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용차, 노동-사회 반응 수위 놀랍다
        2009년 08월 06일 09: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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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살인작전에 가까운 ‘진압’을 지켜보면서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정부와 경찰, 사측의 수준이야 이미 몇 차례에 만천하에 노출된 일이 있었으니 별로 놀라운 일도 못됩니다.

    그들에게는 노동자란 필요할 때에 명령에 따르는 로봇이고, 불필요할 때에 고무총이나 데이저총 등을 쏴서라도 회사 건물에서 좇아내야 할 ‘방해물’ 정도입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생산 요소 중의 비교적을 하찮은 한 요소, 아직도 로봇화가 덜 돼서 어쩔 수 없이 불편하더라도 쓰는, 이런 요소입니다.

       
      ▲ 5일 오전 8시 5분경 크레인 3대에 컨테이너를 연결한 경찰특공대가 조립3,4팀 옥상에 진입하여 조합원들을 연행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사진=노동과세계)

    재산 없으면 사람축에 못 끼는 대한민국 사람들

    한국형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재산이 없는 이란 원칙상 사람, 또는 시민/국민의 대열에 끼지 못합니다. 재산(부동산 및 학력)이 없어서 고용살이 하는 노동자는 여기에서는 태생적으로 비국민이기에 진압시에 마음대로 때리고 부상을 입혀도 되는 ‘사냥감’으로 전락합니다.

    그런데 진압하는 측의 행동(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망동)은 거의 예상대로지만, 노동계와 사회의 반응 수위는 좀 놀랍습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표명하기 위해 현대기아자동차의 노동자들이 만약 라인 가동을 멈추었다면 지배자들은 ‘살인 진압’을 벌이기 전에 몇 번 더 생각해봐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경쟁사라는 관계를 뛰어넘어 노동자들의 행동적인 연대가 실천되는 건 여기에서 좀 어렵나 봅니다. 노조 등 소집단마다 지배자와의 갈등에서 결국 ‘혼자’ 발버둥을 치면서 해결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지요.

    노동계가 최근 총파업을 선언해도 핵심 동력들이 다 자신들의 이해관계대로 빠져버리고 일반인들이 파업이라는 걸 눈치 채지도 못하는 나라에서는 약자 노동자들이 살인 진압에 노출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입니다. 각개약진형, 파편화형 사회에서는 살인진압도 결국 수많은 뉴스거리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 5일 오전 8시경 조립3,4팀 옥상을 장악한 경찰특공대의 진압을 피하다 7M 높이의 옥상에서 떨어진 차모 조합원이 피를 흘린채 바닥에 떨어져 있다. (사진=노동과세계)

    이러한 나라에서 ‘파시즘’이란 따로 필요하나요? 글쎄, 국제적 경제 여건이 극도로 나빠져 실제 실업률 (취업 대기자, 준비자, 포기자 등 포함)은 오늘의 10%에서 25~30%에 이른다면 또 모르지요. 곳곳에서 일어나는 절망적인 폭동들을 계속 유혈진압해야 하고, 이러한 유혈진압들이 정기화되면 결국 국가의 폭력 기구들은 권력을 자기 손에 집중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지요.

    유권자 태반이 진보신당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데 이렇게까지 가지 않을 경우에는 이 나라에서는 파시즘까지 아예 필요조차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과 같은 형식뿐인 보수적인 민주주의, ‘고등 경찰 체제’ 하에서도 맞을 놈 때리고 잡힐 놈 잡고 하려는 대로 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지배자의 입장에서 파시즘이 필요해지는 것은, 반대자(계급혁명 세력, 적어도 급진개혁 세력)의 집권 내지 주도적 영향력 행사가 우려되거나 이미 집권을 해 강제적으로 퇴출을 당해야 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전자는 공산당이 25만 명의 당원과 17%의 총선 표를 가지고 있었던 1933년의 독일의 경우이고, 후자는 급진적 개혁가 아옌데가 이미 집권한 1973년의 칠레 경우입니다. 또 하나의 파쇼화 시나리오는 1937~41년간의 일본처럼 자원이 훨씬 더 많은 외적을 상대하면서 ‘국민총동원’을 실시하는 경우지요.

    일제 말기 일본의 파쇼화 시나리오는 여기에서는 중국/북한과의 극단적인 관계 악화의 경우에는 실현될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은 지금으로서 매우 희박합니다.

       
      ▲ 진보정당과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평택역에서 도장공장 공권력투입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사진=정상근 기자)

    그리고 ‘반대자의 집권’을 이 나라에서 지배자들은 적어도 가까운 10~15년간 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933년의 독일에서는 공산당을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한국에서는 유권자의 태반은 진보신당의 존재 자체를 모릅니다.

    민노당의 존재야 그것보다 조금 더 알려져 있지만 한국적인 상황에서 평양 정권에 대한 ‘친연성’을 보여주었다는 걸 이미 ‘집권 포기’를 의미합니다. 물론 대한민국은 – 비록 말기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도는 아니지만 – 체제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람들의 불평, 불만, 절망, 저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불만의 정치적 조직

    그런데 ‘불만 계층’이 정치적으로 조직되지 않는 이상 이 불만의 에너지는 결국 ‘개인적 탈출구’ – 술, 마약, 자살, 가정 폭력, 범죄 – 로 분출되고 말 것이고, 체제를 위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에서 자기 나라 백성을 굶기는 왕조가 왜 이리 무사한가, 라는 질문에 보통 "경쟁 세력이라고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기득권층의 위기 대책은 아무리 불충분하다 해도 일단 먹혀든다"라는 답은 나오지만 남한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을 포한한 광의의 ‘지배계급의 정치적 대표자’들과 제대로 경쟁할 세력이 아직도 조직되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굳이 파시즘으로 갈 필요도 없이 그때 그때 곤경에 처한 소집단을 적절히 때려잡고 망가뜨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진화 도약’을 준비한다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의 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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