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화가 된 사건과 그 쓰레기들
        2009년 08월 17일 08: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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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 또는 신화가 되는 사건들이 있다. 어떤 사건이 전설이나 신화가 되는 것은 그것이 새롭고 경이로우며 이상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경험이 일상화되지 못하고 한 번 반짝 나타났다가 이후 다시는 되풀이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경험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한동안 그 경험의 재현을 위해 열광하게 하지만 도저히 되살릴 수 없는 것이어서 마침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단 한번 가능한 현실이었으나 그 한 번의 가능함으로 인해 그 후로 다시는 가능해질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는 사건. 우드스탁 록 페스티벌이 그렇다.

    단 한번만 가능했던 현실

    이제 한국에서도 해마다 여름이면 외국 유명 뮤지션을 불러 휴양지에서 며칠씩 치러지는 록 페스티벌이 정례화되었다. 하루 입장권 가격이 적게는 5만 원, 3일권이면 16만 5천원이나 하는 록 페스티벌의 수익성을 둘러싸고 송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과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이 서로 경쟁하면서 서로 자기네가 한국의 우드스톡이라고 홍보한다.

    이렇듯 우드스탁은 현대의 전설이며 신화다. 그것은 대중문화의 이상적인 모습을 새로운 기획으로 경이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든 사건이었다.

       
      ▲ 1969년 미국 뉴욕의 한 전원도시에서 열린 우드스탁 락 페스티벌

    사랑과 평화를 외치는 히피 문화가 1969년에 꽃피운 우드스탁은 록 페스티벌이지만 록뿐 아니라 포크, 컨트리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던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두루 참여한 대중음악 페스티벌이었다. 비상업적이고 화합적이며 진취적인 대중음악 페스티벌이 자발적인 50만 명의 대중과 뮤지션들의 참여 속에 삼일 밤낮을 두고 벌어질 수 있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 시기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장악하던 시기였으며 그 장소는 자본주의의 맹주 미국이었다. 말콤 X, 마틴 루터 킹, 케네디 같은 거물급 인사들이 대중의 눈앞에서 총격을 받고 죽어간 나라, 세계 경찰의 이름으로 베트남에서의 학살과 중남미에서의 협잡을 정당화하는 나라,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세계의 절대 강자 미국에서 ‘사랑과 평화’의 축제가 벌어진 것이다.

    인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놀이에 있다고 할 때 함께 놀 수 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이야 어쩔 수 없이 싫은 사람과 해야 할 때도 있지만 노는 것만큼은 싫으면서도 억지로 함께 할 수 없는 일이다.

    노는 것이 정치적인 경우

    우드스탁이 사람들에게 환기시킨 것은 개별적인 세계에서 놀던 여러 ‘딴따라’들이 한데 모여 노는 것 자체가 사건이 될 만큼 세상이 갈라져 있다는 사실이며 함께 놀 수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 그리고 노는 판 자체가 정치적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희망에 넘쳐 새로운 이상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발터 벤야민이 예견한 것처럼 민중의 당파성을 담아내는 새로운 예술이 되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천민성에 봉사하는 상품이 되어 있던 기술복제 시대의 대중문화 속에 잠들어 있던 엄청난 힘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한 번의 사건이었다. 우드스탁 자체의 양면성 자체가 그것이 확대 발전되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현실에 대해 발언하되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에서 외치는 목소리는 그 뒤에 남겨진 엄청난 쓰레기처럼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다.

    환각을 통해 무의식을 체험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약물사용은 점차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자기파멸적인 남용으로 이어졌다. 약물에 의해 부채질된 감춰진 힘에 대한 자각은 폭력의 행사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스타에 대한 환호는 메시지와 무관한 열광으로 이어졌으며, 대중에 대한 권력을 배운 뮤지션들은 자신들의 상품가치를 극대화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록 음악이 소위 청년문화를 이용하는 자본가(hip capitalist)에게 장악되어 가면서 저항의 상징이던 록 아티스트들은 백만장자가 되었다.

