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레타, 고대사회의 모계의식
        2009년 08월 10일 09: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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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노소스 벽화 <파리지엔느> BC 17세기

    여성에 대한 의식도 세계관의 문제

    크레타의 크노소스 궁전이나 일반 주택의 벽화에는 유난히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크노소스 벽화인 <파리지엔느>도 그 중 하나이다. 당시 크레타 여성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약간 올라간 프랑스인 같은 코끝 때문에 파리지엔느(Parisienne)라고 불린다. 그림을 보면 실제로 오뚝한 코끝의 선이 선명하다. 정성스럽게 땋아 뒤로 내린 긴 머리가 자연스럽다. 가늘고 긴 목이 눈이 부실정도로 예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왜 크레타의 벽화나 조각에는 여성이 자주 등장할까?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불리는 크레타 문명에는 오랜 기간 모계사회의 요소와 의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지역이 일찍부터 부계사회로의 전환을 완료하고 사회제도뿐만 아니라 의식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남성 지배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크레타는 더 늦게까지 사회 전반에 모계의식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결과 여성이 주요한 묘사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 조각이나 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격적인 분위기를 찾기 어렵다.

    여성과 가족에 대한 의식은 풍속의 문제로 협소하게 다루어질 수 없는 중요한 영역이다. 부계사회로의 전환과 부계의식의 지배는 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세계관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성의 공격적 성향과 같은 생리적인 특성이나 단순히 가족 내에서의 특정한 의식의 문제로 치부될 수 없는, 총체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의 사회·경제적인 토대는 물론이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사고방식과 제도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영역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다는 점에서 세계관의 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렵, 채취를 중심으로 한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와 청동기를 경과하는 초기 농경사회까지 대체로 오랜 기간 모계사회가 존속되었다. 원시사회는 평등한 공동체 사회였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각자가 구해온 식량을 나누어 먹지 않으면 누군가 굶어죽게 되고, 그것은 곧 공동체의 힘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전체 공동체 구성원의 평등은 남녀 관계에 있어서도 평등을 의미했다. 아직 일부일처제와 같은 고정적인 가족제도가 확립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혈통이 어머니를 통해서만 확인되는 모계사회였다. 또한 인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노동력이었으므로 임신, 출산, 육아와 같은 여성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고 거룩한 일로 여겨졌다.

    여성의 임신, 출산은 공동체 전체의 경사였고, 여성의 일은 지금처럼 한 집안에 국한된 가사노동이 아니라 공동체의 살림을 유지하는 사회적 노동이었다. 또한 남성이 해오는 사냥보다는 여성이 맡아 하는 채집활동이 보다 더 안정된 식량 확보 방법이기도 했다.

    인류 초기의 가족 형태와 관련하여 미국의 인류학자인 모건(Morgan)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조사에 기초하여 쓴 <고대사회>에서 인류는 초기 단계에 군혼이 지배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에게, 또 모든 남자는 모든 여자에게 평등하게 속하는 난교(亂交)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가족의 첫째 단계인 혈연가족, 즉 부모와 자녀간의 성교가 금지된 혼인집단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어서 형제와 자매간의 성교 금지 관념이 생겼다. 그리고 다음에는 남자들은 많은 아내들 중에서도 본 아내를 가지고, 또한 여자도 여러 남편들 중 본 남편을 가지는 ‘대우혼’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농경과 목축이 자리를 잡으면서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했다. 농업혁명으로 인해 식량이 풍부해지고 먹고 남은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 잉여생산물의 분배를 놓고 드디어 인간사회에 체계적인 불평등이 시작되었다. 개인이나 특정 가족이 그것을 사적으로 소유하게 됨으로써 빈부격차가 생기고 신분 지위의 고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류사에 처음으로 계급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농경과 목축을 담당하던 남성이 잉여생산물을 사유하고 축적된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상속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만약 상속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축적과 사적 소유는 의미 없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상속을 위해서는 자기 아들임을 확신하는 것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모계사회의 특징이었던 난혼은 금지되고 하나의 남성을 중심으로 한 가족관계가 형성된다. 그런 점에서 엥겔스(Engels)가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에서 “일부일처제가 생겨난 것은 비교적 거대한 부가 한 사람의―그것도 한 남자의―수중에 집적된 결과이며, 또한 부를 다름 아닌 바로 그 남자의 자식에게 상속시키려는 욕구의 결과였다.”라고 지적한 것은 정확했다.

