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논쟁, 격돌하다
    2009년 09월 04일 07:30 오전

Print Friendly

‘민족’ 문제를 놓고 진보진영 인사들이 다시 한 번 격돌했다. 지난해 ‘종북주의’가 민주노동당 분당 논란의 핵심으로 떠오른 이후 사안마다 진보진영 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민족’ 담론이 토론회에 다시 올려져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는 3일 오후 2시부터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21세기 민족을 다시 말한다’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토론자들은 “민족문제는 여전히 한국사회 문제해결에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주장과 “민족문제는 시대착오적”이라는 입장으로 나뉘어 ‘민족’ 전쟁을 치렀다. 

   
  ▲토론회 모습.(사진=정상근 기자) 

발제를 맡은 최규엽 새세상연구소장은 “민족문제는 여전히 한국사회 모순의 핵심이며, 21세기 한국민족주의의 가장 절박하고 중대하며, 운명적 과제는 ‘민족통일국가’를 세움으로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올바르게 극복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통일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극복의 길"

강정구 동국대 교수도 “역대 독재정권은 물론 현재에도 민주노동당 사람들이 끊임없이 구속되고 기소되고 조사받고 있을 정도로 민족담론은 억압되어 있다”며 “민족의 숙원인 통일국가를 달성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통일의 동력은 민족주의 이념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한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진보 지식인들이 “한국적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고 서구 이론만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최규엽 소장은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진보 지식인들이 “뉴라이트의 우군”역할을 하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최 소장은 “민족을 정의할 때 시민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서유럽의 시민적 공공적 민족주의를 보편적이고 긍정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등 전형적인 서구 중심의 민족-민족주의 담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민족주의를 폐기하라’고 외침으로써, 결과적으로 뉴라이트 극우세력의 민족분단 고착과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확대 노력에 우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뉴라이트와 민족주의 반대 진보학계는 분단 전후과정의 우리 현대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더 이상 민족주의가 필요없는 거의 완성된 민족국가로 한국을 간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북사회에 대한 이해 수준은 학교에서 배운 반공교육 이상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강정구 교수 역시 “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 민족해방투쟁에 직면한 서구학계는 민족주의 일반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이는 서구 지식인의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의 발로”라며 “서구 민족주의국가의 태동에 의해 민족적으로 짓밟힌 제3세계와 우리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이를 우리 토양에 기계적으로 적용시키는 지식인은 몰역사적인 과잉서구화에 빠져 민족주의를 경원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80년대 듣던 얘기, 경악 금치 못하겠다"

그러나 이에 대해 진중권 전 중앙대 겸임교수는 “80년대에 듣던 얘기가 아직 나오고 있다는데 충격과 경악을 금할 수 없다”며 “민족문제는 존재하지만 민족주의 담론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탄생하여 이제 거의 사멸한 근대적 이데올로기로, ‘우리 민족끼리’ 수준의 통일담론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계급이념도 낡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시기에 ‘계급과 민족 중 어느 것이 먼저냐’는 오늘의 논의는 그 자체로 낡았다”며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뉴라이트의 역사인식 모두 해방공간에만 머물러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도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좌우를 가르는 기준은 대단히 복합적인 것으로, 시장주의자냐 아니냐가 기준이 될 수도, 남북관계가 중심이 될 수도 있다”며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결과도 복합적이다. 반미우파나 반북좌파가 나올 수도 있으며, 이같은 이념적 분화는 더욱 진행되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민족주의 강화를 찬성하는 토론자들은 ‘민족 논쟁’과 관련해 지난해 민주노동당의 분당을 언급하며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특히 강정구 교수는 “민주노동당의 분당은 종북주의론 분파들의 몰민족성의 결과”라며 “막말과 수구꼴통을 무색케하는 수준의 어휘와 내용을 구사하고 합리성과 보편성도 없었다”고 말했다.

"분당파, 수구꼴통 무색케 해"

또한 “북의 핵 실험이 무조건 비난 대상인 것은 아니”라며 “북의 핵 실험이 없었다면 정전협정 54년 만에 열린 평화협정 국면이란 대전환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종북론자들 주장처럼 북이 자위적 수단으로 핵무기 시험을 하지 않았다면 2005년 핵폐기 합의와 한반도 비핵화를 얘기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진중권 전 중앙대 교수는 “종북주의는 있었고, 그 때문에 탈당한 사람들 중 내가 1호”라며 “그들은 예전부터 (좌파들을)미제의 간첩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점잖나?”고 되받아쳤다. 그는 이어 “당직자들의 신상정보 북한에 보고한 사실을 비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라며 “오히려 종북주의를 숨길 필요가 없다. 핑계대지 말고 분명히 색깔을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족주의 반대 측 토론자들은 오히려 “발제문에는 북한체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빠져있고, 오로지 민족적 측면에서 통일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기도 했다. 진중권 교수는 “북한이 통일을 위해 일으킨 한국전쟁은 수백 만의 인명피해를 낳았는데, 발제문에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북한은 ‘저항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대립적 민족주의’로 이미 체제와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전락한 통합적 민족주의(=국가주의)다”라며 “이것이 미제와 전쟁에 대한 공포감으로 주민들을 가혹하게 통제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북한 정권에 대한 인식이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무조건 통일은 반진보적이고 매우 위험"

구갑우 교수 역시 “2009년 8.15 경축사에서 북한은 ‘김일성 조선’, ‘김일성 민족’이라는 표현을 썼고, 연호도 김일성 탄생년을 원년으로 하는 주체연호를 쓰고 있다”며 “같은 민족이라면 남쪽에 있는 우리도 ‘김일성 민족’이 되어야 하는가? ‘김일성 민족’을 어떻게 받아들이나?”라고 말했다.

이어 “남북의 통일의 방식은 화해 불가능”이라며 “무조건 통일이라는 발상은 대단히 보수적인 방법으로 진행될 수도 있고, 반진보적일 수도 있는 발언으로 굉장히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고려된 얘기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민족주의 반대 측 토론자들은 ‘통일’이 아닌 ‘통일의 내용’을 말할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진중권 교수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디지털 컨버전스의 시대에 통일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필요성에 대한 현실적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며 “통일을 항미연북의 변혁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념적 성향이 있는데 현실적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남북한 정권 모두 통일을 원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차라리 통일에 대한 논의보다는 분단의 적대성부터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기획이 필요하다”며 “어떻게 통일을 할지, 거기에 따르는 문제가 무엇인지 철저한 준비를 하고 그 방안을 내놓아야지, ‘민족’이란 당위성으로 ‘무조건 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교조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최규엽 소장은 “오히려 너무 민감한 것 같다. ‘북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민족주의 토론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어 “설령 북이 세습독재여도 북한의 민중들은 민족으로서 중요한 부분”이라며 “중요한 것은 분단과정이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미제국주의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족주의 정권 들어설 때가 오고 있다"

최 소장은 “지금 한국 민족주의에게도 기회가 오고 있다”며 “한국 땅에 제대로 된 민족주의 정권이 들어선 적이 없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저지하고 민족통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진보적 이념과 결합된 민족주의 정권이 들어설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는 서유석 호원대 교수의 사회로 최규엽 새세상연구소장이 발제를 맡았으며 강정구 동국대학교 교수, 김원일 학술단체협의회 대외협력위원장, 진중권 전 중앙대 교수, 구갑우 북한대학교대학원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