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비 서주를 얻다
        2009년 07월 27일 09: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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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억수씨

    조조가 갑자기 서주에서 후퇴한 뒤, 서주 태수 도겸은 몸져누워 버렸다. 워낙 노쇠했던 도겸은 조조의 침공이라는 극도로 위급한 상황이 진정되자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병석에 누워 버린 것이다. 도겸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도겸은 병석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조조가 물러가긴 했으나, 반드시 다시 쳐들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아들놈들은 또 항복도 못하고 죽음을 앉아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럼 어쩐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유비에게 태수 자리를 줘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놈의 태수 자리가 아무리 좋다한들 그것이 목숨보다 귀하겠는가?

    태수 자리에서 물러나 있으면 조조가 우리에게 복수할 명분도 없을 것이니 내 후손들은 그냥 상황 봐서 얼른 항복해버리고 조조를 섬기면 된다. 그렇게 대충 가문을 보전하며 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낫지 무슨 대의명분이고 나발이고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도겸은 무조건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도겸은 병석에 누워 결심을 굳혔다. 후계 문제는 자신이 죽기 전에 정리해주고 죽어야 하는 문제였다. 서둘러야 했다.

    ‘대의명분 따위 나발보다는 목숨’

    다음날, 도겸이 유비를 불러 다짜고짜 말했다.

    "이보시오. 현덕공 서주를 맡아주시오.!"

    유비는 깜짝 놀랐다.

    "지금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늙은이의 간절한 청이오. 나는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내 아들들은 무능하고 순해 터지기만 해 조조의 침공이 다시 시작되면 막아낼 수 있는 위인들이 못되오. 현덕공께서는 한황실의 종친이시고 무엇보다 모두가 외면할 때 서주로 달려와 편지 한 줄로 조조를 물리칠 수 있는 지략과 용맹을 겸비하셨소.

    내가 본시 무능한 자식 놈들을 둔 탓에 일찌감치 조조를 흠모했고 그런 이유로 조조에게 잘 보이려 그 아버지 조숭이 가는 길도 호위를 자처했으나 내 부하들 단속을 제대로 못해 엉뚱하게 일이 꼬여 버렸소. 이제는 조조의 철천지 원수가 되었으니 서주를 지켜줄 사람이 현덕공밖에 없소. 부디 사양 마시고 서주목을 맡아 주시오."

    유비는 도겸의 좀 자세한 설명을 듣자 순간적으로 ‘이게 왠 떡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유비의 성격상 "네 알겠습니다.!" 하고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유비는 좀 생각해 봐야겠다는 식으로 말하고 일단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 문제는 곧바로 서주성 안의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화두가 되었다. 유비는 자리로 돌아와 흥분을 가라앉히고 곰곰 생각해 보았다.

    ‘지금 도겸이 일면식도 없던 나에게 이 서주땅을 넘기려는 이유는 조조가 조만간에 다시 쳐들어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어찌해야 하겠는가? 지킬 힘도 없는 이 서주를 괜히 맡았다가 몇 달은 좋겠지만… 그러나 나중에 조조가 쳐들어오면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본시 외부의 침입 앞에서 위험에 빠진 어떤 지역을 또 다른 외부의 힘이 나타나서 지켜준다면 이를 지켜준 두 번째 외부의 힘이 그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였다. 사실 조조도 황건 반란군의 잔당들에게 포위된 동군태수를 구해주고 나중에는 자신이 동군을 차지해버리지 않았던가! 이제 유비가 서주를 구해줬으니 유비에게 서주가 넘어가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유비는 동생들을 불러 고민을 털어 놓았다. 장비와 관우도 소문을 들어 은근히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유비가 의외로 고민이 된다는 식의 말을 늘어놓자 두 아우는 식탁을 치며 말했다.

    "아이고 형님, 그게 무슨 걱정이요.! 주는 떡도 못 받아먹으면 어쩌겠단 말이요!"

    "맞습니다. 조조가 다시 쳐들어오면 이 관우가 청룡언월도로 당장 두 쪽을 내버릴 것이오.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고 빨리 도겸의 제안을 받아들이시죠.! 이렇게 좋은 기회는 앞으로 영영 오지 않을지 모릅니다."

    "주는 떡도 못받아 먹으면 어쩌자고…"

    아우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유비는 은근히 조조의 재침을 걱정했던 자신이 잠시 부끄러워졌다. 어차피 대업을 이루기 위해 복숭아밭에서 목숨을 걸고 군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던가!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조조가 무서워 이 좋은 기회를 포기한다는 것은 애당초 설정한 자기 인생의 목표를 망각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비록 도겸이 서주 땅을 통째로 넘기겠다는 제안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덥석 받아들인다는 것은 왠지 염치없는 짓으로 보였던 것이다. 도겸에게 뒤를 이을 후손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유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수락할 때 하더라도 몇 번 사양하다가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유비는 일단 도겸의 제안을 사양하기로 했다. 다음날 도겸을 다시 만난 유비가 말했다. 이번에는 도겸 뿐 아니라 서주의 모든 군신들이 다 모여 있는 자리였다.

