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크라테스, ‘민주주의의 공적’
        2009년 09월 15일 04: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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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 조각, <뮤즈와 대화하는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 ─ 서양철학을 그의 이전과 이후로 나누게 만든 소크라테스

    서양 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Socrates, BC469~399)는 이전의 철학과 이후의 철학을 구분하는 분기점으로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만큼 이전의 철학과 구분되는 새로운 철학적 지평을 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소크라테스는 직접 글을 남기지 않았다. 평생을 거쳐 오직 대화를 통해 그리스 시민들에게 진리를 일깨우고자 했다. 소피스트가 그리스 시민과 만나는 방식이 교육을 위한 직접적인 가르침이었다면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소피스트는 대화의 테크닉을 가르치는 수사학적인 요소가 강했다면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자신의 진정한 영혼을 발견토록 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먼저 길에 보이는 사람에게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대화의 방식은 귀납적이어서 직접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본인이 스스로 깨닫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자신의 철학방법을 산파술이라고 불렀다. 산모의 출산을 돕듯이 본인이 스스로 깨닫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리스 조각 <뮤즈와 대화하는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즐겼던 소크라테스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겨 준 것은 플라톤이었다. 우리는 플라톤이 쓴 여러 대화편을 통해 소크라테스와 만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의 후기 저작으로 갈수록 플라톤의 생각이 많이 가미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과 같이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저작들의 주요 부분은 역사적으로도 소크라테스에 충실하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국가의 신(神)들을 믿지 않고, 청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혐의로 멜레토스에 의해 고발당한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행한 변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변론은 최초의 변론, 유죄선고 후의 변론, 사형선고 후의 변론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단지 법적인 의미에서의 변론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철학의 진수를 담고 있는 내용이라 할만하다. 이 책은 우리나라나 동양의 지식인들이 사서삼경을 필독서로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구의 지식인에게 일종의 필독서 역할을 했다.

       
      ▲ 그리스 조각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그들과의 대화를 문제 삼은 것인데, 그는 이 변론을 통하여 진정한 의미의 진리란 무엇이고 진정한 철학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진리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던 그의 정신이 무엇이었는가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성찰적인 이성과 양심이 사라진 시대,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자각을 두려워하는 시대에 이성과 양심과 자유에 대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게 한다.

    그러면 어떤 점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과 이후의 철학을 구분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신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탐구하는 애지자(愛智者)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나에게 명령한 때에 죽음의 공포나 또는 기타의 공포 때문에 나의 자리를 포기한다면, 나의 행위는 참으로 이상할 것입니다.”라고 강조한다. 그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탐구하는 애지자”라고 한 대목은 철학이란 무엇이며, 철학자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애지자’란 말 그대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러한 철학자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탐구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왜 그는 철학의 목적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는 것일까?

    소크라테스가 했던 가장 유명한 말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틀림없이 “너 자신을 알라”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왜 그토록 유명한 것일까? 언뜻 생각해보면 평범해 보이는 이 철학적 명제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과 이후의 철학을 구분 짓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명제가 그냥 무지를 질타하는 일반적인 의미에 불과하다면 좀 우스워진다.

    그러면 ‘공부해서 남주냐, 공부 좀 해’라고 항상 말씀하시는 부모님들도 소크라테스와 동기동창쯤 되어버린다. “너 자신을 알라”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중 하나로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바꾼,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너 자신’은 곧 인간을 의미한다. 이전의 서양철학은 대부분 자연철학이었다. 모든 만물의 근본이 물이라는 탈레스나 불이라는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철학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철학의 대상을 자연의 본질 탐구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르면서 자연탐구에 몰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그는 ‘올바름’이나 ‘덕’과 같이 인간 내면의 문제와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서 어떠한 원칙이 올바른 것인가를 탐구했다. 소크라테스에서 비로소 자신과 자기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내면)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이후 서양철학은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발전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서양철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의 부분, 1510년

    영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죽을 때 “내가 사랑한 것은 알키비아데스와 철학뿐이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스스로 철저한 애지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소크라테스는 수많은 청년들과의 철학적인 토론을 좋아했다.

    라파엘로(Raffaello)의 <아테네 학당>에는 토론에 열중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대머리에 들창코의 외모로 알려진 소크라테스가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다. 왼편에 투구를 쓰고 있는 청년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군인이며 정치가인 알키비아데스(Alcibiades)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강한 윤리관과 예리한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소크라테스 역시 알키비아데스의 준수한 외모와 지적인 소양에 매혹되었다.

