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년 1월 20일, 하느님은 떠나셨다
        2009년 07월 29일 11: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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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광주에서 2009년 용산까지

    내가 처음 광주 학살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명동성당 진입로에 죽 걸린 광주의 학살사진을 보면서 나는 사진 속,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그 뭉그러진 형체의 고깃덩이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이 나와 똑같은, 웃고 떠들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을 지닌 ‘인간’이었음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며칠 동안 엄청난 공포감에 시달렸다.

    그건 내가 본 최초의 죽음이었다. 인간을 한낱 피투성이 고깃덩이로 만든 자가 우리나라의 그 위대하신 최고통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 위대하신 분이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 보겠노라고…….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분은 단돈 29만 원으로 자손 누대 영화를 누리는 실로, 오병이어(五餠二魚)에 버금가는 기적을 보이시고 있다. 가히 하느님의 나라가 목전에 온 듯하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 장로님이 서울시장을 하실 때, 그 분은 서울을 매우 사랑하사, 하느님께 봉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 누가 서울을 은혜로운 땅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2009년 1월 20일 이후, 하느님은 그곳을 떠나셨다. 아픔 없이는 부를 수 없는 이름들이 있다. 4.3년 제주와 80년 광주가 그러하다. 그리고 2009년 우리는 그 목록에 ‘용산’이라는 또 하나의 참담한 이름을 추가하게 되었다.

       
      ▲ 사진=손기영 기자

    2009년 1월 20일

    그날 나는 집 근처의 약국에서 처방받은 아이의 감기약을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의 한복판, 바람은 차가웠고 판매대 옆에 놓인 조악한 캐릭터 모양의 비타민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를 달래면서 점심으로는 무얼 먹을까 생각하는,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그날 약국은 꽤나 북적였고, 나는 약을 기다리는 무료함을 텔레비전을 보며 달래고 있었다. 약국의 TV에서 속보가 흘러나왔다. 용산에 불이 났다고 기자는 전했다. 용산, 부동산 거품이 다 빠져도 용산은 안 떨어질 거래. 부동산에 빠삭한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었지. 어릴 적에 용산 미군부대에서 사온 피자는 참 맛있었는데……. 용산, 하면 내게 떠오르는 생각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처음에 나는 텔레비전에서 중계되는 화재가 그냥 합선이나 누전에 의한 사고인줄만 알았다. 그러나 속보는 매우 긴박한 목소리로 사건을 전하고 있었다. 그 화재가 진압에 의해 발생한 것이며, 건물 안에 사람이, 그것도 여러 명이나 있었다는 자막이 뜨는 순간 나는 경악했다. 무료한 하루가 ‘잊을 수 없는 하루’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날 용산에서는 여섯 명의 사람이 죽었다. 다섯 명의 세입자와 한 명의 경찰이었다. 농성 하루만의 일이었다. 그들이 있던 망루 주변에는 인화물질이 많았다고 했다. 경찰이 이를 몰랐을 리가 없다. 참사는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특공대는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경찰들에게 세입자들은 ‘Hi-SEOUL’을 완성하기 위해 한시바삐 사라져야 할 대상일 뿐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삶 앞에서 필사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날 그들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서 망루에 올랐을 것이다. 망루에 오르면서 그들은 마치 낭떠러지 앞에 다다른 것처럼 두렵고 슬펐을 것이다. 다만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은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올라간 그들은 죽어서 그곳을 내려왔다.

    참사 후 인터넷에서 본 동영상에서 유가족은 말했다. 경찰들은 사람들이 떨어지는데도 계속 최루탄과 물대포를 쐈다고. 사람들이 떨어지니 그만 하라고 소리쳤는데도 멈추지 않았다고. 그날의 진압 경찰들은 망루 위 사람들과 한가지로 붉고 따뜻한 피와 눈물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날 경찰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뚝뚝 떨어지는데도 진압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도 집에서는 따뜻한 아버지요, 자상한 남편이며, 착한 아들일 것이다. 그런 그들을 그토록 냉혈한으로 만든 것은 누구인가? 왜 국민의 안전을 위해 복무해야 할 경찰이 삶의 터전을 어이없이 빼앗긴 가난한 자들에게 물대포를 쏘고 최루탄으로 위협하여 급기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가?

    그리고, 2009년 7월 20일

    용산에서 만나기로 한 일행에게서 어디냐는 전화가 걸려왔다. 약속시간을 조금 넘기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탔다. 우뚝 솟은 아파트를 지나면서 택시기사님이 말했다. “이거 세우겠다고 다 죽인 거 아닙니까?”

    참사 현장은 정적만이 가득했다. 누군가 일부러 찾아 들어오지 않는다면 좀처럼 찾기 힘들 곳이었다. 폐업한 지 오래된 가게들과 뼈를 다 드러낸 건물만 남은 남일당 일대는 완전히 죽은 도시처럼 보였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을 수가 없었다. 농성 중인 유가족분들과 신부님들, 그리고 그들보다 몇 배나 많은 숫자의 경찰들도 그 죽은 풍경 속에 놓인 하나의 정물인 것만 같았다.