    "태수님, 제가 이곳에 온 것은 공손찬 형님께서 제게 서주를 구하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 할 뿐, 다른 욕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조조로부터 서주를 지킨다는 명목 아래 와서 오히려 제가 서주를 취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관우와 장비는 자동으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대충 예의상 한 번 사양하는 것 치고는 너무 강력한 의사 표현을 했던 것이다.

    그때 유비를 데려온 미축이 말을 꺼냈다.

    "현덕공께서는 한황실의 종친으로 경제의 원손이십니다. 따지자면 황제의 아저씨뻘 되는 황숙이십니다. 지금 중원천하는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공께서 황실의 일원으로서 위기에 빠진 천하를 구하시려면 먼저 곡창지대인 서주를 얻으셔야 합니다. 도겸 태수님과 저희들은 이미 만장일치로 의견통일을 이루었습니다. 현덕공께서 꼭 이 서주를 맡아주십시오."

    도겸의 다른 신하들도 일제히 간청하였다

    "현덕공께 소원합니다. 꼭 이 서주를 맡아 주셔야 합니다. 황숙이 아니면 아무도 이곳을 지킬 사람이 없습니다."

    유비는 잠자코 듣기만 했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황숙(皇叔:황제의 아저씨뻘)으로 불러주는 것이 신기했다. 사실 유비가 황족이라는 근거를 자세히 따지자면 전한(前漢)시절 경제의 황자(皇子)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라는 뜻이었는데 이 사람은 이미 200년 전의 인물로서 생존 당시의 직계자손만 수 백명에 이르는 인물이라 유비가 정말 황제의 자손인지 아닌지는 도저히 확인 불가능한 문제였다.

    그런데 정작 서주 태수라는 어떤 자리에 앉아 공식적인 책임을 맡으려다 보니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런 형식상의 근거가 무척 유용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비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제의 친척을 사칭하고 다닌다는 이유로 독우한테 멸시를 당하는 바람에 중앙감독관을 폭행하고 도망 길을 떠난 것이 아니던가? 유비는 속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성질 급한 장비가 한 마디 거들었다.

    "형님, 이 분들이 이렇게까지 간청하는데 그만 수락하시지요!"

    그러자 갑자기 유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내가 염치도 모르고 의리도 없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느냐!"

    장비는 깜짝 놀랐다.

    "지금 여기 도겸태수의 두 분 아드님이 듬직하게 서 계신데 어찌 날더러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란 말이냐!"

    평소에 온순하던 유비가 난데없이 소리를 연거푸 질러대니 장비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잘 보이도록 큰 몸짓을 보여 준 것이었다. 전형적인 ‘같은 편한테 소리 지르기’ 수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도겸의 두 아들은 물론이고 서주성의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매달려 유비에게 서주를 맡아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유비, 모양새를 갖춘 수락 또는 횡재

    그래서 결국 유비는 아주 여러 번의 사양 끝에 서주목의 자리에 오르기로 수락하고 만다. 유비로서는 최대한 ‘나는 원래 욕심이 있었던 것이 아닌데 너네들이 하도 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한다.’ ‘게다가 조조가 좀 있다 쳐들어 올 것이라 매우 위험한 일인데 당신들이 하도 해달라고 하니까 내가 희생을 각오하고 해준다’는 모양새를 갖춰 냈던 것이었다.

    유비는 왜 이런 과정을 밟고자 했던 것일까? 유비는 성품상 본시 욕심을 품은 상태로 끈질기게 자기 순서를 기다릴 줄 아는 은근함을 중시 여겼었다.

    유비는 가끔씩 아우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었다.

    "정치를 하다보면 가장 큰 고민은 이번이 내 순서인지? 아닌지? 그것을 알 수 없어 무척 고민이 된다. 그게 제일 어렵다."

    그래서 유비가 갖고 있던 원칙은 ‘판단이 확실하지 않을 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치적 시계는 칼같이 간다. 어느덧 기회는 온다. 그것도 빨리 온다. 정치적 인생은 길다. 의외로 길다. 따라서 장기적 관점이 무조건 중요하다. 한 걸음이라도 잘 못 나가는 것보다는 천천히 조금씩 안전한 길을 가는 것이 맞다. 즉 큰 과오를 범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쓸데없이 똑똑한 척하다가 돌을 맞으면 금방 죽는다. 정치적으로…’

    유비는 그런 생각을 하며 확실한 명분이 주어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원칙을 적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비의 이런 원칙은 정작 자기 순서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거침없이 숨겨놓은 칼을 뽑을 수 있는 신속함과 결부되었을 때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원칙이었다. 유비는 이 두 가지를 겸비했던 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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