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식을 예측한 탈레스
        2009년 08월 31일 10: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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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레토스의 아폴론신전>

    왜 자연을 철학의 대상으로 삼았을까?

    밀레토스(Miletos)의 <아폴론신전>은 거의 폐허처럼 신전의 기둥만 앙상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밀레토스의 외항 디디마(Didyma)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고대 그리스 신전 가운데 거대한 규모로 손꼽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신전 기둥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당시에도 이토록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이 저녁이 되면 석양으로 붉게 물들었겠지. 밤이 되면 칠흑 같은 하늘 위에서 별의 축제가 벌어졌을 게다. 새벽에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면 온 세상이 꿈틀거리며 잠을 깨는 장관이 벌어졌겠지.

    아직 자연철학이 발전하기 전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저녁 하늘이 붉어지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했을까? 당시 많은 시인들이 찬미하였듯이 저녁 하늘이 붉어지는 이유는 저녁의 여신인 에스페리데스(Eeperides)의 피부가 장밋빛이기 때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저 푸른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와서 번개와 천둥이 기승을 부리면 번개를 상징하는 제우스의 노여움 정도로 여겼겠지.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같이 장마가 이어지고 홍수가 나면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 단단히 화가 난 것으로 여겼을 테고….

    하지만 기원전 6세기경에 이오니아의 도시국가 밀레토스에는 하늘의 변화를 다르게 설명하고자 하는 일군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자연 현상을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하고, 자연을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자연철학자들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밀레토스학파로 불리는 탈레스(Thales),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를 포함하여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등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자연 현상에 대한 근원적 탐구를 학문 활동의 주된 목적으로 삼았다.

    이들은 이 세상 만물이 존재하는 근거와 원리는 무엇인가, 무엇이 모든 사물들의 존재를 결정하는가, 우리는 왜 어떤 사물이 끊임없이 변화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것을 하나의 동일한 사물로 인지하는 것일까 등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했다. 자연 변화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질서와 원리가 있어서, 비록 그것이 항상 변화하고 있을지라도 동일한 것으로 지탱하게 한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만물의 근원, 즉 아르케(arche)에 관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러면 현대인들의 상식으로는 이들을 과학자라고 부르는 게 당연할 텐데, 왜 자연철학자라고 할까? 일반적 통념으로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을 자연과학이라 하고, 인간과 사회를 다루는 학문을 인문학이라든가 사회과학으로 부르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는 현대인들의 상식이지 고대인들의 상식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는 철학과 과학이 학문으로서 구분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자연철학자들의 관심이 흔히 교과서에서 배우듯이 단순히 자연의 근본이 물이었느냐, 아니면 흙이나 물 혹은 불이었느냐를 규명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탐구는 인간의 사고하는 방식을 비롯하여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먼저 자연철학은 신화적 사고에서 이성적 사고,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사고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자연철학은 쉽게 말하면 과학적 사고를 의미한다. 이전의 인간을 지배하던 인식의 상당부분은 미신적이고 신화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자연철학자들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우주세계가 신의 창작물이 아니라 물질의 작용이라는 과학적 통찰을 통해 인간의 사유가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전기를 마련했다.

    또한 자연철학자들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도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고, 어떤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가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 자체가 우주와 자연에 속한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 인간에 대한 이해는 막연하고 불확실한 것으로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차적인 탐구의 대상을 자연에 두었다는 점에서 인간을 일차적인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은 소피스트나 소크라테스와 구분될 수 있다. 하지만 소피스트나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철학적 대상에 있어서 혁명적인 전환이 일어나기 위해서도 자연철학자들의 활동이 하나의 전제로서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을 본격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도 먼저 신화에서 벗어나는 사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화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가장 신비스럽고도 두려운 존재로 여겨지던, 그래서 신의 조화로 여겨지던 자연의 변화에 대한 이성적 해명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 자연철학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의 교두보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만물의 근원을 탐구한 철학자 탈레스

       
      ▲ 그리스 조각 <탈레스>

    탈레스는 밀레토스 자연철학의 시조이며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로 불린다. 탈레스라는 철학자를 떠올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보았던 그의 결론을 떠올린다.