    저항의 상징에서 백만장자로 

    자본주의의 탐식성이 그런 종류의 대규모 공연이 가지는 상업성을 포착하면서 이후 록 페스티벌은 이들 자본의 비즈니스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우드스탁에서의 행복한 경험은 다시 되풀이되지 않았다.

       
      ▲ 1969년 우드스탁 공연 모습

    이런 부정적 모습은 같은 해 12월 9일 열렸던 롤링스톤즈의 알타몬트 공연에서 빚어진 참극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른바 ‘알타몬트의 비극’이라고 불리게 된 이 사건은 공연에서 롤링스톤즈가 고용한 지옥의 천사들이라는 장내정리 요원들이 무대 위로 뛰어오르려는 청중 가운데 한 명인 흑인 청년을 과잉방어한 끝에 칼로 난자해 살해한 사건이다.

    알타몬트의 비극은 사랑과 평화를 외쳤던 60년대의 꿈은 70년에 들어 우드스탁으로 절정을 맞자마자 바로 종언을 고하게 만든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드스탁은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된 것이다.

    영화 <우드스탁>은 그 전설이며 신화에 대한 기록이다. 와이드 스크린의 화면에 우드스탁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담아내는가 하면 분할된 화면을 통해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모습들을 골고루 나누어 담는다.

    장악되기도 하고 분유(分有)되기도 하는 이런 와이드스크린과 분할화면의 사용은 우드스탁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사태에 양면성에 조응하는 형식으로서의 화면 사용과 편집을 통해 <우드스탁>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기록영화’적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억지 통합보다 다양성 인정

    분할화면은 하나의 스크린 안에서 페스티벌이 벌어지는 현장 곳곳의 다양한 모습들을 동시에 보여준다.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뮤지션들의 퍼포먼스, 관객들의 반응, 맨몸으로 어우러져 노니는 히피들의 유희 등 다양한 모습들이 시간차를 두고 편집되어 매끈하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스크린 안에서 각기 다른 장면을 동시다발적으로 드러내면서 거대한 페스티벌의 여러 측면을 기록하고 풀어낸다. 억지로 통합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담아내는 기법인 것이다.

       
      ▲ 영화 <우드스탁> 포스터

    이 <우드스탁>이 처음 선을 보였을 때는 상영시간이 180분이었다가 블루레이로 새로 출시된 것이 무려 228분이니 네 시간에 이르는 긴 영화지만, 3일 밤낮을 제대로 보자면 그 정도 시간은 당연하다고도 하겠지만 어지간한 여건이 아니면 제대로 감상하기 만만한 영화가 아니다. 모처럼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기회가 열린다. 그것도 무료로.

    한국영상자료원은 8월 18일부터 30일까지 13일 동안 상암동 시네마테크에서 ‘볼륨을 높여라! 한국 대중음악 그리고 영화’를 개최하는데 이 프로그램 가운데 <우드스탁>도 들어있다. 필름 상영이 아니라 새로 편집된 블루레이 상영이니 예전 편집본을 봤던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한국 최초의 뮤지컬 영화로 불릴 만한 <청춘쌍곡선>(1956, 한형모)에서부터 한국 최고의 록 뮤지션으로 꼽히는 ‘신중현과 엽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전설의 연주를 들려주는 <미인>(1975, 이형표), 윤도현이 주연을 맡았던 <정글스토리>(1996, 김홍준), 독재정치가 대중문화의 목을 조이던 70년대를 그려낸 <고고 70>(2009, 최호)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왔던 한국영화와 대중음악의 역사를 짚어 볼 수 있다.

    덤으로 8월 21일 <미인> 상영 후에는 주연을 맡은 신중현의 아들 신윤철과 신석철이 함께 하는 ‘서울전자음악단’의 공연과 8월 28일 <청춘대학> 상영 후에는 ‘문 샤이너스’의 공연도 마련되어 있다. 신파에서 저항까지, 뽕짝에서 사이키델릭까지 다양한 음악과 영화의 어우러짐을 두루 즐기면서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의 맥락까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모든 영화와 공연이 공짜라는 것도 즐거운 일이고.
    (자세한 프로그램은 http://www.koreafilm.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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