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대하고 강력하신 세상의 왕이시며…”
        2009년 07월 22일 02: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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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양문양 채문토기> BC 3300~3000년

    농경과 목축 그리고 문명

    신석기 시대로 들어오면서 인류의 의식과 문명은 일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신석기 시대의 문명은 현재의 이라크 지역을 흐르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가리키는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수메르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지역, 흔히 가장 오래된 문명이 발생한 지역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미국의 학자인 크레이머(Kramer)가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된다”라고 했을 정도로, 수메르의 기록문서는 BC 3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석기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토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술에 있어서도 토기는 신석기인들의 조형감각과 의식을 살필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상이 된다. 토기는 일찍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현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초기부터 다양한 모양과 장식의 토기들이 만들어졌는데, BC 4500년을 전후해서는 기하학적 문양 외에도 동물이나 인물 문양으로 발전하면서 신석기인들의 생활과 사고를 짐작할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토기는 원시 농경사회를 증명해준다. 먼저 토기는 무엇인가 그 안에 담을 것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다. 수렵과 채취를 중심으로 하던 구석기시대에는 토기라는 도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냥을 한 동물이나 채집을 해온 과일은 펼쳐놓고 먹으면 될 일이었다. 저장이나 요리라는 개념은 상당히 미발달 상태였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서도 상황이 달라진다. 특히 농경은 다양한 곡물을 저장을 할 수 있어야 식사가 가능해진다. 또한 음식을 직접 조리하기 위한 그릇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한 토기에 그려진 동물이 대체로 목축의 대상이 되었던 양이나 소, 돼지 등이었다는 점에서도 목축이 널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신석기 이전의 사람이 단순한 식량 채집자였다면 신석기인은 식량 생산자였다.

    메소포타미아의 농경과 목축은 수메르의 전설에도 잘 나타난다. 수메르의 전설에 의하면 “어미 양에게 새끼 양을 낳게 하고… 곡물을 밭에서 불어나게 한” 그때, 번영이 찾아왔다고 한다. 수메르인의 대다수는 농민이었다. 그들은 부를 생산했고 그것이 문명의 성립을 가능케 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농사 서적이라고 한다면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주식이었던 보리의 재배법을 서술한 수메르 문서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 목축의 대상으로 가장 널리 이용된 것이 양이었는데, 그 갖가지 품종을 표현하기 위해 200가지나 되는 낱말이 사용되었을 정도로 이미 목축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성경에서 노아의 방주로 유명한 홍수 신화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홍수 신화 역시 농경사회의 발전을 보여주는 상징 중의 하나이다. 농경은 특징상 풍부한 수자원을 가지고 있는 대규모 강 주변에서 발달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오랜 기간의 노동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홍수였을 것이다. 인간에게 내려진 대재앙의 상징이 홍수였다는 것은 농경이 폭넓은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메소포타미아의 원시 농경 촌락은 BC 4000년경에 접어들면서 점차로 규모가 커지고 초기 도시 단계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때부터 신전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면서 상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또한 농경과 목축, 정착생활이 가져다준 가장 중요한 결과의 하나는 제도의 발전이었다.

    일차적으로 정착생활이 오래 지속되면서 가족의 형성이 뚜렷해진다.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서 가족이 점차 구체적인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으며, 부계제적인 형식을 띠기 시작한다. 지역에 따라 한 명 또는 더 많은 수의 부인을 거느린 남성 가장에 의해 지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촌락의 규모가 커져가면서 점차 정치적인 제도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물질적 진보의 신기원을 이룩하면서 이른바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사고의 복잡화와 개념적 사고의 발전

    농경과 목축은 단순히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발전만이 아니라 인간 의식에 전반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었다. 엘리아데(Eliade)는 <세계종교사상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명사에 있어서 농경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다시 강조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자기가 먹을 음식을 생산함으로써, 조상 대대로 전해져오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만 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구석기시대에 이미 발견되어 있던 시간 계산 기술을 완성시켜야만 했다. 미래의 어떤 특정한 시점의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데 있어 초보적인 태음력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 경작자는 파종하기 몇 달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수확이라는 먼 미래의 불확실한 결과를 생각하면서 일련의 복잡한 행동을 정확한 순서에 따라 수행해야 했다.”