    그리고 곧바로 ‘만물이 근원이 어떻게 물일 수 있어…’라고 생각해버리곤 한다. 현대인들의 상식으로 생각해보아도 구성 성분이나 생성 과정을 볼 때 물과는 상관없는 물질이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원시적인 사고의 한 단면 정도로 가볍게 여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한 규정보다는 왜 이러한 생각을 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발상의 저변에 깔려있는 문제의식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먼저 ‘만물’이라는 발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전에 대부분의 관심은 현실에서 나타나는 개별적인 현상에 대한 것이었다. 하늘과 땅, 강과 바다에서 일어나는 개별적인 변화가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때 두려움과 함께 그 현상에 주목하곤 했다. 하지만 ‘만물’이라는 발상은 인식이 자연이나 인간의 개별 현상이 아니라 전체에 대한 것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근원’이라는 발상이다. 근원을 문제로 삼았다는 것은 이미 그 사고방식 안에 현상과 본질에 대한 구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물이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현상의 이면에 숨어있는 본질을 탐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물을 ‘현상’과 ‘본질’로 구분하여 접근하는 것은 그 내부에 감각적 사고와 이성적 사고를 구분하는 인식 방법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철학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대상이 되었던 것이 바로 감성과 이성의 관계 문제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사고의 시원에 해당하는 존재가 탈레스였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물’이라는 규정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의 ‘물’이라는 규정에 대해 두 가지 차원에서 성격을 파악한다. 우선 ‘물’이라는 규정은 만물의 근원을 ‘하나’로 이해했다는, 그러한 의미에서 일원론적 성격을 제시한다. 인간과 자연, 지구와 우주 등 이 모든 것들이 근원적으로 하나의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일원론적 인식태도를 밝힌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으로 ‘물’로부터 만물이 스스로 생성되었다는 점에서 물활론(物活論)적인 성격을 제시한다. 탈레스에게서 나타나는 물활론은 만물이 물로부터 자연적으로 생성되어 나온 것이라는 의미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는 모든 물질은 그 자체 속에 생명을 갖추고 있어서 생동한다는 점에서 특징을 갖고 있다. 탈레스가 “자석이 쇠를 끌어당기는 것은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만물은 신(神)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한 것은 그러한 인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종합하자면 우리가 얻어내야 할 것은 만물의 근원이라는 발상, 자연에는 법칙이 있다는 발상의 창시자로서의 탈레스인 것이다. 사물의 현상과 인간의 인식을 우연의 영역에서 필연과 법칙의 영역으로 전환시키는, 그런 점에서 탈레스는 신화적인 사고에서 이성적인 사고로의 전환을 이루어내는 정점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탈레스가 BC 585년 5월 28일에 생긴 일식을 예언했던 것도 개별적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숨어있는 본질적인 것, 우연을 넘어선 법칙적인 것을 규명하고자 했던 노력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연구는 여러 측면에서 기념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이집트에서의 연구에 기초하여 이집트인들이 가지고 있던 경험적․실용적 지식을 바탕으로 최초로 학문으로서의 기하학을 확립하기도 했다. ‘원은 지름에 의해서 2등분 된다’, ‘2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의 크기는 같다’, ‘두 직선이 교차할 때 그 맞꼭지각의 크기는 같다’ 등의 정리는 그가 발견한 것이다. 천문학에 기초하여 1년을 365일로 나누어 1개월을 30일로 정한 것도 그였다고 한다.

    탈레스의 철학적 성과는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로 이어져서 밀레토스학파의 전통을 세우게 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을 탈레스의 물보다 추상화된 개념인 아페이론(Apeiron), 즉 무한자를 통해 설명하였다.

    이로부터 운동에 의해 온·건, 냉·습의 대립자들이 산출되고 대립과 투쟁의 과정을 거쳐 만물의 생성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탈레스가 일식을 예측하였던 것처럼 아낙시만드로스는 스파르타의 지진을 예측하여 스파르타인들이 지진을 피해 도시를 떠나 야외에서 일시 머물게 하였다고 한다.

       
      ▲ 로마시대 모자이크 <아르키메데스의 죽음>

    수학과 철학 – 아르키메데스와 피타고라스

    역사상 위대한 수학자로 반드시 손꼽히는 인물이 아르키메데스와 피타고라스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를 외치며 발가벗고 뛰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왜 길거리를 벌거벗고 달렸을까? 아르키메데스를 후원하던 히에론 왕은 세공인이 만든 왕관에 다른 물질을 섞이지 않았는지 의심이 들었다.

