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범 향한 사이버 인민재판이 두렵다
    2009년 09월 14일 08: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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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최근 가수 ‘재범’에 대한 다수 네티즌들의 ‘사이버 인민재판’을 지켜보면서 정말이지 거의 공포심을 느낄 정도입니다.

"여기 와서 돈을 벌려는 주제"에 "감히 우리나라를 욕했다"고 해서 한 명의 인간을 생매장하려는 듯한 그 국가주의적 ‘열정'(?)에만 놀라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주의야 꼭 여기에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국가주의와 잔혹성

"우리 나라를 감히 욕했다"고 해서 빨리 빨리 ‘그 놈’을 십자가에 못을 박으려는 류의 유치함을 딴 데에 가서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예컨대 자국의 주요 기업(지금의 독일의 오펠사처럼)이 외국 자본, 특히 많이 이질시되는 러시아나 중국계 자본 등에 팔려 나갈 때에 유럽인들이 보이는 태도만 봐도 그들에게 중상주의적 경제 국가주의가 얼마나 몸에 밴 것인지 알 수 있지요.

사실, 이와 같은 중상주의적 경제 국가주의, 즉 외국 자본에 대한 거부 반응은 어쩌면 신자유주의적 공격에 대한 일종의 (물론 매우 불완전하고 그 한계가 뚜렷한, 일시적인) 보호막의 역할도 할 수 있으니 꼭 그걸 비판하려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재범 사건’에서 보인 그 유치한 감성적인 국가주의에 저로서 놀란 것은 그 ‘사상적 내용’의 수준이 아니고 그 잔혹성의 수준입니다. "군대도 안 갔다온 주제에 우리 나라를 감히 욕했다"는 한 젊은이를 가상 공간에서 짓밟은 그 무수한 네티즌 중에서는 재범 본인이 그걸 지켜보면서 갖게 되는 마음 상처의 정도에 대해서 생각해본 사람은 있었을까요?

남에게 하등의 머뭇거림없이 상처를 주려는, 학교의 왕따 가해자와 같은 그런 마음가짐이란 이쪽에서 ‘넷심’, 뭇 다중들의 ‘집단 지성’입니다. 억울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요.

사실, 제가 작년 여름 촛불집회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해본 경험은 있었어요. 그 당시의 수많은 ‘쿨한 구호’ 중에서는 "맹박아, 미친 고기를 쳐먹어 쳐죽으라"라든가, "숨쉬지 마, 공기 아깝다" 같은 류의 표어를 들었을 때에 왠지 마음에 걸리곤 했어요.

촛불집회 때 걸렸던 것들

물론 이런 구호를 외친 이들이 ‘맹박이’가 ‘쳐죽는’ 것을 진지하게 바랐을 리는 없었을 터이고 일종의 ‘잔혹한 농담’ 정도로 봐야 하는데, 농담 삼아서라도 타자의 생명을 이처럼 가볍게 취급하는 것은 성숙된 시민적 태도라고 보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시민적 태도도 아니지만, 성숙된 계급주의적 태도도 아니라고 봐야겠지요. 계급주의적, 즉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본다면 삼성과 현대, LG와 군벌, 관벌들의 이해관계를 총조절하는 ‘대통령’이라는 이름의 지배계급의 수장의 구체적인 명칭이 무엇이 되든, 그가 미친 고기를 먹어서 죽든 말든 별로 대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배계급(총자본)의 이해 관계의 추진을 누가 맡든간에 그 내용상의 변화가 그렇게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급주의적 시각에서 본다면 이명박 개인의 ‘악질성’에 대한 집착은 우습게만 보이는데, 단선적이고 흑백적인 부르주아적 상상(악한 이명박 대 선한 희생자 노무현 등등)에 익숙해진 수많은 사람들은 ‘선한 순교자의 서거’에 넋을 놓을 만큼 슬퍼하고 "이명박 때문에 나는 요즘 우울증에 걸렸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것은 우리 ‘집단 지혜’의 수준이니 뭐 할 말은 따로 있겠습니까?

다르게 생각하고 ‘나/우리’로서 체면을 깎는 듯한 발언을 하는 사람에게 우선 ‘매국노’ 따위의 딱지를 붙이고 그 다음에 마녀사냥의 광풍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 ‘공공 영역’의 수준입니다. 나와 같은 편이라면 절대선이고 (고 노무현 지지자들 앞에서 노무현 비판을 시도해보시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나와 반대편이라면 미국에 돌아가든지 죽든지 빨리 없어져야 할 절대악이라는 구도 안에서는 시민 사회의 생명인 토론은 불가능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계급의식의 성장도 불가능하지요. 왜냐하면 사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반대편에 서는 사람(지배계급)도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빨리 죽어야 할 악한"은 아니고 유효기간이 지난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안에 갇혀서 빠져 나올 줄 모르는, 아무리 개인적으로 선하다 해도 구조적으로 착취자가 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인간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합리적 반응과 고함소리

사회주의의 활동은 ‘흥분’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우리의 공공 영역의 심성적 근간이란 바로 흥분, 나아가서는 발악입니다. 정말로 예민한 주제 같으면, 한국 사회에서 차라리 공론화하지 않는 편은 나을 때가 많아요. 합리적인 반응이 아닌 ‘고함소리’만 들리기 때문입니다.

작년, 노르웨이에서 막스 마누스(Max Manus)라는 1940~45년간 반독 반파쇼 무장 저항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애국 영화’가 처음 상영됐을 때에 노동당 계통의 한 논객이 "과연 민간인들을 독일군의 보복에 노출시키는 반독 무장 투쟁은 꼭 도덕적이었는가", "친독 협력자라는 혐의로 수십 명의 노르웨이 ‘부역자’들을 정식 재판도 없이 암살해버린 무장 저항 운동은 과연 독선과 잔혹성을 보이지 않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을 제기한 바 있었습니다.

신문 지상에 몇 차례의 논쟁이 진행됐지만 어쨌든 그 노동당 계열의 논객과 반대편은 ‘감정’이 아닌 ‘사실’ (예컨대 친독 부역자 처단 시에 오로지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기에 함께 죽은 무고한 희생자의 수 등등)과 어떤 보편적인 기준에 의한 ‘판단’을 중시했기에 합리적인 논박이라도 가능했어요.

그러면, 일제 시기의 무장 독립 운동에 대한 같은 종류의 문제 제기를 한국사회에서 해보시기 바랍니다. 결과가 뻔하지요? 감정을 빼고 냉정하고, 조용하게 반대쪽의 이야기를 듣고 오로지 사실과 보편적인 도덕적 기분에 의한 ‘객관성을 지향하는 판단’을 내릴 수 없게 하는 이 분위기는 문제입니다.

건전한 시민이 되려고 해도, 사회주의자가 되려고 해도, 반대자가 적이 아님을 이해하고 개개인간의, 집단간의 소통을 할 줄 아는 게 전제조건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저쪽 학교 애들을 무조건 패주어야 한다"는 깡패적인 고교생 패거리의 수준을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범 사건’을 보면서 이게 과연 가능할는지 의심이 납니다. 이런 마음으로 내일 새벽에 출국해야 하니 슬프기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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