    인류의 의식 변화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천이 날줄과 씨줄에 의해 짜이듯이, 인간의 의식은 기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씨줄과 날줄로 하여 형성되고 변화한다. 엘리아데는 그 중 시간 개념의 변화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렵과 채취를 중심으로 하던 구석기인들에게 시간 개념은 단기적이고 단절적인 측면이 강했을 것이다. 수렵과 채취의 특성상 당장 내일, 혹은 몇 번의 밤을 지낸 후에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가 직접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농사에 있어서 시간의 성격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적어도 1년이라는 긴 시간 개념이 필요하다. 또한 그 1년의 시간 동안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일을 주기적으로, 그것도 상당히 정밀하게 계산해야 한다. 이제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예측과 계획이라는 영역으로 훨씬 확장되어야 했을 것이다. 장기간의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시간에 대한 사고가 복잡해지고 개념화되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공간적인 사고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농사는 토지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다. 다수가 공동의 지역에 정착생활을 하면서 서로의 토지를 구획해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과거에 비해 훨씬 복잡한 공간 개념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또한 농사와 목축은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일이니만큼 자연 현상에 대해서도 과거에 비해 훨씬 여러 측면에서의 탐구가 필요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자연을 인간에 맞게 이해하기 위해서 개념적 사고가 발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연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중시했던 구석기인들과는 다른, 추상적인 의식의 발전이 나타난다.

    이는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와 신석기 시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채문토기(彩文土器)를 비교해보아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채문토기는 채색으로 장식문양을 한 신석기 시대의 토기를 말한다. 양질의 점토로 만든 그릇의 표면에 적·백·흑색 등의 채색으로 기하학무늬나 동물무늬를 새겨 넣었다. 처음에는 삼각 무늬·그물 무늬 등을 중심으로 하다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인물 또는 동물을 그리거나, 소용돌이무늬나 물결무늬 등을 섞어서 표현했다. 

       
      ▲ <멧돼지모양 채문토기> BC 3000~2500년

    <산양문양 채문토기>는 바로 이 단계 토기의 표현 양식을 잘 보여준다. 토기에 그려진 산양의 모양만 보더라도 구석기 동굴벽화와 상당히 다른 표현 양식을 볼 수 있다. 양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그 특징을 양식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의 특징인 뿔을 과장하고 둥근 원에 평행이 되도록 묘사함으로써 디자인적 요소를 한껏 뽐내고 있다.

    또한 뿔로 만든 원 안에 장식적인 문양을 넣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턱밑의 털도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장식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선을 이용하여 추상적인 문양으로 보완하고 있다.

    <멧돼지모양의 채문토기>는 좀 더 진전된 표현 양식을 보여준다. 그림 속에 있던 양식화된 동물을 이제는 토기 자체의 모양으로 실현하고 있다. 토기의 사용 목적과도 연관을 맺으면서, 실제의 멧돼지를 그대로 재현하기 보다는, 현대사회에서 흔히 캐릭터라고 부르는 것처럼 단순화 과정을 통해 장식적인 성격을 강화하고 있다.

    앞서 동굴벽화에 대한 설명에서도 자세히 분석하였듯이 구석기 시대에는 사냥의 대상이 되었던 동물에 대한 상당히 사실적인 묘사가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하지만 구석기와 신석기를 잇는 중석기의 동굴벽화만 하더라도 복수의 형식화된 형상을 일정한 구도로 정리하는, 상대적으로 사실적 조형성은 약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보다 지적으로 발달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이 신석기 채문토기로 오면 더욱 두드러진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우저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연주의적 양식은 구석기시대의 종말까지, 그러니까 수만 년 간 지속되었다. 예술사에서 최초의 양식변화를 이루는 전환점이 나타나는 것은 구석기 시대가 신석기 시대로 이행하면서였다. 이때 비로소 체험과 경험에 대해 개방적인 자연주의적 경향이 물러나고, 경험세계의 풍성함을 등진 채 모든 것을 기하학적 무늬로 양식화하려는 경향이 지배하게 된다.