    아르키메데스에게 이 문제를 상의하자 그는 이를 확인할 방법을 찾는 데 골몰한다. 도저히 방법을 찾을 수 없던 아르키메데스는 공중목욕탕에 몸을 담그자 물이 넘치는 순간 ‘부력의 원리’가 섬광처럼 번뜩였고, 너무 기뻐 벌거벗은 채 왕관이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유난히도 학문에 대한 열정에 불탔던 그이기에 연구에 얽힌 일화가 많다. 특히 그의 죽음과 관련된 일화는 유레카를 외쳤던 일화 이상으로 연구에 대한 치열한 열정을 그대로 전해준다. 아르키메데스가 살고 있는 작은 도시에 로마군이 쳐들어 왔다고 한다. 이미 70세를 넘은 고령이었던 아르키메데스는 모래 위에 도형을 그리며 기하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로마병사가 그의 앞을 막자 “물러서거라, 내 도형(圖形)이 망가진다”며 소리쳤다. 병사는 그를 단칼에 죽여 버렸다고 한다.

    로마의 모자이크 작품인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을 보면 당시의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로마 병사가 한 손에 칼을 들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아르키메데스에게 다가서고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도형을 보호하려는 듯 두 손으로 모래판을 감싸고 있다. 이 일화가 로마의 모자이크로 남겨진 것으로 봐서 로마인들은 적국의 학자이고 자신들을 괴롭힌 무기를 제작하기도 한 인물이었지만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로마군 대장이었던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을 슬퍼하며 비석에 원뿔, 원기둥, 구가 각각 내접해 있는 그림을 새겨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고심 끝에 발견한 정리, “구에 외접하는 원기둥의 부피는 그 구 부피의 1.5배이다”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었다.

       
      ▲ 그리스 조각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와 함께 그리스를 대표하는 수학자로 피타고라스(Pythagoras)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저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이 자신의 것인지, 제자들의 것인지의 확인할 수 없다. 제자인 필로라오스와 기타 학자들이 남긴 저술의 단편에 의하여 당시 피타고라스학파의 내용이 전해진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보았다. 이들은 수학적 탐구가 우주 질서의 탐구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들 수학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철학과 연관되는가? 이미 앞에서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탐구할 때 그 발상 안에는 현상과 본질의 구분, 그러한 의미에서 감각적 사고와 이성의 구분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한 바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이성의 극점에 수의 세계가 있다.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이 물이나 흙, 불과 같은 물질적인 요소에서 만물의 근원을 탐구했다면 이들은 이성적인 요소에서 근원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아르키메데스나 피타고라스에 의한 수학의 발전은 이성적 사고의 전면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데카르트의 회의론적 사고, 철저하게 감각적 사고를 의심하고 오직 이성적 사고만을 주장한 논리의 결정체가 수학이었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피타고라스에 와서는 차가운 수의 세계가 종교와 일치점을 찾게 된다. 피타고라스가 추종했던 오르페우스교에 따르면 영혼은 불사(不死)이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며 영혼이 이 영원한 벌로부터 벗어나 천상으로 돌아가려면 ‘정화’를 통해야 한다.

    피타고라스는 이 교리와 자연철학을 기묘하게 뒤섞는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수를 통해 우주의 이법을 탐구하는 것이 곧 신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우주의 신성은 곧 우주의 질서이다. 영혼을 정화시킨다는 것은 곧 물질성을 벗어나 그 질서를 찾아가는 것이며, 때문에 우주의 수학적 질서에 대한 탐구 자체가 곧 영혼의 정화와 직결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감각적 사고와 이성의 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며 ‘영혼이 이성이라는 정화를 통해 순수’해질 수 있다는 이들의 논리와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확인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기 때문에 영혼이 육체로부터 벗어나 독립할 것을 주장한다. 수를 통해 순수한 이성의 세계를 열었던 피타고라스의 발상이 그 후 서구 사유에 얼마나 심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 – 고대 유물론 철학의 체계화

    데모크리토스는 고대 그리스 유물론 철학을 체계화하였다. 그의 자연철학은 원자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자론은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계만이 아니라 널리 인간의 인식작용이나 사회생활을 설명하고 평가하는 데까지 적용하여 동시대 플라톤의 관념론철학에 대립하는 유물론철학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 루벤스 <데모크리토스> 1603년

