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형적 사회가 낳은 기형적 청소년 문화
    By mywank
        2009년 08월 12일 10: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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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는 우상을 뜻하는 그리스 말이었던 ‘아이돌’은 젊은 층에게 인기 있는 스타를 가리키는 말로 뜻이 바뀌면서 국어사전에는 아예 ‘아이돌스타’라는 외래어로 올라있다. 청소년 장래 희망 직업 1순위가 대통령도 아니고, 사업가도 아니고, 의사나 판검사 따위 ‘사’자 붙은 직업도 아닌 연예인이 된 것이 이미 한참 된 사회에서 아이돌은 청소년들의 우상이 된 지 오래다.

    이 우상들은 자본주의 문화가 미디어와 결합하면서 만들어낸 대표적 문화 상품이 되었다. 아이돌은 각종 오락 연예 프로그램, 광고에서 TV 드라마, 영화,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TV를 기점으로 해서 시청각 미디어가 다룰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전방위적으로 인기몰이를 하면서 청소년 문화를 주도한다.

    대학입시가 최대 과제가 된 청소년들에게 아이돌은 즐기면서 성공할 수 있는 삶의 모델로 비춰지지만 막상 아이돌이 되는 것이 입시나 고시보다 만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한 경쟁과 수련, 인내를 요구한다. 우연히 오다가다 발탁된다는 길거리 캐스팅은 신화에 가깝고, 대부분의 아이돌은 각 연예기획사의 오디션이라는 관문을 거쳐야 한다.

    길거리 캐스팅은 신화…학원 거쳐 오디션으로

    대표적인 아이돌 중심의 연예기획사 오디션만 해도 입시보다 치열하다. 가령, 이번 동방신기 사태의 중심에 있는 SM 엔터테인먼트는 매주 토요일 공개 오디션을 치른다. 빅뱅이나 2NE1으로 대표되는 YG 엔터테인먼트는 밀려드는 오디션 지원자를 감당하는 방법으로 공개오디션이라는 번거로운 절차 대신 오로지 우편 오디션만 치르는데 여기 지원하려면 가요 한 곡과 팝송 한 곡이 포함된 데모 자료를 만들어 보내야 한다.

    비를 만들어냈었고 원더걸스와 2PM으로 아이돌 열풍의 한 축을 이끄는 JYP 엔터테인먼트는 매월 첫째, 셋째 일요일의 공개 오디션 뿐 아니라 우편과 e-mail 오디션을 통해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지원자를 받는다.

       
      ▲ JYP 연습생 공채 포스터

    그런데 이 오디션을 통과한다고 바로 아이돌스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오디션은 단지 연습생이 될 자격을 얻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일 뿐이다. 이 오디션의 경쟁률이 보통 800:1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공개 오디션에서 연습생 지원자가 자기를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1분 남짓, 짧으면 20초 안에 끝나기도 하니 지원자들은 재수, 삼수는 기본이고 심하면 여러 해에 걸쳐 수백 번씩 온갖 기획사의 문을 두드리며 합격 통지서를 받기 위해 애를 태우게 된다. 연습생 오디션을 위한 댄스 학원, 연기 학원, 음악 학원에 다니며 내공을 키우는 기간도 한참이다.

    그러다보니 연예기획사 연습생이 된 것만으로도 이미 학교나 또래집단에서 유명인사가 되고 팬클럽이 생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직 연예인이 된 것도 아닌 연습생의 팬클럽 회원 숫자가 3~4만 명씩 되기도 한다.

    연습생 스타와 팬클럽

    자발적으로 모인 팬은 잠재적 고객이다. 그래서 기획사들은 자신들에게 미래를 맡겼을 뿐 아직 정식으로 계약을 한 것도 아닌 이들 연습생의 팬클럽 자체가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을 잘 알고 관리한다.

    그 관리를 맡아보는 일을 맡아보는 부서가 CRM, 풀어쓰면 ‘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즉 고객관계관리를 하는 부서다. 원래 CRM이란 마케팅 용어로 신규고객 획득, 기존고객 유지 및 고객 수익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고객 행동을 이해하고 영향을 주기 위한 광범위한 접근을 이르는 말이다. CRM의 핵심은 바로 한번 접한 고객은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각종 포털 사이트를 통한 팬클럽 활동이 쉽사리 이루어질 수 있고, 정보 공유도 쉽기 때문에 아이돌 지망생들은 연습생 시절부터 이미 기획사와 대중의 시선 안에서 움직인다. 그러면서 몇 년씩 소속사 연습생들끼리의 경쟁을 거쳐 가까스로 데뷔하게 될 기회를 얻는 것이 또 수십 대 일의 좁은 문이다.