    아버지의 혈통을 확인할 수 있는 일부일처제는 사유재산 형성과 상속의 문제가 발생한 특정한 사회적 조건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가족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왔고, 개별성에 기초한 일부일처제 가족은 인류 역사 전체를 볼 때 아주 뒤늦게 생겨난 것이 된다.

    드디어 부계제 사회가 출현한 것이었다. 소유의식은 지배의식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계급사회의 탄생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의식,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의식을 만들어내었다. 또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소유와 지배는 처음에는 주로 폭력에 의존했다. 인류의 탄생 이후 200만년에 이르는 오랜 세월동안의 관계와 의식이 바뀌기 위해서는 폭력적인 전환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력에만 의존해서는 사회적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에 새로운 지배관계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의식적인 작업이 뒤를 잇는다. 여성은 정조를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는, 오직 한 남성을 위해서만 살아가야 한다는, 남성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도덕관념이 형성되었다.

    뒤르켐(Durkheim)의 <사회분업론>에는 재미있는 구절이 나온다. “과거로 돌아갈수록 우리는 남녀 간의 분업의 정도가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의 여자들은 전혀 연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여자가 연약해진 것은 도덕이 진보한 결과였다. 선사시대의 유골을 보면 남자와 여자의 체력의 차이는 오늘날에 비하여 훨씬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성숙되기 이전의 유년기 남녀의 발육에는 눈에 띄는 차이를 볼 수 없다. 양성이 다 같이 유년기에는 그 특성이 여성적이다.”

    여성은 원래 연약한 신체를 지닌 것이 아니라 도덕이 진보한 결과라는 그의 말이 참으로 예리하다. 실제로 선사시대에 남성이 수렵을, 여성이 과일 채취를 하게 된 이유를 여성의 연약한 신체적인 조건에 의한 분업으로 이해하는 것조차 어느 정도는 편견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과일 채취는 지금처럼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었을 것이다. 숲은 온갖 맹수들이 득시글거리는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또한 과수원의 나무처럼 인간에 의해 강제로 낮게 길러진 나무도 아니어서 높은 나무를 오르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이러한 위협을 뚫고 일을 하려면 강인하고 단호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계제 사회로 강제 편입되면서 여성은 집에 갇히게 된다. 상속의 ‘순수 핏줄’을 확인하기 위해 여성은 한 남성에 속한 존재여야 했고 바깥 출입을 극도로 제한 당해야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집 뒤편의 헛간 같은 곳에서 지내야 했으며 중동 지역은 얼굴부터 온 몸에 차도르를, 중국에서는 전족을 해야 했다.

    나아가서는 직접적인 ‘감금’만이 아니라 ‘출가외인’,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등의 황당한 상식과 여성을 옭아매는 온갖 도덕률의 이름으로 여성들에게 족쇄를 채우고 활발한 사회적, 육체적 활동에서 배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인간에 의해 오랜 기간 사육되면서 날 수 있는 기능이 퇴화한 닭이나 오리처럼 여성도 육체적인 퇴화과정을 거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이 신체적으로 연약해진 것은 도덕이 진보한 결과라는 주장은 충분히 경청할만하다.

    서구 문명의 젓줄 크레타문명과 모계의식

    크레타(Crete)는 동지중해에 위치한 큰 섬으로, 일찍부터 오리엔트 여러 지역이나 이집트와 교류가 있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거의 같은 시기인 BC. 2900년에서 BC 1600년까지 융성한 문명을 이룩하였고 BC. 1100년경 그리스 민족이 북쪽 대륙에서 남하하여 크레타섬을 습격함으로써 몰락하였다. BC 2000년 무렵에 왕에 의한 지배권이 확립되었다.