    그는 ‘웃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루벤스(Rubens)가 그린 <데모크리토스>를 보면 한손에 천체를 상징하는 원구를 들고 노 철학자가 앉아있다. 우주의 본질을 탐구하려 했던 그를 상징하는 물건인 듯하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그림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슬쩍 미소 짓는 정도가 아니라 함박웃음을 띠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대부분의 조각이나 회화에 묘사된 철학자들의 모습이 언제나 진지하고 경직된 모습인 것과 비교할 때 특징적이라 할만하다. 루벤스만이 아니라 적지 않은 화가들이 그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는데, 거의 예외 없이 호탕하게 웃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가 항상 웃었던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철학적인 태도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원자론에 기초한 그의 자연학은 유쾌함을 강조하는 윤리학과 연결되는데, 그는 자연의 법칙에 알맞은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근심에서 벗어나서 언제나 즐거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스스로 세상에 웃음을 뿌리며 살았다. 그의 원자론과 윤리학은 나중에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은 체계적인 저작의 형태로 남아 있지 않아서, 이후 철학자들의 글 속에서 단편적인 언급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원래 그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저작을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디오게네스가 기록한 저작 목록에 의하면, 그는 원자론의 기본이론·우주론·천문학·지리학·생리학·의학·감각론·지식론·수학·자기학(磁氣學)·식물학·음악이론·언어학·윤리학·농업·회화 등 수많은 영역에 걸쳐 저작 활동을 했다고 한다.

    손에서 늘 책을 떼지 않았고, 너무나도 박식하기에 그리스의 수많은 학자들로부터 지혜자(Sophia)라는 칭호를 들었다. 일화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그에게 "페르시아의 왕의 자리를 준다면 어떻게 하겠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내게는 페르시아의 왕국보다 차라리 기하학 원리를 밝히는 것이 더 가치가 있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학문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열정은 당시에도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글을 통해 대체로 자연학과 인식론, 윤리학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그의 원자론을 살펴보면, 자연(Physis)에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원자(Atom)의 기계적인 결합·분리의 운동이 있을 뿐이고, 이것만이 진실이고 객관적, 절대적, 필연적이라고 한다. 이 세계는 충만하게 차있는 것과 비어있는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충만한 것은 무수한 원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자는 아주 작아서 우리의 감각을 벗어난다고 생각했다.

    현실에서 존재하는 개별적인 것들의 다양한 차이는 이들 원자의 형태·크기·배열·위치의 기하학적인 차이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변화는 이 원자들의 상호 충돌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았다. 진공 속 원자의 운동은 원자의 무게에 의해 생겨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 운동에는 측면운동·원운동·소용돌이운동이 있고, 이때 비교적 가벼운 원자는 바깥으로, 비교적 무겁고 큰 원자는 안쪽으로 밀집한다. 안으로 밀집한 것은 대지(大地)가 되고, 바깥으로 향한 것은 공기·불·하늘이 된다. 인간도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간의 감각이나 정신도 원자의 작용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원자가 상호 분리·결합을 해서 인간의 신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또한 시각이나 미각과 같은 감각도 원자 운동에 수반하는 주관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서 검증된 원자이론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의 직관력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그의 인식론은 원자론의 자연스러운 귀결로서 정리된다. 참된 것은 감각이나 인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 자체에, 즉 원자와 허공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느끼는 단 것, 쓴 것, 뜨거운 것, 차가운 것, 색깔을 느끼는 것 등 모두가 실제로는 원자의 작용에 불과한 것이다.

    본다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부터 어떤 상이 계속 흘러나와 시각에 부딪히는 것에 기인한다. 미각도 표면의 형태가 서로 다른 원자들이 서로 겹치면서 다른 맛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정신이라는 것도 인간에게 주어지는 원자 또는 지각 형성물의 유입이라는 점에서 각각의 사물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데모크리토스는 인간은 자신이 실재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을 이 규칙에 근거해서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들은 실로 어떤 정확한 것도 파악하지 못하며, 몸의 상태와 몸으로 밀고 들어오거나 몸에 저항하는 원자들의 상태에 따라서 변하는 것들을 파악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윤리의 문제도 원자론과 연결된다. 그에 의하면 규칙·관습·법률과 같이 인간들이 절대시하는 노모스(Nomos)도 스스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인간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움직이는 모든 원자 운동의 기계적 필연성 이외에는 다른 마력도 없다는 점에서 신의 존재도 부정했다.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도 원자 결합체의 분리·해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이나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현실의 삶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윤리적 결론이 된다. 그래서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은 가능한 가장 유쾌하게, 그리고 가능한 가장 괴롭지 않게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그가 육체적·물질적 쾌락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재물에 대한 욕구는 만족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면 극심한 빈곤보다 훨씬 견디기 어렵다. 왜냐하면 더 큰 욕구는 더 큰 결핍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라고 함으로써 충동이나 욕구가 오히려 고통을 키우고 쾌락을 사라지게 한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오히려 “절제는 즐거운 일들을 늘려주고 쾌락을 한층 더 크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혼조차 원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간에게 행복이란 그 원자가 안정되고 평안한 상태를 이루어야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즐거움을 누림으로써 원자의 배열 상태가 늘 안정되고 평안한 위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웃었던 것이다.

