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선거구제, 입에 담을 만한 제도인가?
    2009년 08월 21일 04: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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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로 선거제도를 개혁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중대선거구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도 주장하던 것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중대선거구제가 지역주의 정치 구조를 혁파하는 정치 개혁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이 문제는 여러 각도에서 짚어볼 수 있겠지만, 그 중 한 접근법은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선거제도가 어떠한지 따져보는 일이다. 이를 통해서 민주주의의 발전과 선거제도의 연관성에 대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연관 관계 속에서 중대선거구제가 과연 얼마나 쓸 만한 것인지 드러날 것이다.

중선거구제는 세계적으로 예외적인 선거제도

우선 개념부터 분명히 해야겠다. 많은 이들이 ‘중대선거구제’라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 선거구에서 2인 이상의 당선자를 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냥 ‘중선거구제’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 전 세계에서 입법기관의 전부 혹은 일부를 뽑는 데 이런 중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은 어디일까?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원주민 할당제 등을 적용하기 위해 극히 부분적으로 중선거구제를 실시하는 나라는 제외했다).

아프가니스탄, 안도라, 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 케이만 군도, 지부티, 인도네시아, 아일랜드, 쿠웨이트, 라오스, 레바논, 라이베리아, 몰디브, 몰타, 모나코, 팔레스타인, 필리핀, 폴란드, 사모아, 세네갈, 싱가포르, 스페인, 타이, 투발루, 영국의 북아일랜드 자치의회, 바누아투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요즘 이야기되는 ‘중선거구제’는 과거 일본이나 우리의 제4, 5공화국 시절에 실시됐던 국회의원 선출 방식이다. 즉, 유권자는 소선거구제와 마찬가지로 1표씩만을 행사하지만 당선자는 1위만이 아니라 2인 이상이 되는 제도다.

위의 나라들 중에서 이런 방식의 중선거구제를 실시하는 나라는 사실 거의 없다. 아프가니스탄, 오스트레일리아, 케이만 군도, 인도네시아, 아일랜드, 라이베리아, 몰타, 모나코, 타이, 투발루, 영국의 북아일랜드 자치의회, 바누아투에서 실시하는 중선거구제는 이와는 아주 다르다.

이들 나라에서는 한 선거구에서 여러 명의 당선자를 내되, 유권자들이 선호투표제라는 방식으로 투표권을 행사한다. 한 명의 후보에게만 표를 던지는 게 아니라 여러 명의 후보에 대해 선호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가장 선호하는 후보자가 당선자군에서 탈락한다 할지라도 2차, 3차로 선호하는 후보에 대한 의견이 선출 결과에 반영되게 한다.

예를 들면, 유권자 ‘가’는 1차 선호 후보로는 a후보에 기표하고 2차로는 b후보에 기표했다. 그런데 a후보는 일찌감치 당선자군에서 탈락했다. 이 경우 유권자 ‘가’의 표가 그대로 사표가 되는 게 아니라 b후보의 표로 합산된다.

이런 제도는 사실 소선거구제의 원리보다는 비례대표제의 원리에 가깝다. 유권자의 의견 중 최대 다수를 가리는 게 아니라 유권자의 다양한 의견을 보다 정확히 반영하는 데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학자들은 이렇게 중선거구제와 선호투표제가 결합된 선출 방식은 일종의 비례대표제라고 본다. 구 일본, 제4, 5공화국 식 제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위의 목록에서 이런 식의 중선거구제를 운용하는 나라들을 제외하면 남는 나라는 얼마 안 된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브라질, 필리핀, 폴란드, 스페인은 입법기관 중 일부, 그것도 하원에 비해 중요성이 덜한 상원의 경우에만 중선거구제를 실시한다. 하원의 선출 방식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중심을 이룬다.

결국 지금 우리나라 보수 정치권에서 도입하자고 하는 방식의 중선거구제를 입법기관의 주된 선출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은 다음 국가들뿐이다.

안도라, 지부티, 쿠웨이트, 라오스, 레바논, 몰디브, 팔레스타인, 사모아, 세네갈, 싱가포르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지금 이 나라들의 대열에 합류하겠다는 것이다. 한 눈에 봐도 뭔가 ‘민주주의의 발전’과 좀 거리가 있는 나라들의 대열에 말이다.

민주주의의 상식은 전면적 정당투표제

내친 김에 입법기관 선출 방식으로 전면적인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는 나라들을 살펴보자. 놀랍게도 대다수의 발전된 민주 국가들이 전면적 정당투표제를 실시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독일과 같은 경우 소선거구제를 함께 실시하지만 의석 배정은 정당 투표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전면적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혹은 ‘전면적 정당투표제’에 포함시켰다.)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벨기에, 볼리비아, 브라질(하원), 불가리아, 칠레, 체코, 콜롬비아, 덴마크,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핀란드, 독일, 그리스, 헝가리, 아이슬란드, 인도네시아, 이스라엘,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니카라과, 노르웨이, 파라과이, 페루, 폴란드(하원), 포르투갈, 루마니아, 러시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페인(하원), 스리랑카, 스웨덴, 스위스, 터키,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등등

주요 국가들 중 어떤 식으로든 정당투표제를 실시하지 않는 나라는 캐나다, 프랑스(소선거구제이되, 의원 선거에서도 결선투표제를 실시), 인도, 말레이시아, 영국, 미국 정도뿐이다. 게다가 이들 나라에서도 요즘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높다.

각 국 사례의 검토를 통해서만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중선거구제를 실시한다 하더라도 선호투표제와 결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시기든 지금 이명박 정부든 투표 방식의 변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이들은 표의 비례성이 아니라 철저히 당선자의 숫자에만, 다시 말하면 유권자의 입장이 아니라 정치세력의 입장에서만 선거제도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들이 추진하는 정치‘개혁’의 실상이다.

둘째, 민주주의의 상식은 오히려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다. 정치‘개혁’을 이야기한다면, 결론은 정당투표제의 전면 실시다. 진보신당의 현재 입장도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부합한다.

셋째, 1인 1표와 복수 당선자 선출을 결합시키는 구 일본과 제4, 5공화국 식의 중선거구제는 발전된 민주 국가의 상식에 부합하는 제도가 아니다.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야기하면서 입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의 기초의원 선거에서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하다. 하물며 이를 국회의원 선출 방식으로 채택하자는 것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시계를 민주화 이전의 과거로 되돌리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시민들은, 외관상 복잡하기만 한 듯 보이는 선거제도 논의의 이면에 놓인 이러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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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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