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력자는 진보적일 수 있나"
        2009년 09월 04일 08: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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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어제와 오늘은 저희 학교가 또 노르웨이 우파 일간지의 지상에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올랐습니다. 치과대, 특히 임상치과의학연구소에서의 박사과정생 성희롱 문제가 <다그블라데트>지를 위시한 여러 대중적 일간지들에서 큼직하게 다루어져 많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성희롱이란 노르웨이라 해도 직장 여성의 30~40% 정도는 평생 한 번이라도 당하는 것이지만, 일반 직장보다 상식적으로는 더 깨끗해야 할 대학에서마저도 ‘교수의 성적 압력’이란 존재한다는 것은 일반인에게는 아주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심각한 대학 내 성희롱

    이번에 신문에서 나온 이야기를 보니 상황은 대단히 심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치대 여성 박사과정생 중에서는 약 10여 명이 남성 지도교수로부터의 심각한 성희롱, 성상납 요구를 호소하는가 하면, 이미 학위를 수여한 한 명은 과거 박사과정 시절에 당했던 "강간 정도까지 가곤 했던 지속적인 몇 년 간의 성희롱과 성상납 요구" 등으로 아주 끔찍한 정신적 상처를 입어 이제 노동능력을 잃어 사회복지 사무소의 신세를 져야 하는 정신신경과 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에 굶주려 양심과 상식을 잃은 교수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린 셈입니다. 치대에서 이런 일이 하도 상습화됐기에 대학교의 노동환경보호 책임자가 아예 "임상치과의학연구소를 폐소시키겠다"고 위협할 정도입니다.

    거기에서 일한다는 것은 여성 근무자들의 정신건강을 위협할 정도라면 법원에 제소를 해서 폐소시켜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지금 대학 본부에서 내사에 들어가 최종결과를 기다려봐야겠지만 어쨌든 저희 학교의 위상은 바닥으로 추락되고 만 것임에 틀림없어요.

    보통 그러한 일은 발표될 때마다 사회에서 ‘규정 강화, 처벌 강화, 여성 교수 증원’ 요구가 터져나오는데, 사실 다 맞는 요구지요. 문제는 그렇게 한다고 해도 과연 이성의 제자를 성적 만족의 수단으로 써보겠다는 인간(?)들을 막기에는 과연 역부족이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예컨대 저희 윤리 규정 (http://www.admin.uio.no/opa/ps/etiske_retningslinjer.html)을 지금 봐도 지도 교수와 그 학생 사이의 일체 성적 관계와 선물 증여 등을 이미 엄금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상납을 요구했다는 게 증명되면 해당 교수들이 무조건 해직될 가능성은 아주 큽니다.

    그런데 치과 의사는 교수직에서 해직돼도 굶을 일은 없기에 본인으로서는 해직의 위협이란 탈선 행위를 막을 만큼 충분치도 않아요. 지금 20%도 안되는 여성 교수의 비율을 50%까지 올려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성 교수라고 해서 남성 제자에 대한 부당한 섹스 요구를 안할 보장이라도 있나요?

    1차적으로 ‘권력’의 문제

    이건 성차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 ‘권력’의 문제입니다. 교수란 사실 권력자의 다른 이름이지요. 자본가의 자본 남용을 막기가 매우 어렵듯이, 군인의 전시 민간인 학대를 막기가 불가능에 가깝듯이 교수라는 권력자의 권력 남용을 막는 일은 지난한 일입니다.

    ‘상아탑’과 ‘진리 탐구’에 대한 낭만적인 미사여구를 걷어치우고 ‘현실’만을 냉정히 본다면 박사과정생에 대한 지도교수의 의무란 무엇인가요?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사회에 쓸 만한 고급 (박사학위 소지) 인력을 공급해주는 것은 교수의 본업입니다.

    그래서 노르웨이만 해도 박사학위 논문 작성시에 보통 ‘현실적 중요성’ (den praktiske relevansen)을 머리말에 꼭 써야 되지요. 관가에서든 기업에서든, 아니면 적어도 비정부기구나 같은 학자든 이 연구의 결과를 어떻게 써먹을 것이냐라는 부분을 밝히지 않고서는 학위를 못받지요.

    물론 인문학자들의 연구의 중요성은 보통 같은 학자들에게 자료 내지 해석 방법, 해석 결과를 공급해주는 선에서 그치지만, 인문학 안에서도 꼭 나름의 ‘규율’은 존재합니다.

    예컨대 그나마 인문학 치고 유럽에서 쉽게 팔리는 불교를 보시면, 불교 학자가 꼭 불자일 필요까지 없지만 불교에 대한 체계적 비판을 거의 잘 하지 않게 돼 있는 것입니다. 불교란 구미권에서 신비주의적인 현실도피 수단으로 화하여 잘 ‘팔리’지만, 불교에 대한 사회-정치적 비판은 좀 터부시되지요.

    특히 티베트 불교라는 서구 중산계급의 최대의 애완물 같으면 극소수의 예외도 있지만 대개는 무비판적 접근은 더욱더 절대적입니다.

    서구 중산계급의 애완물이 된 티베트 불교

    조선시대 노비에 대해서는 그나마 한국어로는 약 4~5종의 무게 있는 1990년대 이후의 단행본들이 있는데다 구미권에서 고 짐 팔레 선생(워싱턴주립대) 등 일부 학자들이 영문으로 쓴 것도 있지만, 티베트 전통사의 예속농민 가지고 매달리는 학자들을 거의 본 적은 없습니다. ‘영적 생활의 낙원’이자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희생물’인 티베트의 치부를 안건드리려는 것이지요.

    어쨌든 박사 공부란 자본주의 체제의 제반 요구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고, 교수는 이 제반 요구를 지도학생에게 전달해주고 시행케 하는 매개체이자 학생에 대한 공적, 사적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자’입니다. 공적으로는 ‘성적(成績)’이란 무기가 있는가 하면, 사적으로는 직업적 네트워크에서의 학생의 활동을 크게 방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요.

    그러면 학생과의 관계에 있어서 ‘체제’ 그 자체를 대표하는 권력자는 정말 그 권력을 남용하지 않게 할 수 있나요? 이 체제 자체가 극도로 부도덕적인 만큼 이 체제의 한 대표자를 도덕군자로 만드는 게 유토피아입니다.

    당연히도, 그렇지 않아도 이미 엄격한 본교 규정들도 더욱더 강화시켜야 하고, 피해자 여학생들을 괴롭힌 괴물들에 대한 형사 책임까지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게 한다 해도 문제의 뿌리를 뽑을 수는 없을 거에요.

    보통 대학이란 – 특히 노르웨이와 같은 모범적인 사민주의 국가의 대학 – ‘진보’의 대명사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대학만큼 상하 사이의 권력 관계가 노골적이고 무자비하게 작동되는 공간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을 수 있지만 대개는 교수라는 이름의 권력자로서 미시적인 권력 관계에 있어서 ‘진보적으로’ 처신하기가 매우 어렵지요. 그렇게 하기에는 교수들은 그들을 키운 체제의 논리에 너무나 길들여진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교수라고 해도 절대 예외는 아니고요. 그래서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 자신을 포함한) 교수들에 대한 과신 내지 맹신은 진보 사회로서는 일대 금물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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