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형근 찬양은 도대체 누굴 기쁘게 할까
        2009년 08월 26일 08: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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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희망’은 지난 번 내 글에 대해 반론하지 않겠다고 댓글을 단 바 있다. 반론 포기의 책임이 마치 진정한 소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글을 오독한 내게 있는 듯이 암시하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반론이 반가운 것도 사실이다. ‘민주희망’의 글 전체가 자기 논리의 파산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쁨조’ 따위의 품격 없는 음해성 표현들은 누가 진짜 “다른 이의 생각을 받아들이려는 진지함”이 없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매년 열리는 진보 포럼 ‘맑시즘’은 ‘민주희망’처럼 참가자 상당수의 정서와 배치되는 주장도 자유롭게 토론된다. 저명한 연사들도 단지 일장 연설만 하고 끝내는 게 아니다. 연사의 견해에 대한 찬반 토론이 자유롭게 진행되며, 연사 자신도 주어진 기회를 통해 여기에 참여한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민주희망’과 비슷한 취지의 발언들도 있었고, 모두 이를 토론과 논쟁의 과정으로 여겼다. 아무도 자신과의 ‘간극’을 문제 삼지 않았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유감 그 자체’라며 불평하지 않았다.

    이런 자유로운 토론이야말로 연사들의 충실한 준비와 알찬 토론 내용과 함께 이 큰 토론회가 지난 몇 년간 대학 당국들의 장소 불허 속에서도 매년 1천여 명 이상씩 참여해 성공적으로 진행된 비결이다.

    ‘어떤’이 중요하다면서 ‘이념’은 중요하지 않다는 모순

    ‘민주희망’은 “사회주의는 안 된다고 한 적 없다”며 이를 내 오독 사례로 제시한다. 그럴려면, ‘민주희망’은 먼저 “(북한은) ‘밑바닥’에서의 사회주의인가 아닌가의 문제”라는 문장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는 문장 사이의 모순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민주희망’은 “(김하영이) 북한을 ‘중공업 중심의 군수산업화’와 인민들이 배제된 경제 결정 체제를 ‘국가자본주의’의 근거로 내세웠다”고 국가자본주의론을 요약한다. 하지만 ‘민주희망’은 왜 “인민들이 배제된 경제 결정 체제”라는 분석이 “밑바닥에서의 사회주의인가 아닌가의 문제”에서 기준이 될 수 없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인간이 굶주리는데 핵무기를 개발하고 권력을 세습하는 체제가 사회주의인지 자본주의인지 규명하지 않는다면, 대안을 찾는 데서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혼란 때문에 ‘민주희망’은 꼭 “자본주의의 대안은 사회주의”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이 “다양한 사회주의”의 일부라고 굳이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그 내용은 또 말하지 않는다. “‘어떤’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념은 그 다음 이야기”라는 앞뒤 안 맞는 주장도 한다.

    내가 볼 때 ‘민주희망’이 생각하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주대환 류의 ‘민주적 사회주의’인 듯하다. 그래서 ‘민주희망’이 거부하는 ‘이념’은 ‘이념 일반’이 아니라 바로 ‘변혁 이념’이다. 내가 오독한 것이 아니라 ‘민주희망’이 읽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사회적 힘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민주희망’의 결론적 주장처럼 “대안은 실현되기 위해 ‘사회적 힘’은 필수불가결”하다. 사회적 힘은 그 이념이 대변하고자 하는 사회 세력의 지지를 받을 때 가능하다. 맑스주의는 이 과정을 이론과 현실이 ‘실천’을 통해 끊임 없이 교류하고 충돌하며 전진하는 과정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주희망이 진보진영에 요구하는 실용주의 실천은 현실의 수동적 의식에 영합해 후퇴하자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노동계급과 민중들에게 일관되게 적대적인 정치인인 정형근을 “칭찬해도 부족”하다고 호들갑 떠는 것 아닌가. 그의 정형근 찬양은 ‘민주희망’의 대안이 “우리를 대변할 좋은 정치인을 선택하고 지지하는 것”에 머문다는 내 비판이 적절했음을 보여주는 극단적 사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보 정치 세력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반동적 공안 검사 출신으로 안기부 요직에 있으면서 고문 수사를 지휘했던 한나라당의 3선 의원 출신 정형근까지 끌어 들여 지지를 획득하려는 게 사회적 힘을 키우는 것이라면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 쓸모 있는 힘인가.