    순천향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무렵이었다. 여기에도 가장 많은 건 역시나 경찰이었다. 도무지 유가족들의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경찰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아침부터 계속된 대치상황이었다.

    옆 주차장건물에 올라가니 그제야 유가족들의 모습이 간신히 보였다. 시신은 여섯 달째 영안실 냉동고 밖을 나오지 못했다. 장례를 치루는 것은 고사하고, 유가족들은 한 발짝 발을 옮기는 자유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6개월이 지나도록 장례식을 치르지 못한 책임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있으므로 대통령과 정부책임자들이 볼 수 있도록 시신이 든 관을 서울광장으로 옮길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의 시신을 염습과 입관 과정을 거쳐 장지까지 모시는 장례식을 치르진 못하더라도 시신이 든 관을 서울광장으로 옮기는 ‘천구(遷柩)식’을 통해 ‘용산참사 해결’을 촉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당신들이 뭔데 남편의 시신도 못 보게 하느냐”고 오열했지만 한 발짝 나아가려 할 때마다 경찰이 막아섰다. 밀린 장례식장 비용 4억 원 때문이라도 병원에서 나갈 수는 없어 보였다.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정부는 나몰라라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수사기록 3000장은 공개되지 않았고, 희생자들은 졸지에 방화범이 되었다.

    살아서도 터전을 갖지 못한 그들은 죽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여기는 누구의 나라일까? 아무런 무기도 없이 그저 병원 밖으로 나아가겠다고 하는 선량한 시민들을 범죄자로 다루는 이 나라는 과연 누구의 나라일까? 다섯 시 십오 분, 나는 철저히 그들의 밖에 있었다. 한 명의 구경꾼인 내가 참으로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내 옆에서 검은 리본을 단 한 여성이 경찰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싸이코패스가 아니야. 우리는 너희 같은 싸이코패스가 아니야. 왜 웃어? 뭐가 그렇게 웃겨? 유가족들에게 손 대지마.” 경찰들은 그녀가 소리를 칠 때마다 한 번씩 돌아보며 낄낄 웃어댔다. 개념탑재라고는 전혀 안 된 무리들 같았다. 나는 정부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들의 천국이 바로 여기이냐고. 이 도시에서 돈 없는 사람들은 죽음 이후도 안식을 취할 수 없는 거냐고.

    다시 용산에서

    용산역에 내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점심 무렵하고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삼삼오오 모이신 수녀님들이었다. 아주 연로하신 수녀님들부터 젊은 수녀님들까지, 회색 혹은 흰 색의 수녀복을 입으신 분들이 현장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미사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의 미사는 ‘용산참사 해결 촉구를 위한 추모미사’로, 돌이 갓 지난 아기와 초등학교 학생들, 대학생, 수녀님, 일반시민에 이르는 다양한 사람들이 국화나 촛불을 들고 고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다. 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연도의식을 시작으로 미사는 시작되었다. 고인 앞에 분향하면서 나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시기는 당치 않으나, 한 말씀만 하소서. 우리가 곧 나으리이다.’

    시인 브레히트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는 시를 통해 폭력적 시대를 비판한 적이 있다. 고백하건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한 번도 글로써 대사회적인 발언을 해 본 적이 없으며 소시민으로서 나는 나의 안위에 직결되지 않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진 일이 없다. 그래서 용산 참사 6개월이 되던 7월 20일, 나는 용산에 가기 위해 몇 가지의 감정과 싸워야 했다.

    나를 제일 괴롭힌 감정은, 별 관심도 없이 편안하게 일상을 영위해온 내가, 거기에 갈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신문의 칼럼에서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은 일상을 제대로 즐기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내용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일상을 살아가려고 하면 또 무엇인가 일이 터져 일상에 빠져 있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죄책감에 휩싸이게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와 용산참사, 쌍용사태에 이르기까지 최근의 우리 사회는 국민들을 계속 정치적인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듯하다.

       
      ▲ 쌍용차 조합원의 가족이 용산참사 현장에서 눈물을 쏟고 있다 (사진=용산 범대위)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조차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감정에 휩싸여 분노하게 만든다. 집권 초기에 이명박 정부는 과거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 규정한 바 있다. 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10년 동안 과연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용산참사를 위시하여 미디어 법이나 쌍용사태에 대응하는 정부의 자세를 보다보니, 그들이 되찾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다.

    그들은 국민을 개뼉다귀로 아는 것 같다. 하긴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쥐가 세상의 으뜸인 시대니 내가 개뼉다귀인 것이 무엇이 대수랴. 하지만,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는 법이다.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아무렇게나 뽑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 정권이 나에게 준 교훈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용산참사 192일 작가선언 6.9 북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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