    자연에 충실하며 그때그때 모델의 특징들을 애정과 인내로써 묘사하려는 그림 대신에 사물을 충실히 그려낸다기보다 상형문자처럼 가리키는 데 그치는, 획일적이고 인습화된 기호가 나타난다. 예술은 이제 삶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습보다 사물의 이념이나 개념 내지는 본질을 포착하려 하고, 대상의 묘사보다 상징의 창조에 주력한다.”

    토기에서 나타나는 추상적인 문양과 장식적인 상징을 두고 사고의 복잡화, 개념적 사고의 형성 운운하는 것에 대해 과장이 아닐까 의문을 가지는 경우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무심코 ‘동물’이나 ‘식물’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조차도 사실은 학습에 의해 훈련된 개념적 사고의 결과이다.

    다양한 모양을 지닌 자연의 개별 사물에 대해 비슷한 특징을 유형화하여 동물과 식물, 그리고 식물을 나무와 풀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사고가 체계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이름을 정할 때 아이가 성장하면서 보인 특정한 행동을 그대로 이름으로 붙인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아기가 어느 날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서는 것을 목격했을 때 그 아이의 이름을 ‘주먹 쥐고 벌떡 일어서’라고 짓는 식이다. 우리의 이름에서처럼 성과 이름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개념적 사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토기에서 보이는 양식화된 표현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고가 복잡해지고 개념적 사고가 발전함으로써 문자의 발전을 촉진하게 된다. 인류에게 있어서 초기의 문자 형태인 상형문자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림문자의 출현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림문자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개별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사물들 간의 유사성을 종합하여 개념화하는 작업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추상화 작업이 어떻게 인류의 개념적 사고의 발전을 보여주는지, 또한 그러한 개념적 사고의 발전을 더욱 촉진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 <날개 달린 인두우상> BC 721~705년

    지배의식, 권력의지와 국가의 형성

    농경과 목축은 다른 한편으로 인간사회에 권력에 대한 사회적인 기반과 뚜렷한 의식을 형성해내는 역할을 한다. 특히 청동기 시대와 맞물리면서는 권력의식이 더욱 체계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농경과 목축의 시대를 상징하는 대홍수 신화도 단순히 재앙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만이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권력의식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대홍수는 세계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리고 대홍수 이후의 세계는 그 이전의 시기와 질적으로 구분된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홍수 신화는 한두 사람만이 살아남고 모든 인간이 죽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한두 사람이 대홍수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인물로 부각되는 논리를 갖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는 노아의 방주도 그렇고 훨씬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메소포타미아나 그 외 지역의 대홍수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그 한두 사람이 누구일까? 바로 권력의 창시자이다. 또한 이 신화는 공통적으로 하늘의 재앙이라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새로운 세계의 형성도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권력자는 단지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신격이 부여된다. 하늘로부터 부여된 왕권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담뿍 배어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채문토기에 나타나는 양식화된 표현도 권력의식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는 협동에 의해 수렵을 하는 사냥꾼들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BC 4000년경의 화려한 채문토기는 노동에 찌들어 사는 일반인들의 생활도구가 아닌, 상당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것이었다.

    수메르 미술은 지배자 계급의 미술이었다. 권력이 수립되면서 예술은 지배자의 전유물이 되었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지배자는 자연이나 일반 사람들보다 우월해야 했다.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신적인 존재여야 했다. 때문에 자연이나 인간을 그대로 그리는 것에서 벗어나서 추상화된 표현이 주도하게 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농경이 일반화되면서 경작지에 물을 대고 있는 복잡한 운하망을 잘 유지하는 것이 절대적인 과제였기 때문에 큰 강을 관리하기 위한 위계질서가 정당화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확대되고 있는 상업에 대한 관리 역시 관료적인 조직체를 필요로 한다. 수메르 국가는 각기 농업과 상업을 관리하기 위해 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관료계급에 의해 운영되는 강력한 정부를 발전시켜갔다. 왕은 많은 종자를 거느리고 사치스럽게 살았다.

