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달려간다 용산으로
        2009년 08월 17일 10: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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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 30일 저녁 용산참사 192일째를 맞아 ‘작가선언 6.9 북콘서트’가 홍대앞 작은 카페에서 열렸다. 용산참사 반년의 기록들이 으로 증언으로 연극으로 영상으로 그리고 시와 글로 생생히 되살아났다. 

    작가들이 시와 글을 낭송하자 사람들은 어두운 조명에 얼굴을 숨기고 흐느껴 울었다. 소리내어 우는 이는 없었으나, 들썩이는 어깨를 통해 모두가 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레디앙>은 ‘작가선언’팀의 동의를 얻어 이 날 낭송되었던 글과 시를 몇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 낭독하고 있는 권여선 소설가 (사진=작가선언 6.9)

    오래 전에 철거 반대 시위를 다룬 단편 소설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정말 오래 전입니다. 아주 오래 전입니다. 그 소설의 일부분을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오래전 그는 지금 세 들어 살고 있는 이 아파트 지역에서 벌어진 철거 반대 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때 대단위 고층 아파트는 설계도면 속에서나 존재하고 있었고 산동네 전체는 바위에 닥지닥지 붙은 조개처럼 경사를 따라 낮게 포복하여 비좁게 처마를 맞댄 판자지붕 일색이었다. 정치적 누설이나 폭로를 목적으로 하는 게릴라식 도심지 시위와 달리 생존을 건 빈민촌 시위는 한쪽이 나가떨어질 때까지 끝날 줄 모르는 전면적인 이종격투의 양상을 띠었다.

    시장 입구 정육점에서 단체로 고기를 먹고 나온 철거반원들이 힘차게 휘두른 못 박힌 각목에 시위 눈칫밥을 꽤 오래 씹었다고 자부하는 그의 턱조차도 가로세로로 십여 센티쯤 깊이 파이는 악운을 면치 못했다. 시위가 끝난 후 대부분의 철거민 가장과 대학생들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동사무소 바닥에 쓰러졌다. 철거반 청년 하나가 이상한 가루가 담긴 봉지를 가져와 피를 많이 흘리는 사람들을 골라 뿌려주었다. 부상자들은 청년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면서도 뿌려지는 가루 밑에 자신들의 크고 작은 상처 부위를 얌전히 내밀었다. 뽀개진 게 아닐까 싶게 퉁퉁 부어올라 자두만 한 봉오리를 매달고 핏물을 뚝뚝 떨구는 그의 턱에도 거친 입자의 가루가 뿌려졌다. 고개를 치켜들고 가루가 떨어지는 자리에 턱을 받쳤지만 가루는 코와 입 속으로도 들어왔다. 그때 그는 이 정체불명의 가루가 혹시 쥐도 새도 모르게 저들의 손에 맞아 죽은 동지의 뼛가루가 아닐까 의심했지만, 그런 우려와는 상관없이 가루가 닿자 피는 신기하게도 초콜릿처럼 굳었다.

    턱의 외상은 꿰매지 않고 내버려둔 탓에 불룩하고 반짝이는 흉터를 남기고 아물었다. 그 후부터 그는 말린 무화과처럼 쪼그라든 혹을 매만지며 혹부리 영감다운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들었는데 또 언제부턴가 그 버릇이 없어졌다. 그런데 지금 불현듯 그는 다시 옛날 옛적의 꽃봉오리, 그날의 시든 상처를 더듬으며 지게차가 판잣집을 후려치듯 누군가를 때려눕히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일 수 있듯이 누군가를 때려눕히려다 누군가에게 때려눕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쪽도 그다지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트라우마」,  『처녀치마』(이룸, 2004)

    이 글은 제가 10년 전에 한 계간지에 발표한 소설입니다. 그리고 이 글에 등장하는 남자가 철거 반대 시위에 참석한 것은 그보다 10년 전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소설 속 사건이긴 하지만, 이 철거 반대 시위 장면은 20년 전 사건인 셈입니다.

    10년 전 제가 이 글을 발표했을 때 몇몇 사람들은 왜 이렇게 철지난 얘기를 철지난 방식으로 쓰냐고 했습니다. 꼭 그때문은 아니겠지만 저는 8년 동안 무관심 속에 잊혀진 작가가 되었습니다. 8년 만에 간신히 첫 작품집을 묶어낼 때 저는 이 소설을 두 번째 자리에 놓았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인 ‘트라우마(trauma)’란, 거칠게 말해, 어떤 과거의 사건에 정신적으로 고착되어 그것의 해소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심리적 상처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저 역시 트라우마가 아주 심했습니다. 저는 80년대라는 격동의 시절을 건너뛰고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8년 동안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너무 개인적인 얘기만 하고 있지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제가 다시 8년, 아니 10년 동안 잊혀진 작가가 된다 하더라도 철거 문제로 글을 쓰는 것이 철지난 얘기가 되는 시절이 왔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런 글을 쓰냐고, 언제까지 과거 얘기만 할 거냐고 타박을 받았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압니다. 철거 문제든 민주주의 문제든, 모든 것이 철지난 얘기가 아니라 시급한 제철의 문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을. 이명박을 비롯한 저 불의의 권력이 끝장난다 하더라도 용산의 슬픔은 이미 너무 크고 깊어 결코 철지난 얘기가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저를 이곳까지 불러와 용산 앞에 두 손을 모으게 만든 것은, 용서도 구하지 않고 잊기만을 기다리는 저 철면피한 세력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들이 구원처럼 기다리는 것은 망각입니다. 저 사나운 세력들과 싸우려면 우리는 하루하루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의 목록을 가슴에 끌로 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망각을 믿는 세력들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우리가 오래된 나무 도마처럼 우리 가슴 속에 수많은 기억의 칼금을 간직하는 데 있습니다. 아리고 분하고 피가 맺히게 억울하지만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보잘 것 없습니다. 저들을 때려눕히거나 저들에게 때려눕혀지거나 하는 가슴 벅찬 기개가 이제는 제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잊지 않는 것. 분주한 일상 속에서 잠깐 잠깐 잊을 수는 있더라도 결코 아주 잊지는 않는 것.

    제 소설에 나온 그 시절에만 해도 철거를 반대하기 위해 젊은 학생들이 가리봉동, 사당동, 상계동 가리지 않고 득달같이 떼로 달려와 합류하곤 했지요. 그렇게 스크럼 짜고 달려와 줄 젊은 학생시위대도 없는 요즘, 고독하고 힘들게 견디시는 용산의 유가족 분들과 신부님들과 범대위 분들께 깊은 공감과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작지만 알차게 자리를 지켜주셨던, 그리고 앞으로도 지키게 될 <작가선언 6.9>의 작가분들께도 수줍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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