    팬들은 방송국 음악프로 방청권에 목을 매고 방청권을 미리 얻지 못하면 학교를 빠져가면서까지 몇 시간씩 방송국 앞에서 줄을 서기도 한다. 연예기획사에 배정되는 10장에서 50장 정도의 방청권은 팬클럽끼리 서로서로 밀어주는 교섭의 카드로 쓰이고, 이런 교섭을 맡아하는 팬클럽 회장의 권한은 또다른 권력이 된다.

    각 기획사는 여러 소속 아이돌 앞으로 배정된 방청권을 각 그룹 팬클럽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밀어주고 싶은 한 두 개 그룹을 띄워주는 카드로 사용한다.

    막상 그룹이 만들어지고 데뷔를 준비하면서 음반을 녹음하고 뮤직비디오를 찍으면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을 자산으로 관리하는 기획사는 여기서도 고삐를 조인다.

    심지어 수천만 원을 들여 음반을 녹음하고 뮤직비디오까지 다 만들어놓고는 부러 멤버 가운데 하나를 탈락시킨다. 회사 입장에서 이렇게 투자를 했더라도 엇나가는 모습을 보이면 목을 치겠다는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본보기로 탈락시키는 것은 신인 연예인을 다스리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다.

    기획사의 아이돌 길들이기

    그러다보니 유명 아이돌 그룹 최종 탈락자 출신을 중심으로 또 다른 아이돌 그룹이 만들어지는 일도 허다하고, 그런 그룹이 처음 데뷔할 때 써먹는 홍보전략도 멤버 중 누구누구가 어느어느 유명 아이돌 그룹 연습생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는 우스꽝스러운 일도 벌어진다.

    입시보다 경쟁률 높다는 오디션, 여러 해에 걸친 연습생 기간, 데뷔를 앞두고 벌어지는 살벌한 관리 체계를 거친 어린 연예인 지망생들에게 계약에서 당당한 주체로서의 ‘을’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막상 데뷔를 하고나서도 경쟁은 멈추지 않는다. 아이돌의 수명은 길어야 십 년이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아이돌로 버티기는 쉽지 않다. 아이돌로서의 효용가치가 다할 무렵이 되면 연기자나 솔로로 따로 활동할 재목과 그렇지 않은 쭉정이가 가려진다. 그래서 성공하면 스타지만 여기서 탈락하면 모양 참 우스워지는 것이다. 대개는 이런 와중에 계약 문제가 불거지곤 한다.

    단지 춤과 노래가 좋아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실력에 따라 공정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닌데도 수많은 청소년들이 아이돌을 꿈꾸게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기형적 청소년 문화다.

    청소년에게 ‘노는 것’은 기본적인 권리이자 앞으로 문화적 소양과 나름의 취향을 갖춘 사람이 되는 단계이건만 대학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놀아서도 안되고 즐겨서도 안되는 사회에서 그나마 청소년들이 숨 쉴 구멍은 아이돌을 보고 열광하는 미디어뿐이다.

    아이들에게 놀 자유를

    죽자고 머리 싸매고 공부해서 대학입시를 치르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또 죽자고 머리 싸매고 각종 자격시험이며 취업 시험을 치르지만, 막상 취업에 성공해서도 정년을 제대로 보장받기 힘든 사회.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으로 전전할 가능성이 더 높은 사회. 인맥과 학벌로 사회적 성공 여부가 가름되는 사회. 공부가 족쇄가 되는 청소년 시절이 지긋지긋한데다가 부모세대를 보면서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비정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는 사회.

    연예매니지먼트는 이런 청소년들의 꿈을 자산화하는 사업이고, 미디어는 이런 자산을 상품으로 전시하는 쇼윈도우다. 청소년에게 놀 자유와 즐길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한, 이들의 꿈은 늘 스스로의 존재 실현보다 한발 앞서 판을 짜고 있는 자본주의의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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