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당 탈당 않는 다함께는 NL 기쁨조
    2009년 08월 24일 09: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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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도 모르면서 툭하면 ‘제국주의’ 딱지 붙이기?

진보진영의 얕은 대북관이 여실히 드러났다. 대북인도적지원법은 ‘정형근의 대북 지원법’이니 제국주의적 대북 압박을 합리화하기 위한 법? 법의 배경조차 모르다니. 한시적으로 국가 예산의 1%를 지원하자는 대북인도적지원법은 북한, 통일관련 활동단체 ‘좋은벗들’이 정형근 의원을 통해 국회에 발의한 법이다. ‘좋은벗들’의 핵심인사 법륜 스님은 불교계 진보인사로 정평이 나있다.

이 법안의 의미와 ‘좋은벗들’의 의도는 주대환 사회민주주의 공동대표의 저서 <대한민국을 사색하다>에 잘 설명돼 있다. <사색하다>에서 법륜 스님 발언을 요약, 인용하겠다.

“정형근 의원이 국정원 출신이고 극우파이기는 하지만 북한 사정을 잘 안다. 정 의원이 앞장서면 보수세력의 반발이 없다고 보고 손잡고 추진한 것이다. 대북인도적지원법의 취지는 북한의 식량과 에너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동시에 해결해주자는 것이다”

법의 배경도 모르고 툭하면 ‘제국주의’ 딱지 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반공주의자일 법한 정 의원이 이를 받아들여 발의한 것을 칭찬해도 부족하다.

탈북자와 북한 인민에 관심가지는 것이 ‘진보정치’이자 ‘실용주의’

진보정치 정의부터 하자. 진보정치는 서민과 노동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정치다. 탈북자는 한국사회의 서민이자 사회적 약자, 소수자다. 북한 인민은 북한 사회의 사회적 약자다. 한국의 진보정치는 이들에게 무관심한 게 현실이다.

탈북자와 북한 인민은 ‘통일 한국’과 ‘한반도 평화’의 현실이다. 한국사회의 낙오자와 한반도 나머지 반쪽의 낙오자다. 사회적 낙오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통일은 비극이다. 이들이 정상적인 삶과 자립이 가능하다면 통일 한국의 미래상도 훨씬 밝아진다. 통일비용과 같은 사회적 비용도 덜 든다. 진정한 ‘실용주의’다.

진보진영은 대북문제에 있어 ‘진보정치’와 ‘실용주의’ 두 마리 토끼를 놓쳐왔다. 연장선상에서 <레디앙> 독자들은 지난 글에서 탈북자와 북한 인민에 관심 가지자는 것을 ‘인도주의적 시각’으로 해석했다. 결론은 사회적 비용 감소와 사회 안정에 기여하자는 것인데 인도주의적이라니. 딱 ‘진보(진정한 보수)’의 시각이다.

‘사회주의는 안 된다’고 한 적 없다…‘어떤’을 강조한 이유

김문성 <레프트21> 객원기자는 북한 체제규정 자체 무의미함과 ‘어떤’ 사회주의를 지적한 것을 엮어서 ‘혼란’을 내보인다고 분석했다. 덧붙여 ‘어떤 자본주의인가’뿐이라고 단언한다.

‘혼란’ 아니다. 북한체제를 규정조차 하지 않았다. 굳이 규정한다면 ‘수령체제’다.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어느 것으로 보지 않는다. 지난 글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현실에서 실현된 사회주의 국가는 없다고 본다.

<다함께>의 ‘자본주의의 대안은 사회주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사회주의는 무조건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할 수 없다. ‘가장 나쁜 사회주의가 가장 나은 자본주의보다 낫다’는 것도 없다. ‘어떤’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도 사회주의는 하나라거나 혹은 고정불변으로 보지 않았다. 민중들에 의해 사회주의가 변화와 발전을 모색한다고 했다.