    두 사람은 연인으로서의 사랑만이 아니라 철학적인 측면에서 오랜 기간 영혼의 교감을 이어갔다. 그 옆에 모자를 쓰고 경청하고 있는 인물이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역사 저술가인 크세노폰(Xenophon)이다. 그리고 그 옆에 녹색 옷을 입고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이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이다.

    하지만 토론을 좋아하는 것만으로 소크라테스를 영혼의 철학자로 부르는 것은 아니다. 토론이나 인간의 내면을 강조한 것은 이미 그에 앞서서 소피스트들이 주장하고 실천한 것이었다. 단지 자연이 아니라 내면을 철학의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러한 영혼의 내용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그 이전의 철학과 확연히 구분된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대한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그대들에게 ‘최대한의 돈과 명예와 명성을 쌓아 올리면서 지혜와 진리와 영혼의 최대의 향상은 거의 돌보지 않고 이러한 일은 전혀 고려하지도 주의하지도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라는 말을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논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천만에요, 나는 유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나는 곧 그와 헤어지거나 그를 도망가게 놓아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질문을 계속해서 그에게 캐묻고 시험하며 논파할 것이고, 만일 그가 덕이 없으면서도 덕을 가졌다고 주장할 뿐이라고 생각되면, 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과소평가하고 가치가 적은 것을 과대평가한다고 그를 비난할 것입니다.”

    “지혜와 진리와 영혼의 최대의 향상은 거의 돌보지 않고 이러한 일은 전혀 고려하지도 주의하지도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라는 질타는 언뜻 보면 지혜와 진리, 영혼을 강조하는, 그냥 당연하고 뻔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소크라테스 주장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바로 다음 문장을 보면 “내가 논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천만에요, 나는 유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그에게 캐묻고 논파하겠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게 무슨 뜻일까? 논쟁의 상대방이 자신도 지혜와 진리, 영혼의 향상을 위해 힘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논쟁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노력하고 있는데도 왜 비판을 할까? 논쟁의 상대방이 유의하고 있지 않으면서 유의하고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논의가 우스워진다. 적어도 상대방도 진지하다는 걸 전제로 하면 결국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지혜와 진리, 영혼 향상의 의미와 논쟁 상대방의 그것이 서로 다르다는 뜻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만일 그가 덕이 없으면서도 덕을 가졌다고 주장할 뿐이라고 생각되면”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덕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덕이 서로 다른 것이고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상대방의 덕은 진정한 덕일 수 없고 그러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라는 주장으로 봐야한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현실적 처방이 아니라 본질적 지식을 원했다. 때문에 그는 용기, 덕, 현명함, 정의 등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소크라테스는 변론에 앞서서 “나는 여러분보다는 신에게 복종할 것”임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여러분’이란 누굴까? 아테네 시민 중 추첨에 의해 구성된 500여명에 이르는 배심원단을 의미한다. 당시 아테네의 법정은 시민들로 구성된 일종의 ‘시민법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배심원의 판결이란 법과 제도가 갖는 권위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법의 권위보다 신에게 복종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당시 아테네의 일반 사람들은 보통 ‘사회적 계약’에 기초한 법과 도덕을 지혜와 진리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데 비해 소크라테스는 이를 넘어서는 정신적인 열망으로서의 도덕을 진정한 지혜와 영혼의 향상으로 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에게 “젊은이들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한다. 고발자는 국법, 재판을 맡은 배심원들, 평의회 의원들, 국민의회 의원들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이를 반박하고 말(馬)을 훌륭하게 하는 것은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사람일 뿐임을 역설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지혜와 진리, 덕은 법이나 의결기관과 같은 제도에 의한 결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정신적 열망의 결과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기존의 법과 제도를 지혜, 진리와 동일시하는 것은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본질적으로는 “최대한의 돈과 명예와 명성”과 연관된 것임을 질타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는 권위와 관습에의 복종이라는 기존 사회의 도덕성의 토대를 흔들어대고 있었던 셈이다.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철학자인 이유는 이와 같은 정신적 열망, 혼을 발견한 점에 있다고 봐야 한다, 또한 그런 면에서 소크라테스를 ‘악법도 법이다’라는 준법정신의 화신쯤으로만 보는 게 얼마나 우스운 코미디(아니 너무나 슬픈 비극!)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관념론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영혼에 대한 열망은 죽음의 위협조차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변론의 과정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로움을 가장하는 것이지 진정한 지혜로움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소크라테스는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죽음의 위협 앞에 섰던 갈릴레이처럼 자기 주장을 조금 굽히거나 아니면 재판정에서 사형과 추방형 중에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추방을 택했으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또한 나중에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 주변의 친구들이 탈출 계획을 만들어서 찾아왔을 때 감옥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외국으로 도망갈 수 있는 상황임에도 왜 오히려 친구들을 설득하고 결국 독배를 마셨던 것일까?