    크노소스를 비롯하여 마리아·페스토스·자크로 등에 대궁전이 세워졌고, 도자기·금속기가 많이 만들어졌으며, 작은 조각이나 그림이 발달하였다. 이곳의 전설적인 왕의 이름인 ‘미노스’(Minos)와 연관시켜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한다. 크노소스 궁전은 이 문명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 <크노소스 궁전> BC 1700-1400년

    “위대한 도시 크노소스, 미노스왕이 9년 동안 통치하였노라”고 읊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는 크노소스 궁전이 미궁(迷宮)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궁전은 완만한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직사각형의 가운데 뜰이 있고, 그 뜰을 둘러싸고 제의(祭儀)나 공무(公務)를 위한 방들과 왕과 왕족의 방, 아틀리에와 창고 등이 배치되었고 각종 행사장과 창고, 봉납고 등이 있다.

    환기시설, 상하수도 시설, 수세식 변기, 화려하고 역동적인 벽화들, 기하학적 무늬의 테라코타 항아리, 원형극장터 등 없는 것이 없다. 채광과 배수에도 유의하였다. 1,500개 방, 네 개의 층으로 복잡하게 전개돼 있는 구조이고 좁은 통로는 몇 번이나 직각으로 돌아야만 입구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복잡한 설계 때문에 미궁으로 불리게 된 것 같다.

    아기자기한 궁전의 구조는 당시 국가 권력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크노소스 궁전은 이집트의 고분이나 그리스 신전의 모습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특성을 갖는다. 이집트의 고분은 규모의 거대함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외관이 일관되고 체계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그리스 신전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하여 그리스 주요 신전은 전반적인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마치 도시 전체를 압도할 듯한 웅장한 자태를 지니고 있다. 신전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기둥은 국가 권력의 위세를 상징하듯이 당당하기만 하다. 이집트나 그리스의 건축은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성격을 보여주는 상싱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로처럼 복잡하고 제각각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수많은 공간들로 구성된 크노소스 궁전은 중앙집권적인 요소보다는 사회의 다양한 요소가 공존하면서 아직은 느슨하게 국가권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크노소스 궁전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이나 회화 역시 이집트나 그리스와는 사뭇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이집트의 조각이나 부조를 보면 대부분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왕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하다. 거대한 왕의 동상은 물론이고 부조 역시 왕의 치적과 연관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이집트나 그리스 모두 압도적으로 남성을 중심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여성은 매우 드물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지극히 부차적인 역할로 등장한다. 하지만 크노소스 궁전의 경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난할 정도로 여성을 묘사한 그림이나 작은 조각들이 많다.

       
      ▲ 크노소스 벽화 <세여인> BC 17세기

    <파리지엔느>는 물론이고 <세여인>과 같은 벽화가 수두룩하다. 세 명의 여인이 화려하게 치장을 한 모습이다. 기록에 의하면 크레타의 여성들은 가장 멋지게 차려입은 여성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하여 자신을 꾸미는 데 여러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머리는 구슬로 보이는 장식물로 한껏 멋을 내고 있다.

    목걸이와 팔찌를 하고 있으며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 있다. 유방을 드러내는 재킷을 입고 풍만한 엉덩이를 강조하는 치마를 입고 있는 것이 전반적인 특징으로 나타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여인들의 표정이다. 세 명의 여인 모두 입 고리가 살짝 올라가 있어서 즐겁게 웃고 있는 표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엄숙하고 비장한 표정이 주로 나타나는 이집트나 그리스의 그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여성의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크레타 사회에 깊게 남아 있는 모계의식과도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크레타 사회에는 지배 계급과 평민 계급만이 존재했으며, 정치적 지배자는 남자였지만, 여자와 남자는 가사나 공공행사에서 평등함을 누렸다. 모계사회의 흔적으로 많이 갖고 있었으며 다산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종교에도 영향을 끼쳐 종교의 중요한 형상이 어머니 여신이다.

       
      ▲ 크노소스 벽화 <백합꽃 남자> BC 17세기

    모계의식은 표현의 소재나 형식에 있어서도 부드러운 여성적 특징을 여러 측면에서 보여준다. 단지 여성을 많이 그렸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남성을 묘사할 대도 언뜻 봐서는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성적인 특징이 가득하다. 또한 전쟁이 아닌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주로 나타난다.

