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희망’의 ‘맑시즘2009 참가기’ 유감
        2009년 08월 19일 03: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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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시즘2009 참가기를 표방했지만 ‘민주희망’이 7월말 <레디앙>에 기고한 두 개의 글(글➀, 글➁)은 맑시즘2009라는 ‘토론 광장’의 논의들을 제대로 해석하고 거기에 참가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비록 ‘민주희망’이 자신의 메시지에 당의정을 입히는 데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의 글에는 맑스주의 좌파가 공개적으로 반박해야 하는 일관된 메시지가 있다.

    ‘민주희망’은 두 글에서 사회주의라는 총체적 변혁 전망이 실패했고 거리의 운동도 대중의 외면을 받았으므로 제도권 정치에서 우리를 대변할 좋은 정치인을 선택하고 지지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민주희망’은 “말만 하는 진보진영과 달리 ‘법’으로 북한 인민 프랜들리 노선을 택한 것이 정형근 의원과 <중앙일보>”라고 주장한다. 제국주의의 대북 압박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형근의 대북지원법이 “인민 프렌들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10년간 경제봉쇄로 1백만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이라크 사례에서 보듯, 인도주의를 핑계로 한 미국 제국주의의 경제 봉쇄와 압박이야말로 가장 반(反)인민적이다.

    실전에 핵무기를 사용한 유일한 국가의 지배자들이 자기 나라에 수만 기의 핵탄두를 쌓아놓고 평화를 위한 핵억지 전략을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들은 인민을 대량학살하는 폭격 작전을 실제로 시작하려 했던 자들이다. 진보 진영 일부가 탈북 문제에 진지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우익의 눈가림식 인도주의가 더 낫다는 것은 “목욕물 버리다 애까지 버리는 격”이다.

    ‘민주희망’의 이런 태도는 북한 체제가 철저히 실패했다는 인식에서 나온 듯하다. 그는 “북한은 체제규정 자체가 무의미한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또 “‘밑바닥’에서의 사회주의인가 아닌가의 문제다. ‘어떤’이 문제”라고 하며 혼란을 내보인다. 그러나 그에게 이미 “사회주의 자체는 답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에 대한 물음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남는 답은 ‘어떤 자본주의인가’ 뿐이다.

    ‘민주희망’ 식이라면 남은 답은 ‘어떤 자본주의인가’ 뿐

    과연 그러한 대안부재론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날 ‘맑시즘2009’ 토론의 핵심 쟁점이었고, 패널 중 하나였던 김하영 씨가 ‘국가자본주의론’을 통해 반박하려던 주장이었다.

    즉, 옛 소련 등은 자본을 국가 소유로 집중해 국가가 총자본 구실을 하려 한 국가자본주의였다. 따라서 이곳에서 벌어진 억압과 빈부 격차는 바로 계급 분단에서 비롯한 것이다. 평양의 화려함은 단지 ‘민주희망’의 말한 “지역 갈등”이 아니라 계급 사회의 모순이 공간이라는 매개로 드러난 것이다.

    이런 스탈린주의 체제의 붕괴가 자본주의 모순의 결과라면 우리의 21세기 변혁 전망도 달라질 수 있다. 세기의 벽두에 전례 없는 규모의 위기에 봉착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21세기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전망은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북한 체제의 실패를 자본주의의 승리로 보고 우익으로 전향한 뉴라이트들과 달리 우리는 남한 우익들의 위선에 속거나 남한 체제를 유일한 대안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북한 인민의 인권과 계급투쟁에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옛 소련 등 스탈린주의 체제의 성격을 분석하는 이론이 반드시 필요하다. ‘민주희망’의 사회주의 실패론은 예상대로 자본주의의 강력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흘러간다.

    남한 체제를 대안 삼지 않더라도 북한 내부 투쟁 말할 수 있어

    경제에 관한 두 개 토론의 소감문이라는 둘째 글에서 그는 “진보파는 대안과 실력, 세력에서 실패해왔다. … 지난 10년, 한국사회는 자본의 시대가 되었다.” “‘슈퍼자본’의 시대”에는 “기득언론과 대자본세력의 말이 곧 정책이 됐다. 그들의 목소리가 곧 국회의원의 목소리가 됐다” 고 주장한다.