    이렇게 충동과 욕구에서 해방되어 원자가 평안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부동심을 의미하는 아타락시아(Ataraxia)고 규정했고, 이것이 현자들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쾌함은 적절한 즐거움과 균형 있는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생긴다. 부족한 것들과 과도한 것들은 변화가 심해서 혼 안에 큰 변동들을 보통 생기게 한다. 큰 폭의 변동을 겪는 혼들은 안정되어 있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다.”

       
      ▲ 마그리트 <헤라클레이토스의 강>

    변화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불’의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로 보았다면 그는 ‘불’을 모든 자연형상의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기초, 그것들의 물질적 근원으로 생각했다. 언뜻 생각하면 탈레스의 아류, 즉 물을 불로 대체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의 사유는 근원적인 물질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의 중요성을 설파했다는 점에서 그리스 자연철학에서 뚜렷하게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 불은 변화의 상징이었다. 그는 “만물은 불의 교환물이고, 불은 만물의 교환물이다. 마치 상품이 황금의 교환물이고, 황금이 상품의 교환물인 것처럼.”이라든가, “불은 흙의 죽음을 야기하고 공기는 불의 죽음을, 물은 공기의 죽음을 만들며 흙은 물의 죽음을 야기한다.”라는 주장은 일차적으로 모든 변화는 우연적인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필연적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으며 그는 이 법칙을 로고스라고 불렀다.

    또한 그에게 세계는 결코 신이나 그 어떤 전능한 힘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타오르거나 꺼지면서 영원히 계속 존재하는 불 자체였던 것이다. 그는 “세계, 즉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것은 신들 및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것은 법칙에 따라서 불타고, 법칙에 따라서 꺼지면서,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영원히 살아있는 불이다.”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수를 독립적인 본질로 절대화하거나 철학을 다시 신비적이고 신화적인 종교와 결합시키려 했던 피타고라스학파, 관념론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엘레아학파와 투쟁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켰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그리스조각 <헤라클레이토스>

    당시에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이 너무 어려워 사람들은 그를 ‘어두운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의 대표적인 명제 가운데 또 하나가 “만물은 유전(流轉)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는 주장과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또한 변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에게 변화는 대립물의 투쟁 과정이었다. “사물의 내부에는 대립물이 존재하는데, 생성이란 그 대립의 결과로 생기는 조화적인 결합이다.”라거나 “대립이야말로 유익하고, 상이한 것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생겨나며, 만물은 투쟁에 의해 발생한다.”라는 주장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하나의 전체가 상호 배제하며 맞서고 있지만 그러나 불가분하게 결합해 있는 대립물로 분열되는 것에 관한, 그리고 그들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에 관한 비범한 통찰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서양 철학에서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변증법적 사고의 원류에 해당한다.

    실제로 그의 철학은 나중에 헤겔의 변증법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헤겔은 헤라클레이토스를 거꾸로 세워서 받아들였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것의 상호 대립과 투쟁 그리고 통일을 헤겔은 철저하게 정신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헤라클레이토스의 강>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제를 묘사한 그림이다. 강물 위로 허공에서 중간이 뚝 끊어진 다리가 덩그러니 서있다. 그러나 그 밑으로 흐르는 강물에 비친 다리의 그림자는 온전한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다.

    사람들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상을 진리로 믿곤 한다. 강물은 끊임없이 위에서 새로운 물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음에도 어제와 같은 물에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마그리트는 변화를 이해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사고를 끊어진 다리와 물속의 이어진 다리로 비유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게 어디 강물만의 문제겠는가? 인간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왔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 있는 우리들은 마치 고정돼있는 그 무엇처럼 여기고 살아간다. 오늘이 영원히 지속되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특히 사회 내에서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지배세력은 오늘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고 이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현실의 불평등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립과 투쟁, 변화의 철학은 현실을 혁신하는 실천적인 힘이 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은 탈레스나 피타고라스, 데모크리토스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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