    딱딱한 자세, 넓은 어깨, 직선적인 다리를 강조했던 이집트 고분 벽화 속의 인물들이나 강인한 남성의 근육을 강조한 그리스 조각과는 달리 크레타인들은 길고 유연한 팔다리, 가는 허리, 약간 뒤로 젖혀진 상체, 그리고 곡선적인 인체 형태를 의상으로 더욱 강조했다. 이처럼 마르고 부드러운 곡선적인 인체미를 선호했던 것은 단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모계적인 의식이 깊게 남아있던 사회적인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백합꽃 남자>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남성을 그린 것이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세여인>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정감이 넘쳐흐른다. 먼저 몸의 윤곽을 보면 어깨와 가슴, 팔뚝에 남성의 근육이 나타나지만 가는 허리와 유연한 몸동작은 영락없는 여성의 모습이다. 여성들처럼 길게 땋은 머리를 하고 있고 또한 여성들 못지않게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목걸이와 팔찌로 장식을 하고 있는 것도 공통적이다.

    그리고 이 남성이 등장하는 배경도 전쟁터와 같은 격전장이 아니라 아름다운 백합꽃이 가득한 자연이다. 이 그림만이 아니라 심지어 권투를 하고 있는 남성들의 모습을 다룬 벽화에서 조차 가는 팔뚝과 가슴, 허리의 선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어린 소녀들이 무용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여준다.

    신화와 모계의식

    크레타의 모계의식은 이들이 주로 여성 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노아 문명의 발굴 유적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여신들의 것으로 남신들의 것은 하나도 없다.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여신을 신봉하였다. 즉 여신을 만물의 터전이라 생각하였고 생명의 모태이며 다산,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고 숭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태초에 있었던 대지의 어머니를 숭상했던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뱀의 여신상>이다. 앞에서 보았던 크레타 여성들의 복식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유방을 드러낸 재킷을 입고 있으며 가는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가 강조되어 있다. 머리에는 신을 상징하는 관을 쓰고 있고 양 손에는 뱀을 들고 있다.

       
      ▲ 크레타 <뱀의 여신상> BC 1600년

    크레타는 신상을 별로 만들지 않았는데, 이것도 모계의식과 연관이 있는 현상이다. 대체로 이집트나 그리스에서 거대한 신상이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남성 중심의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신의 권위를 필요로 했던 사정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또한 남성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신중의 신, 중심이 되는 신은 항상 남성이었다. 하지만 모계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있던 크레타에서는 유난스럽게 거대한 신상을 건립할 정도로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수직적인 권력관계의 상징물로서의 남성 신보다는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여성신이 이들에게는 현실적이며 친근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 신화는 부계사회의 특징과 논리를 잘 보여준다. 서양에서 부권제 사회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존재가 제우스이다. 모든 신과 인간은 제우스의 통제를 받는다. 그는 전능한 존재이고 그의 심기를 거스른 신이나 인간을 벼락으로 처벌한다. 폭군이면서 광기어린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제우스는 부인 헤라 외에도 수많은 연인과 정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사회에 온갖 금기를 강제하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금기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온갖 욕망을 충족한다. 일부일처제라는 윤리를 여성에게 강제하며 남성 자신은 역사적으로 공창이나 사창을 통해 제한 없는 성을 누렸던 부권제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존재이다.

    제우스를 정점으로 남성 신을 중심으로 한 체계를 짜다 보니 출생으로 이어지는 신의 계보에 억지에 해당하는 희한한 논리가 동원되기도 하였다. 남자인 제우스가 자식을 낳는 이상한 이야기가 그리스 신화에 들어가게 된다. 제우스의 자식들이 제우스의 머리나 허벅지를 통해 태어나는 우습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 크레타 벽화 <여사제> BC 16세기

    하지만 크레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원래 제우스가 지배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대 미노아 문명은 모계제를 상징하는 여신이 최고신이었다. 그들은 가이아와 헤라와 같은 여신을 숭배했다. 크레타의 유적을 보면 여신만이 아니라 여사제의 모습도 곳곳에 등장한다. 프레스코 벽화에 해당하는 <여사제>를 보면 여사제로 보이는 여자가 나팔꽃 모양의 특이한 향로에 불을 붙이고 있다.