이념보다 더 중요한 것, 이념 실현위한 ‘사회적 힘’과 ‘사람’

대안은 실현되기 위해 ‘사회적 힘’은 필수불가결이다. 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가 시효를 다했다고 하더라도 대안이 없으면 신자유주의체제는 그대로 지속된다고 말했다. 손호철 교수는 진보진영이 “대안을 관철시킬 수 있는 사회적 힘이 없다”며 “있는 대안조차 관철시키지 못하는 사회적 힘의 부재가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사회적 힘’처럼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정치는 신이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기반이 있어야 한다. 진보정당 민주노동당도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만들었다. 울산 북, 동구 집권도 찍어준 노동자, 서민이 기반 덕택이다.

‘사람’의 보편적인 삶, 밑바닥까지 들어가 그들을 존중해 ‘아래로부터의 혁명’ 기반을 만들어야 된다. 이념은 그 다음 이야기다. 좋은 이념과 정책만으로는 집권할 수 없다. 전태일 열사가 거창한 이념을 가지고 있어서 존경받는 게 아니다. 노동자를 진정으로 아낀 휴머니스트였다.

‘사회적 힘’과 ‘사람’없이 정치할 수 없다. 이념 실현도 할 수 없다. <다함께>의 구호 “자본주의 대안 사회주의”를 보면서 중요한 건 정작 놓치고 있음을 느낀다. <다함께>는 지금 무엇을 실천해야 될지 모르고 있다.

<다함께>는 민주노동당 탈당 안하면 ‘NL의 기쁨조 수준’

정치단체는 정치적 행보로 평가받는다. 정치행보와 함께 따진다면 <다함께>의 주장은 모순된다. 민주노동당에 남아있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다. 의회주의를 거부하는 <다함께>는 의회주의와 선거집권을 통한 진보정치 방법으로 삼는 민주노동당에 맞지 않다. 당 내 다수파 NL도 <다함께>의 기조에 동의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다함께>는 ‘북한에 비판적인 사회주의’ 모색과 급진 좌파적 정치실현을 위해서는 민주노동당을 탈당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에 남아있는 지금의 <다함께>는 딱 ‘NL의 기쁨조’다. <다함께>의 말이 모두 옳다고 한들 그들의 정치적 행보와 위치가 부합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다함께>는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와 위치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럴 법한 것이 <다함께>도 이명박 정부를 ‘반동 정부’로 낙인찍어 이명박을 괴물로 만들고 있다. ‘민주노동당 정권퇴진운동본부’처럼.

* 유감

늦었지만 김문성 <레프트21> 객원기자의 반론은 온건파와 급진파의 또 다른 대화의 물꼬를 텄다. 반론에는 재반론하는 것이 예의다. 그러나 글을 읽고 ‘재반론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불쾌했다. 김 기자의 태도 때문이다.

김 기자는 서두에서 “맑시즘2009를 제대로 해석하고 참가할 의지가 없는 것 같다”며 폄하했다. ‘오독’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도 “핵심은 오독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식의 태도를 견지했다. ‘한 민주주의자’의 입장으로 참가한 이의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려는 진지함은 전혀 없다.

“비록 ‘민주희망’이 자신의 메시지에 당의정을 입히는 데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의 글에는 맑스주의 좌파가 공개적으로 반박해야 하는 일관된 메시지가 있다”는 대목이나 “‘맑시즘2009’는 ‘민주희망’의 냉소와 달리 매우 유익하고 고무적인 기회였다”는 대목은 유감 그 자체다.

재반론에 나서게 된 것은 이번 논쟁을 시작으로 해서 진보진영 전체에 대한 고민을 심화하고 재구성에 모색하기 위함이다. 이 글은 김 기자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이자 나의 ‘모색의 시작’을 알리는 글이다.

글에서 “<다함께>도 이명박 정부를 ‘반동 정부’로 낙인찍었다”고 썼는데 김 기자의 반론 중 “문제는 대중의 동의를 상실한 정권이 자본을 위해 억압적 국가기구를 총가동하면서 온갖 반동 정책들을 밀어붙이려 한다”는 데 근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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