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 맑스? 문제는 ‘삼성공화국’
    2009년 07월 30일 10: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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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진보진영에서 사회대타협, 재벌해체론 등이 담론으로 성행했다. 현실정치에선 반영되지 않았다. 학자들의 논쟁만 있었다. 급진파가 자본주의는 ‘고장났다’고 천명한들 되는 게 아니다.

대안이 있어야 하고 실력과 세력이 있어야 한다. 진보파는 대안과 실력, 세력에서 실패해왔다. 자본가는 달랐다. 지난 10년, 한국사회는 자본의 시대가 되었다. ‘슈퍼자본’의 시대다.

삼성공화국, 대자본의 정치와 결합

삼성공화국. 케인스주의자와 맑스주의자가 만날 접점이다. 자본의 정치화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노무현 정부와 삼성의 정치적 연계를 말한다.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자본과 정치의 연계를 잘 보여준다. 지난 10년 동안 기득언론들과 대자본세력이 더 부유해졌다. 중하층과 서민, 노동자의 삶은 더 핍박해졌다.

더 부유해진 기득언론과 대자본세력은 더 핍박받게 된 중하층과 서민, 노동자와 다른 점이 지난 10년간 다른 점이 딱 하나였다. 기득세력은 정치적이었다. 정치시장에서 선택받았던 것이다. 최장집의 표현을 따른다면 정부의 정책 결정에서 투입 기능을 압도한 것이다.

김영삼, 김대중 급진적 신자유주의 변혁으로 시작된 지난 10년은 노무현 정권의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론, 한미FTA 등으로 나타났다. 기득언론과 대자본세력의 말이 곧 정책이 됐다. 그들의 목소리가 곧 국회의원의 목소리가 됐다. 정부는 재벌을 감시감독 하는 것이 아닌 재벌의 교육대상으로 탈바꿈했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곧 자본가의 위기는 아니다

최근 일부 진보진영에서 ‘자본주의 위기론’이 촉발됐지만 자본주의는 위기여도 이대로 간다. 새로운 체제가 도래한다고 하더라도 자본가들은 새로운 체제에 강력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반면 진보진영은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자본가와의 투쟁 수위를 10년동안 계속 높여왔지만 얻은 것은 없었다. 현실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투쟁운동은 존재감조차 느낄 수 없다. 운동은 계속 대중과 멀어지고 서민과 노동자에 기반한 사회적 기반조차 상실했다. 곧 대중의 외면으로 연결됐다. 민생은 계속 나빠지고 자본에 대한 투쟁운동은 운동권만의 사투리가 되었다. 고립된 시민사회세력도 계급연대도 다르지 않다.

정치로 돌아가자, 정당으로 돌아가자

문제는 정치다. 실마리의 열쇠도 정치에 있다. 정치가 자본에 넘어갔다고 한들 거침없는 자본의 고삐를 죌 수 있는 건 ‘정치’ 하나다. 다시 정치다.

그 방식이 직접민주주의는 아니다. 진보진영은 직접민주주의를 지향점을 삼는다. 직접민주주의는 상층 편향 정치다. 기득세력에 권력을 주는 다른 방법이다. 하루벌이로 살기 빠듯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직접 민주주의? 진보진영의 아이러니다.

다시 정당이다. 삼성공화국의 경험이 주는 바다. 삼성공화국은 정당을 부패의 대상으로 여기고 부정한 결과 나타났다. 위원회 정치, 보고서 정치였다. 정권을 견제하며 지원 할 수 있는 것이 정당이다. 이 정당을 통해 혹은 정당을 지지하거나 심판할 수 있는 것이 대중이다. 지난 10년간 예전보다 더 핍박받은 중하층과 서민, 노동자들이다.

삼성공화국은 밀실에서 대자본가들의 의사가 대표된 것이다. 중하층과 서민,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악법, 한미FTA 등으로 정책결정과정에서 배제돼 왔고 대표되지 않았다. 강력한 사회적 기반을 가진 정당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 절실하다.

* 이 글은 맑시즘2009 금융세계화의 시각에서 본 오늘의 경제위기(이종태, 이정구)와 마르크스주의로 본 오늘의 경제 위기, 원인과 대안(정성진, 유철규) 토론에 대한 필자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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