    크레타에서는 여신을 숭배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신을 모시는 사제의 역할도 여성에게 주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달리 부계사회에서 사제는 남성의 역할이다. 신의 대리인으로서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사제는 당연히 남성을 중심으로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일찍 부권제를 형성한 북방 부족이 침입하면서 제우스가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스에 의해 정복당하고 부계제가 확립되면서 여신의 지위는 하락하기 시작한다. 대신 제우스와 같이 강한 군주의 모습인 아버지 신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헤라는 제우스의 하위 파트너로서의 아내 자리로 떨어진다. 그 이후 헤라는 세상일을 관장하기 보다는 제우스에 대한 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린다. 그리스가 모계제에서 가부장제 도시국가로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가족 내에서의 억압과 지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모계의식 – 평화를 상징하는 성배의 문화

    그리스와 크레타를 비교하면 조각과 회화의 주제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다. 그리스 신전의 조각이나 항아리 그림을 보면 주요 주제가 전쟁과 연관된 것들이다. 거인족과의 전투를 비롯한 신화 속의 전쟁이나 현실의 정복 전쟁과 연관된 것들이 많다. 전쟁과 정복을 본질로 하는 부계사회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모계의식을 상당히 담고 있는 크레타의 조각과 회와는 다분히 공존과 평화의 이미지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크레타미술의 특색은 일상적이며 작고 친밀한 것에 흥미를 가졌다는 점에 있다. 소의 머리모양을 본떠서 만든, 리튼이라고 불리는 <황소머리 잔>이 그러하다. 이 술잔은 크레타 출신의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황소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뿔과 코 주변 그리고 머리의 장식은 황금으로 되었으며 머리는 은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새부리모양의 주둥이가 달린 검정바탕의 항아리를 보면 인물·초목 외에도 물고기나 조개, 문어 등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연관된 것들이 주로 그려져 있다. 이 역시 신화 속의 전쟁 이야기를 즐겨 그렸던 그리스의 항아리 그림과는 지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황소머리 잔> BC 16세기(왼쪽), 크노소스 궁전 <황후의 메가론> BC 1600~1450년

    이러한 특징은 크노소스 중전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에서도 잘 나타난다. 중요한 방문객을 맞이하였던 접견실로 알려진 <왕후의 메가론>을 보면 매우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문 위쪽을 장식하고 있는 거대한 벽화는 바다 속을 평화롭게 헤엄쳐 다니는 돌고래로 가득하다.

    왕이 살았던 궁전 내부를 돌고래나 꽃, 여인의 모습으로 장식한 것은 이집트나 그리스를 비롯해서 어느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경우에 해당한다. 온통 말을 타고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묘사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내부의 부조와는 지극히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크레타인들은 침략이나 정복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아름답게 꾸미는 행위, 평화와 안정된 삶에 관심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크레타인들의 독특한 의식을 흔히 전쟁을 중시하는 그리스의 ‘칼의 문화’와 비교하여 잔이나 항아리를 중심으로 한 ‘성배의 문화’라고 부르곤 한다. 크레타로 대표되는 성배의 문화는 생명과 탄생을 찬양한 여신 숭배의 문화이자, 남녀 간의 차별이 아니라 유대와 동등함을 특징으로 한다. 전쟁보다는 평화, 살생보다는 생명력, 경쟁보다는 협력과 유대를 중시하는 문화이다.

    이는 크레타만이 아니라 모계의식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사회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모계 중심의 사회체제 속에 남성과 여성, 더 나아가서 사회 내부의 인간관계가 평등했고 평화로웠다. 그러한 관계와 의식이 예술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반면에 칼의 문화는 죽음과 희생, 대립이나 여성 차별을 핵심으로 하는 남성 중심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청동기와 철기로 무장한 채 끝없는 영토 확장에 골몰했던 그리스와 로마는 물론이고 이후 서양을 지배한 가부장제에 기초한 체제 전체가 여기에 해당한다. 남성 중심의 계급분화, 중앙집권적인 권력체제는 수직적인 사회체제, 지배 중심의 사회체제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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