    이런 발상에서 남는 건 정치공학적 실용주의 뿐이다. 정토회 수장으로 좋은벗들, 평화재단 등을 운영하는 법륜스님은 “북한을 돕는 것이 목적이라면 누가 법안을 발의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이 법안(대북인도적지원법)을 한나라당과 함께 발의한 것”(웹진《민족화해》30호, 2008. 01~02)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북한의 고통 받고 굶주리는 대중들을 돕는 데 도움이 될까.

    인도적 대북 지원을 가로막고 고문 수사를 정당화하는 세력이 진보?

    대북인도적지원법은 ‘북한인권법’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북한 인민의 곤궁한 처지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은폐하는 효과를 낸다. 제국주의 봉쇄 정책에 반대하지 않는 이 법안이 목표한 한시적 지원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제국주의의 군사적 대북 적대와 봉쇄 정책은 북한 정권의 태도와 별개로 북한 민중의 삶이 개선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되어 왔다. 법륜스님도 스스로 “미국이 북한을 더 많이 이해하고 양보해야 한다”(웹진《민족화해》30호, 2008. 01~02)며 부분적으로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식량난의 배경이기도 한 북한의 전력난은 미국이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아직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북인도적지원법은 북한 민중의 어려움을 단순한 인도적 재난 차원의 문제로 끌어내린다. 이런 이데올로기 효과 때문에 정형근의 도움을 받았을지 몰라도 정형근이 충성하는 한나라당과 그 정권 하에서는 그나마 채택되지 못했다.

    한나라당이야말로 대북 지원을 “퍼주기”라며 반대해 온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진보정치’와 ‘실용주의’ 두 마리 토끼를 놓”친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개혁적 실용주의’다.

    그래서 법륜스님도 반(反)정부 시국 법회에 참석해 “여전히 우리 지도자들은 눈을 뜨고 귀가 열린 사람이 없다.”(오체투지매일소식, 108일차 5.21)고 현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민주희망’은 “<다함께>도 이명박 정부를 ‘반동 정부’로 낙인찍어 이명박을 괴물로 만들고 있다”고 불평한다. 모르긴몰라도 눈과 귀가 막혀 있는 존재가 권력의 정점에서 사람들을 핍박한다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그를 ‘괴물’이라 부를 것이다.

    부정직하고 저질스런 말장난에 의존해야 하는 망가진 대안

    정형근이 ‘진보’라던 ‘민주희망’은 오늘날 ‘진보’가 ‘진정한 보수’라고 주장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도망가는 자들이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수라 부르는 건 부정직하고 저질스런 말장난이다.

    다함께가 “NL의 기쁨조”라는 모욕적인 표현도 그렇다.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민주노동당은 좌파 연합체로서 출발했고, 다함께는 그 안에서 독립적인 일부로 활동해왔다. NL과 PD 모두에 지지와 함께 날카로운 비판을 회피하지 않았다. 단지 진보 운동의 대의에 흠집을 낸 (분당으로 이어진) 종북 마녀 소동에 합류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더구나 ‘기쁨조’라는 표현은 이 나라의 반동적 우익들이 급진 좌파에게 ‘친북’ 올가미를 씌워 마녀사냥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은유법이다. 사회적 은유의 추수는 사상의 종속을 보여준다. ‘민주희망’이 주대환의 길을 따라 제시하는 대안이 사회주의는커녕 민주주의조차 쟁취 못 할 꾀죄죄한 길이라는 방증이다.

    결론은 지난 글과 같다. ‘변혁 이념의 결핍’이 한때 진보였던 사람들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저항을 시작하는 새 세대에 얼마나 해악적인지 ‘민주희망’의 어지러운 주장이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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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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