    반면, “운동은 계속 대중과 멀어지고 서민과 노동자에 기반한 사회적 기반조차 상실했다. 곧 대중의 외면으로 연결됐다. 민생은 계속 나빠지고 자본에 대한 투쟁 운동은 운동권만의 사투리가 되었다.”

    결국, 사회주의도 실패했고, 운동도 실패했고 자본가들은 더 강해졌기 때문에 다함께처럼 (북한 체제에 비판적이면서도) 사회주의 대안을 계속 모색하는 것은 “이념 과잉”이다. 이제 대중은 자본의 포섭에 취약하므로 “직접민주주의”를 포기하고 “간접민주주의” 즉 의회제 대의 정치에 충실해야 한다.

    따라서 ‘민주희망’이 바라는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대중에게 외면 받는 자본에 대한 투쟁을 중단하고 운동권 사투리에서 벗어난 정치인을 수동적으로 지지하자는 것에 머물러야 한다는 주문에 불과하다.

    ‘민주희망’ 주장은 수동적 의회정치일 뿐

    일단, 지난 몇 년간 “자본에 대한 투쟁운동”이 마냥 실패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날치기 범죄자 집단들은 한미FTA를 여지껏 국회에서 비준하지 못하고 있다. 의료를 포함한 각종 사기업화 정책의 추진 속도는 매우 더디다. 올해 비정규직법 개악 시도는 일단 좌절됐다. 이들 의제에서 진보 운동의 주장은 국민적 공감대를 얻었다. ‘민주희망’을 좌절하게 했 “그들” “국회의원의 목소리”가 “대중의 외면으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중의 동의를 상실한 정권이 자본을 위해 억압적 국가기구를 총가동하면서 온갖 반동 정책들을 밀어붙이려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본에 대한 투쟁 운동”은 ‘민주희망’의 말마따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 필요한 정치는 ‘민주희망’의 것과 다르다.

    쌍용차에서 기업주들과 정부는 고용 유연화 즉, 대량해고의 의지를 관철해 한국 전체의 시범 케이스로 삼으려 했다. 따라서 이 투쟁은 국가와 대결하는 정치 투쟁이었다. 그러나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지도자들은 전형적인 한 부문의 생존권 투쟁으로만 이 투쟁을 대했다. 단지 노사간 협상이나 정부나 정치권의 중재 노력을 촉구하는 로비에 더 신경 썼다.

    민주노총, 쌍용차 투쟁에서 로비에 빠져

    실제로 기업이 파산하는 수준의 경제 위기 속에선 일자리 투쟁조차 대안을 내놓으라는 압력에 부딪힌다. 생존권 요구조차 폭압적 국가기구와 마주쳐야 한다. 따라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동원해 단결시켜 국가와 대결할 실천적 전략・전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선거 대응 이상의 목표를 지녀야 한다.

    그 점에서 ‘고장 난 자본주의, 대안을 말하다’라는 모토로 진행된 ‘맑시즘2009’는 ‘민주희망’의 냉소와 달리 매우 유익하고 고무적인 기회였다.

    4일간 주로 20대 청년들로 구성된 참가자 1천여 명은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분석에서 개혁과 혁명의 전략 문제까지 자유롭게 토론하며 진지하게 대안을 모색했다. 이들 중 일부는 쌍용차와 미디어법 날치기 항의를 위해 정해진 강연을 취소하고 진행한 ‘거리의 맑시즘’에 동참하기도 했다.

    이처럼 거리의 운동과 노동계급의 투쟁, 그리고 총체적인 변혁 전망의 결합, 즉 이론과 실천의 종합이 지금 좌파에게 던져진 과제다. 지금 좌파의 약점은 이념의 과잉이 아니라 ‘변혁 이념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의 초안을 잡던 시점에 쌍용차 파업이 마지막 고비를 맞이했고, 평택으로 달려와 달라는 호소가 이어졌다. 이 때문에 반론의 시점이 늦어진 점은 개인적으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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