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목 정권의 종말에서 배우는 교훈
        2009년 09월 03일 09: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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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총선 결과, 54년 만의 정권 교체가 실현되었다. 이것은 한국 토목정권의 장래에 주는 의미가 크다. 자민당은 패전한 일본을 부흥시킨 주역의 하나로서 나름대로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일본 국민들이 이러한 측면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지난 50여 년간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자민당의 이러한 긍정성은 최근 10년 사이에 급속히 와해되었다. 1,000만 명에 이르는 근로빈곤층이 양산되었고, 비정규직 근로자가 전체 근로자의 34%까지 확대되었다. 지난 10년간 전체 국민들의 평균 소득도 100만 엔(현재 환율로 약 1,371만 원)이나 감소했다. 반면, 사회보장 예산은 매년 2,200억 엔(약 3조 원), 5년간 1조 1,000억 엔이 줄어들었다. 오늘 일본의 정권교체는 이러한 정권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대중의 심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일본의 사례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우선, 일본 민주당의 오랜 집권 준비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민주당은 일본의 전 국토를 토목공사장으로 만들고 급기야 부동산 버블을 초래해 일본 전체를 ‘잃어버린 10년’의 함정에 빠뜨린 자민당의 한계를 정확히 감지했다. 그래서 민주당이 주력한 것은 민생 중심 공약에 대한 꾸준한 준비였다.

    일본 민주당은 2000년 12월부터 ‘인터넷 정책 공모’를 실시하고, 많은 국민들이 참여하는 정책 개발과 의원 입법을 추진해왔다. 인터넷을 통해 정책을 공모하며, 정책 제안자들과의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렇게 채택된 정책 제안들에 대해서는 민주당의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을 상대로 정책 설명의 시간이 주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민주당 의원들은 그동안 관료들이 만들어 주는 법안이나 통과시키던 거수기 노릇에서 벗어나 직접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국민정당의 면모를 꾸준히 보여 주었다. 민주당은 이 과정에서 ‘시민 입법’이라는 말을 정치권에 정착시키기도 하였다.

    지난 2007년 총선에서는 “300대 생활정책”, “매니페스토 2007” 등을 통해 꾸준히 자민당과는 차별화된 정책을 홍보하여 왔고, 이번 총선에서도 “INDEX 2009”라는 공약을 통해 미시적인 생활정책을 지속적으로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만년 야당이었던 민주당을 수권 정당으로써 성장시키고, 정치에 무관심해진 국민들을 대거 투표장으로 불러내는 놀라운 동력을 창출했던 것이다.

    두 번째, 집권 자민당의 신자유주의적 실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략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번 승리의 숨은 주역으로 평가 받는 오자와 이치로 전임 민주당 대표와 하토야마 유키오 당 대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이즈미 정권에서 제정된 우정 민영화법을 폐기하고 우편 업무 뿐 아니라 예금, 보험, 금융 업무를 포함한 전체 우체국 업무의 공공성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계속 밝혀왔다. 또,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였던 노동자 파견법을 폐지 수준에서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왼쪽)와 오자와 이치로

    이와 함께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노동조건을 확보하고 최저 임금을 대폭 인상할 것, 적극적 고용정책을 실현하고, 각종 거대 토목공사의 중지를 통해 예산 낭비를 일소하며 생활정책 분야에 대해 우선적으로 예산을 배분할 것 등의 민생 정책을 적절한 시기에 발표해왔던 것이다. 이로써 민주당은 일본 경단련의 산하단체 같았던 자민당과 뚜렷이 대비되는 데 성공했고, 이는 결국 오늘의 새로운 선택으로 이어졌다.

    세 번째, 무엇보다 유효하였던 것은 생활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적극적인 복지국가 정책의 공약화 전략이었다.

    일본 민주당이 제시한 복지 공약들은 꽤 화려하다. 한 달에 2만 6,000 엔씩, 1년에 31만 2,000 엔의 아동수당을 전 아동에게 지급하며, 출산 지원금으로 총 55만 엔을 지급하는 정책을 내세웠다. 초등학교 여유교실을 활용한 공공보육시설 확대로 4만 명의 보육 대기 아동을 해소하고, 무과실 의료사고에 대한 보상 제도를 실시할 것이라는 공약이 제출되었다.

    본인 부담으로 되어 있던 후기고령자 보장법의 폐지가 약속되었고, 이를 공보험으로 일원화하는 대안도 제시되었다. 노인요양보험의 간병수가 인상을 통해 간병인에 대한 임금인상을 제시하였고, 40만 명의 시설입소 대기자를 위해 노인요양시설의 확충을 약속하였다.

    이 밖에 GDP의 5% 수준으로 공공 교육재정을 확대하고,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보장하며, 국가 주도의 직업교육과 평생교육제도의 전면적인 실시와 같은 북유럽 복지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공약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특히, 어린이가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의 정비, 아동 학대 방지 대책의 추진, 가정폭력방지법의 추진 등은 섬세한 생활정책의 진수를 보여 준다. 민주당은 이러한 공약의 실현을 위해 불필요한 토목 공사를 줄여 연간 9조 1천억 엔을 마련하는 등의 재원확보 방안을 제시했다.

    물론, 며칠 후 새로 구성될 민주당 정권이 수 십 년간 고착되어온 정경유착을 확실히 탈피하고 사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위와 같은 복지공약들을 얼마나 실천할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다. 알려진 대로, 일본의 민주당은 구 자민당 세력의 일부가 주도한 중도보수 성향의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주류이기 때문이다. 또, 지금까지 경제를 주무르며 토목국가 건설에 앞장서온 일본 관료사회의 반발을 어떻게 극복할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와 불명확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야당 정치세력이 개별적이긴 하지만 북유럽 수준의 각종 복지 공약을 통해 반세기 만의 정권교체에 성공하였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일본 민주당이 내세운 복지와 분배 중시 노선이 국민의 표심을 흔들었다는 점은 명확하다. 이는 향후 우리나라의 제 정치세력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일본의 사례를 보면서 우리가 배울 교훈이 무엇인지는 확실하다.

    현재 일본의 실업률은 5.7%로 전후 최악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자민당이 추진해왔던 “선 경제 성장, 후 과실 배분” 정책이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로써 고용 없는 경기회복과 노동 분배율 저하가 심화될 것이 우려되었다.

    그러자 사회보장에 대한 욕구를 꾸준히 증대시켜온 일본 국민들은 과감히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나 “저성장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삶을 지킬 수 있는 복지 중심의 정치노선”을 선택한 것이다. 전면적인 복지국가 정책을 통한 내수 활성화와 국민 생활 개선 전략은, 단순히 선거를 위한 인기 위주의 정책이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저성장 시대에 대응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경제정책이다.

    따라서 국민의 지지를 통해 민주적으로 정권을 얻으려는 자는 누구든지 국가발전 모델로서 보편적, 적극적 복지 중심의 지속 가능한 성장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즉, 우리나라의 현실에 맞는 전면적인 복지국가 프로그램을 수립하여 보육, 교육, 의료, 노후, 주거 등 국민의 5대 불안을 제도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세력이야 말로 다음 번 집권에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세력이 될 것이다.

    2009년 9월 3일
    사단법인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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