    물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판정에서 “몇 번이고 사형을 당한다 하더라도” 진리를 주장할 것임을 선언한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이러한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도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보는 게 필요하다. 그는 “죽음이 최대의 선인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한다. 이 말의 의미를 잘 곱씹어보면 죽음이 선일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 다른 대화편인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시각과 청각과 같은 육체적인 감각은 부정확하기 때문에 진리 탐구에 방해가 되므로 “철학자는 육체를 경멸하고 그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벗어나 홀로 독립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고 주장을 한다. 육체로부터 영혼의 독립은 당연히 죽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죽음이 악이 아니라 선일 수 있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감각적인 사고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오로지 이성적인 사유에 의한 진리탐구를 강조하는 그의 관념론적인 철학관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연에 대한 관심, 육체와 감각에 대한 의존을 경멸하고 오직 영혼의 역할만을 인정하는 철학적인 태도는 그를 관념론 철학의 아버지로서 손색이 없도록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관념적 태도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 삽화 <바구니 안의 소크라테스> 1564년

    <바구니 안의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의 관념적인 태도에 대한 풍자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그리스 희극 <구름>에 나오는 한 장면을 삽화로 그린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의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오류와 왜곡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것과는 무관하게 관념적인 것을 추구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그림에서처럼 희극에서 막이 오르면 허공에 바구니가 대롱대롱 달려 있다. 그 안에 들창코에 똥배가 나온 못생긴 소크라테스가 앉아 있다. 그에게 묻는다. “소크라테스여, 그 위에서 뭐하는 겁니까?” 소크라테스는 “정신은 하늘에 속하고, 육체는 땅에 속하는 법. 정신을 하늘 가까이에 둠으로써 육체의 혼탁함을 벗고 되도록 맑은 정신으로 사유를 하려고” 바구니에 매달려 있다고 대답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복도에서 벼룩의 발자국을 놓고 그것을 자로 재어 벼룩은 자기 다리의 몇 배를 뛰는지를 조사하거나 모기가 입으로 우는가 엉덩이로 우는가 등을 논의한다. 당시에 소크라테스의 주장과 대화가 일반인들에게 얼마나 뜬구름 잡는 것처럼 여겨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실제의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가장 강력한 적대자였지만, 아리스토파네스의 눈에는 소크라테스라고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인간의 육체적인 삶과 감각을 경멸했으니 더군다나 일상생활에 얼마나 관심이 없었을 것인가는 미루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그림인 네덜란드 화가 브로멘델(Blommendael)의 <소크라테스에게 물을 붓는 크산티페>는 그러한 일면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의 일화와 관련하여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악처로 유명한 크산티페 이야기이다. 크산티페가 악처로 불리게 된 계기는 집에 들어오는 소크라테스에게 물을 끼얹었다는 일화 때문이다. 그림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집안으로 들이지도 않고 머리에 물을 끼얹어 문전박대를 하고 있는 크산티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생활은 아내에게 전적으로 의존한 채, 철학적인 사색과 토론에만 열중하던 그에 대한 아내의 보복이었던 셈이다.

    그림 속에서도 그녀의 화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표정이다. 그는 동요하거나 위축되는 기색 없이 크산티페의 행동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손을 턱이 괸 채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다. 당시 그녀가 물을 끼얹자 “천둥이 친 뒤에는 소나기가 오는 법”이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 브로멘델, <소크라테스에게 물을 붓는 크산티페> 1665년

