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사회,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이유
    2009년 08월 03일 08: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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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미국에서 어느 지방 주립대에서 교수를 하는 한 동료 분을 만났습니다. 서로 전공하는 분야가 흡사해 한 번 미주의 큰 학회에서 공동의 분과를 꾸며볼까 해서 동료 분에게 제안을 해봤지요. 그 동료 분은 일단 해보자고 긍정적으로 답한 다음 약간 더 생각을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말이지 나는 (전미)아세아학회 대회와 같은 거대형 학회가 비상히 싫어요. 어느 누구의 말대로 "인육의 박람회" (meat fair) 같은 것이지요. 젊은 학자들이 거기로 가는 게 학문을 논하러 가는 줄 아슈? 천만의 말씀, 권위자들에게 잘 보이려 가는 것이고, 아부하러 가는 것이지요. 뭐, 그걸 안하면 되는 게 있어야지요. 임명부터 정년 보장 심사 받는 일까지 말씀에요.

인육의 박람회

사실, 저도 미국에서 이와 같은 부분을 대략 눈치 챈 바 있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당사자한테 그 솔직한 심정을 들으니 그 소회도 좀 달랐습니다. 권위자에게 ‘보인트’를 따면서 사는 모양이 본인도 피곤해 죽겠는데, 이것은 세상의 ‘혼네’, 즉 본질이라는 게 그 심정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대체로 국내에서도 큰 학회에서 젊은 학인이 중진, 원로들 앞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걸 ‘신고식’이라 하고 그 때와 그 다음 술자리에서 처신을 잘 하면 나중에 재미를 많이 보고, 잘 못하면 재미가 별로 없는 걸로 알지요.

그런데 국내 인문학 같으면 ‘문중’ 식으로 발전돼 일단 지도 교수와 ‘문중’ 선배들이 잘 챙겨주기만 하면 ‘문중’ 바깥에서 굳이 억지로 ‘구애’를 하지 않아도 그리 살 만할 수도 있지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달리 미국에서는 지도교수는 ‘doktor vater’형이 아니고 ‘챙겨줄’ 도덕적 의무도 없고 하니까 각종의 ‘시혜자’들을 찾는 데에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판입니다.

모양은 각각 다르지만 논리는 하나입니다. 사적인 관계의 힘에 호소하지 않는 이상 공적인 신분 상승이 불가능하고, 사적인 사회 자본의 축적만이 공적인 신분을 보장해준다는 논리입니다. 이건 대부분의 경우에서 계급 사회 안에서의 신분 이동 법칙에 해당될 거에요.

사적 사회 자본의 축적

이 법칙은, ‘지배 계급의 음모’라기보다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적인 발전 경로와 관련이 있는 것이지요. 그 모태인 봉건사회에서 영주와 가신의 사적인 복속 관계는 바로 가장 중요한 공적인 관계망을 동시에 이루는데다 자율 도시에서도 상인, 장인 사회에서의 계급 질서는 철저한 도제식의 피라미드에 의존했어요.

자본주의 국가의 직접 전신인 절대 왕권 국가에서는 귀족사회란 혈연과 각종의 후견-피후견 관계로 철저하게 얼키고 설킨 곳이었으며 왕, 황후, 왕자와의 개인관계야말로 ‘신분상승’의 관건으로 통했지요. 부르주아 혁명은 일단 관념상 근대적 ‘공적 영역’의 탄생을 의미했지만 약 70년 전의 영국에서만 해도 특정 public school (귀족 기숙 학교) 색깔의 넥타이를 매지 않는 이상, 즉 ‘출신 고교 선후배 집단’의 힘에 의존할 수 없는 이상 어디를 가서 사람 노릇하기가 아주 힘들었지요.

결국 ‘공공성’, ‘합리성’에 대한 오늘날의 욕구란 1950-60년대 고등교육 대중화, 공공영역 확장 이후에 가능해진 것이지요. 그런데 특히 보수성이 강한 학계에서는 지금도 후견-피후견, 추천-피추천 관계를 떠나서는 그 미시적 정치학을 논하기가 힘들지요.

"교수 주도의 진보 정치는 필패"

‘음모’가 아닌 역사적인 부르주아 사회 발전의 합법칙적 결과지만, ‘개인 네트워크 확보 필요성’이란 기득권층에 참 편리한 사회 운영 조건입니다. 대체로 ‘인육의 박람회’에서 한 번 ‘권위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중에는 그 신념은 어떻게 되든간에 급진적 행동을 잘 못할 것입니다.

행동이란 생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몸으로 훈습된 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복종 훈련’을 많이 받은 몸은 그 다음에 반항을 많이 못하지요. 그리고 (저를 포함해서) 교수사회에서 후견-피후견 관계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교수사회란 어디까지나 본질적으로 보수적이지 않을 수 없지요.

그 일부 구성원의 신념적 지향은 진보적이라 해도 그 전체의 아비투스가 또 다르단 말씀에요. 그래서 진보정당 등의 관계자들에게 하는 이야기지만, 제발 교수를 지나치게 믿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적절히 활용하고 아이디어 등을 받으시면 되지만 교수 주도의 진보 정치란 필패의 정치입니다. 노조에서 현장 투쟁의 유경험자들이 주도하는 게 제일 나은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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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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