를 실었다. 중앙일보는 31면 <국정원-박원순 변호사 명예훼손 공방>이라는 기사에서 “시민단체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인 박원순 변호사가 17일 ‘국가가 주권자인 국민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은 선례가 없다’며 유감을 표명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도 16면 <국정원 ‘시민단체 사찰’ 발언 박원순 변호사 제소/박 변호사 "개입 확인…국가가 국민 고발하나">라는 기사에서 “박원순 변호사(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17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희망제작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가 국민을 고발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며 ‘이는 국민의 비판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한겨레 "국정원, 뒷골목 폭력배의 행패나 협박"

       
      ▲ 한겨레 9월18일자 사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기사 분량은 적었지만 박원순 변호사가 밝힌 국정원 사찰 의혹의 내용을 기사에 담았다. 1단 기사를 내보낸 세계일보는 8면에 <"국정원, 국민상대 손배소 국민비판 재갈 물리는 것">이라는 기사를 실었지만, 국정원 사찰 의혹의 구체적 내용은 담지 않았다.

    박원순 변호사가 제기한 의혹은 하나하나 따져볼 문제이다. 국정원이 군사정권 시절의 음흉한 ‘옛 향수’를 되살리고 있다면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국정원은 대한민국 이름으로 의혹을 제기한 당사자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이런 행동은 적절한 것일까.

    한겨레는 <‘국가를 참칭한 원세훈 국정원’, 부끄럽지도 않은가>라는 사설에서 “박 이사가 밝힌 국정원의 사찰 행태를 보면 ‘스토커’가 따로 없다”면서 “하나같이 비판세력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려는 짓이다. 뒷골목 폭력배의 행패나 협박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한국일보 "국정원, 웃음거리 되지 말고 소송 취하해야"

       
      ▲ 한국일보 9월18일자 사설.  
     

    한겨레는 “이번 소송이 얼마나 황당한지는, 보수 성향으로 알려진 법학자까지 ‘참 우스운 얘기’라고 힐난한데서도 잘 나타난다”면서 “원세훈 국정원장이 박 이사의 주장으로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데, 엉뚱하게 국가를 원고로 내세워 국고와 인력을 낭비하도록 한 것도 비겁해 보인다. 국정원은 더는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지 말고 지금이라도 소송을 취하하는 게 옳다”고 지적했다. 

    한국일보도 사설에서 국정원의 소 취하를 요구했다. 한국일보는 <국정원 자세 되돌아보게 한 손배소송>이라는 사설에서 “최근 정보기관들이 여론 동향 등 국내문제에 부쩍 관심을 갖고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얘기가 여러 곳에서 들리는 판국이다. 국정원 등은 행여 국가와 정권을 혼동해 오해를 살 만한 소지가 없도록 자세를 재차 가다듬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국일보는 “원칙을 벗어나는 행위는 도리어 정권의 명예와 명운을 위협하는 중대사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 박 변호사에 대한 소송은 국정원 입장에선 이겨도 져도 실익이 없다. 혹 억울한 측면이 있다 해도 대국적 차원에서 소를 취하하는 게 좋겠다”고 지적했다.

    한국일보는 중요한 얘기를 전했다. 원칙을 벗어나는 행위는 정권의 명예와 명운을 위협하는 중대 사태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다. 박원순 변호사가 제기한 의혹은 간단치 않은 사안이라는 의미이다. 정권의 명운을 위협하는 중대사태가 될 수도 있는 의혹의 실체는 한 번의 기자회견으로 넘어갈 성질의 사안이 아니다.

    조선일보 기자수첩 "청와대의 ‘신언론통제’"

       
      ▲ 조선일보 9월18일자 4면.  
     

    언론의 냉철한 잣대와 사실관계 확인으로 의문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조선일보 국민일보 서울신문이 박원순 변호사 기자회견에 대한 기사를 싣지 않은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안이 별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의도적 침묵인지는 알 길이 없다.

    권력은 감시와 견제가 느슨해질 때 오만과 독선에 빠지기 마련이다. 최근 지지율 상승으로 기운을 차린 청와대는 최근 언론통제 논란을 일으켰다. 조선일보는 4면 <‘취재봉쇄’ 비판했던 청와대의 ‘신언론통제’>라는 기자수첩을 통해 이 문제를 지적했다. 다음은 기자수첩의 내용이다.

    “16일 청와대 언론 브리핑룸이 있는 춘추관은 온종일 시끄러웠다. 청와대가 이날 오전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만남에 취재와 사진 등 출입기자단의 취재를 막은 게 발단이었다…청와대는 전속 사진사가 찍은 사진을 나중에 각 언론사에 배포했다. 대한민국 정치에 가장 영향력이 큰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 청와대 직원에게만 공개된 것이다.…이날 저녁 이 대통령과 시.도지사 만찬 행사도 언론에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 행사 후 하겠다던 대변인 브리핑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춘추관 안팎에선 ‘청와대가 원하는 기사.사진만 내보내도록 하겠다는 거냐’ ‘(대통령) 지지율 좀 올랐다고 해도 너무한다’는 얘기들이 나왔다.…자유민주주의 사회 유지의 기초인 ‘언론 자유’를 대하는 태도마저 ‘현실적 어려움’이나 ‘지지율 등락’에 따라 바뀌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조선일보가 기자수첩에서 지적한 내용은 청와대에 아프게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박원순 변호사의 의혹제기도 마찬가지 사안이다. 언론이 침묵하지 않고 의혹의 실체를 파헤치는 노력을 보일 때 권력은 부끄러운 과거로 돌아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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