    소크라테스와 정치철학 –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관념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과는 무관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역설적이게도 현실의 정치 문제와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 석가, 마호멧 등을 세계의 성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들이 태어난 시기가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대략 기원전 4~5세기에서 기원을 전후한 시기까지 태어나서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럼 왜 기원을 전후하여 세계의 성인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태어났을까? 고대 사상가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태어나서 활동한 것은 시대의 요청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시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각 지역별로 일정한 차이는 있지만 이 시기는 전반적으로 고대국가가 형성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씨족이나 부족사회의 경우는 공동체의 관습이나 상호이해에 근거해 사회가 운영되었다. 규모가 작고 공동체적 요소가 중심이었으니 이를 통한 운영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국가는 그 규모나 활동영역에 있어서 새로운 규칙, 즉 법이나 제도를 비롯하여 국가라는 단위에 적합한 전혀 다른 사회구성 원리가 필요로 된다. 성인이라 불리는 분들의 사상이나 철학은 상당부분 고대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이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혼의 추구라는 점에서 현실과 무관해보일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반대로 정치적인 현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감옥에 갇히고 사형을 선고받게 된 배경도 정치적인 문제와 직접 연관된다.

    아마 소크라테스와 관련해서 “너 자신을 알라”와 함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접한 말이 “악법도 법이다”일 것이다. 이와 관련한 언급이 나타나는 대화편이 <크리톤>인데, 사실은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한 대목은 없다. 다만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서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일정하게 있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죽음에 대해 쓴 대화편은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등 네 편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논증하는 장면이라면 <크리톤>은 사형선고가 내려진 후 탈출을 설득하려 찾아온 크리톤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왜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지 설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반박을 하는 과정에서 국가와 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로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사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끈질기게 그의 목숨을 살리려 하는 친구를 설득하는 데 성공을 하게 된다.

       
      ▲ 소크라테스가 갇혔던 감옥

    소크라테스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어쨌든 일단 정해진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인지 어떤지와 관련한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고전이 <크리톤>이다. 흔히 법이 갖고 있는 두 가지 원칙, 즉 정의의 원칙과 법의 안정성 가운데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라는 대표적인 논쟁을 직접 다루고 있다. 또한 논의의 과정에서 다수 의견에 대한 태도의 문제, 국가와 법의 관계, 계약의 의미, 더 나아가서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는 논쟁점이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

    크리톤만이 아니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에게 탈출을 권했었다. 열렬한 제자인 아폴로도로스가 눈물을 흘리면서 "선생님! 당신께서 아무 죄도 없이 사형에 처해지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제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사랑하는 아폴로도로스여! 너는 내가 죄 없이 사형에 처해지는 것보다 죄가 있어서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보기를 희망하고 있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아내가 면회를 가서 "당신은 부당하게 사형되는 것입니다"라며 탈출을 권유했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당신은 내가 정당하게 사형되기를 원하오?"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도 어지간히 유머 감각이 풍부했던 것 같다.

    크리톤은 절친한 친구인 소크라테스가 죽게 되면 돈 깨나 있으면서 친구를 죽게 만들었다는 나쁜 평판을 듣게 될 것을 우려하면서 탈출을 설득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구애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체조 연습에 열중하고 있던 학생은 만인의 찬양과 비난과 의견을 경청해야 할까, 아니면 그가 누구든 의사 또는 체육가 한 사람의 말만 들어야 할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갖고 있는 대중에 대한 관점, 그러한 의미에서 민주주의관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수 대중들의 의견이 무슨 큰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전문적인 코치의 지도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가 왜 갑자기 운동선수 얘기를 하는 걸까? 그는 이어서 “정의와 부정, 미와 추,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고 그 의견을 두려워해야 할까? 아니면 분별력이 있는 한 사람의 의견을 따르고 그 의견을 두려워해야 할까?”라고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수의 의견이란 “분별력이 없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불과하고 이를 따르면 오히려 해가 된다는 입장이다. 오직 한사람이나 극소수의 사람만이 진리와 정의에 대해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괘념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갖고 있는 대중에 대한 지독한 불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중우정치(衆愚政治) 비판은 깨나 유명하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이 입을 빌어 "철학자들이 그들의 나라에서 왕이 되지 않는 한, 또 반대로 왕 또는 지배자로 불리는 이들이 실제로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한, 즉 정치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 한 국가에 있어서 인류에 있어서 나쁜 것들이 종식될 날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른바 철인(哲人) 통치론을 주장하는 대목이다. 다수의 대중은 분별력이 없는 어리석은 의견을 가진 존재일 뿐이고 이성적 능력으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소수가 정치를 독점해야 한다는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 그리스 조각 <소크라테스>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국가와 가정의 역할을 등치시킨다. “당신은 국가에 의해 탄생되고 양육되고 교육되었으므로 당신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우리의 자녀”라고 규정을 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고 기른 것처럼 개인을 국가가 만들어내고 키운 피조물로 묘사한다.

    그는 국가의 도움으로 남녀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논리를 통해 국가가 개인을 존재하게 만들었음을 논증한다. 양육과 교육에 대한 국가의 법률 아래서 비로소 자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가정에서 부모가 하는 역할을 국가가 그대로 했으므로 자식이 부모에 속하듯이 개인도 국가에 속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어서 국가의 법에 대한 그의 분명한 입장이 나온다. 그는 “우리가 재판을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을 경험한 자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는 우리가 그에게 명령하는 바를 행하겠다는 사실상의 계약을 맺은 것과 같네.”라고 단정한다. 국가가 개인에게 법을 강제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동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성인이 되어서 국가 행정을 알게 되고 법률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싫어진다면 그들이 좋아하는 곳으로 재산을 갖고 가도 좋다고 선언”했음을 든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전쟁 때문에 아테네를 벗어난 것 말고는 외국이라고는 가 본적이 없을 정도로 아테네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개인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었을 때 그 국가를 선택한 행위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법이란 자발적인 동의와 계약에 기초한 것이니 이제 지키는 것만 남았다고 주장한다. 개인과 국가, 개인과 법을 일체화된 관계로 바라보는 그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잇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앞의 <소크라테스의 변론> 내용과 충돌하는 점이 존재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는 재판관들에게 자신을 변호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일정하게 판결에 대한 저항의 의지를 나타냈었다. 그는 자신을 방면해주는 조건이라 하더라도 “나는 여러분보다는 신에게 복종할 것”임을 선언했다. 여기에서 “여러분보다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국가의 뜻에 따르기보다 신의 뜻, 즉 자신이 믿고 있는 정의에 따라 행동할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을 방면하든 방면하지 않든 “나는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이해해 주십시오. 비록 내가 몇 번이고 사형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라고 함으로써 국가가 소크라테스에게 지금까지와 같은 행동을 하지 말 것을 명령하더라도 죽기 전까지는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겠다는 결의를 밝혔었다.

    이러했던 그가 <크리톤>에서 국가의 명령이 올바르지 않더라도 개인은 그것에 따라야한다면서 법의 준수와 국가에의 복종을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하는 점이다. 이 모순적인 태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 <소크라테스의 변론>에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담겨있는 것이고 <크리톤>에는 플라톤의 입장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현실적으로는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진실은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다른 해석으로 소크라테스가 당시 아테네의 법에 대해서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명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이고 이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명한 것인데 다만 그 법을 바꾸는 방식이 설득이어야 하고 설득하는데 성공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 법을 지키는 것만이 정의라는 생각을 보여준 것으로 설명하는 게 가능하다.

    일단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과거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이를 소크라테스가 몸으로 보여주었다는 해석인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의 소크라테스는 설득의 ‘과정’에 있는 것이고 <크리톤>에서는 최종적으로 설득에 실패한 상태에서의 문제라는 것이다.

       
      ▲ 다비드(David)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민주주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에 의한 정치를 바보들의 다수결에 해당하는 중우정치로 규정하고 전 생애에 걸쳐서 이에 반대했다. 특히 재판이 있었던 시기의 아테네의 사회적 분위기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위기를 맞이했다.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린 것은 물론이고, 전쟁이 끝나자 스파르타의 조종을 받는 30인 참주정이 세워지면서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리기 2년 전, 30인 참주 독재의 끔찍한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테네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소크라테스는 이 쿠데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다. 반역의 주역들이 대부분 소크라테스와 가까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 편에 서서 아테네를 배신했던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정의 지도자였고 쿠데타의 주범인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모두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소크라테스는 이 부유한 귀족 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 청년들은 민주주의를 별로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이는 다분히 소크라테스의 영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다수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따르는 민주주의보다는 현명하고 정의로운 탁월한 통치자가 지배하는 사회가 더 완벽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테네의 시민들 입장에서는 청년들에게 그러한 영향을 미친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에 가장 중대한 위협이 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형 선고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판단이 근저에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재판은 제비뽑기로 추첨된 배심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재판에 501명의 시민 재판관이 참여했는데, 이 정도의 숫자면 당시 얼마 되지 않았던 아테네 시민의 숫자와 비교해볼 때 시민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501명의 시민 재판관들은 280 대 221로 소크라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고, 형량에 관한 두 번째 표결에서는 더욱 압도적인 표차인 360 대 140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던 소크라테스를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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