    초기 시대의 수메르 왕은 선거에 의해 뽑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지위가 세습화되고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 결과 수메르인은 왕은 하늘에 의해 임명된 사람이며, 최초의 왕은 2만 8000년 동안이나 통치를 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BC 2500년을 전후해서는 아주 튼튼한 성벽을 두른 도시에 신전뿐만 아니라 궁전도 출현하게 된다.

    강력한 권력의 형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아시리아의 <날개 달린 인두우상(人頭牛像)>이다.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소의 모습을 한, 높이 4.20m, 길이 4.36m에 이르는 거대한 상이다. 이 거대한 조각은 사르곤(Sargon) 2세가 세운 궁에서 나왔다. 궁의 정문을 지키는 수호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 개의 다리 사이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위대하고 강력하시고 세상의 왕이시자 아시리아의 왕이시며 우라르투를 정복하시고 사마리아를 무찌르시고 가자 왕 하농을 포로로 잡으신 사르곤 왕의 궁전"으로 시작되는 긴 문장이 나오는데, 도읍 건축에 관계된 설명이 뒤를 잇는다. 상당한 규모의 지역에 대해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권력이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사르곤 1세(BC 2350∼BC 2295)는 BC 2350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일어난 아카드(Akkad)를 대제국으로 이끈 인물이었다. 사르곤 왕은 또한 ‘아카드의 사르곤’이라고도 하며 아카드어로는 샤루킨(Sharru-kin), 즉 ‘왕은 정통(正統)이다’를 뜻한다.

    여기에서 정통이라는 말은, 그의 왕위 계승은 이미 정해진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혹은 모든 사람들을 동의시켰다는 뜻을 포함한다. 이미 권력이 세습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르곤 1세의 전기를 담은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나는 사르곤이다. 강력한 왕이자 아카드의 군주이다. 어머니는 고귀한 신분의 여사제(女司祭)였다. (…) 어머니는 나를 밴 후 남들 모르게 나를 낳았다. 그리고 갈대 광주리를 만들고 역청을 발라서 새지 않도록 하였다. 어머니는 나를 강물에 띄워 보냈다. 강물은 나를 덮치지 않았다. (…) 이쉬타르 시기(Era of Ishtar)에 일어섰다. 경쟁자도 적대자도 없었다. 온 나라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마력을 뿜었다.”

    이야기의 구조가 모세 탄생 신화와 상당히 유사하다. 시기적으로 봤을 때 모세의 신화가 사르곤의 이야기에 상당히 의존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안에 권력의 정통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의식이 곳곳에 나타난다.

    먼저 어머니가 여사제 신분이었다는 점, 또한 “이쉬타르 시기에 일어섰다”라는 말이 ‘이쉬타르(Ishtar) 여신을 모시는 신전의 지지를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는 점에서 신전 측의 지지가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데, 왕권이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신에 의해 부여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강이 아이를 삼키는 대신 훗날 강의 닿는 모든 곳의 지배자가 될 수 있도록 살려주었다는 점에서도 초자연적인 존재로서의 왕의 지위를 나타내고 있다. “경쟁자도 적대자도 없었다”는 것은 그가 왕위에 오를 만큼의 군사력, 즉 절대 권위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사자를 죽이는 아슈르바니팔왕> BC 650~620

    이제 신화라는 형식으로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가 마련된 것이다. 신석기와 청동기를 거치면서 초보적인 철학적 사고는 신화라는 형식을 통해 나타난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나중에는 점차 복잡한 논리적 형식을 만들어나가게 된다.

    또한 궁전의 건축이나 조각, 점토판이나 돌에 새긴 문자화된 문서들도 국가 권력의 위세를 드러내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내용을 담게 된다. <사자를 죽이는 아슈르바니팔 왕>은 사르곤 왕조 최후의 왕인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왕의 모습을 새기고 있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와 비교할 때 이제 주인공은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다. 또한 더 이상 난폭한 동물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존재도 아니다. 왕으로서의 그는 사자조차도 가볍게 해치우는 강력한 존재다. 아주 태연하게 한손으로 사자의 목덜미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맹수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고 있다.

    국가 권력에 의한 전쟁과 정복 욕구

    강력하고 체계화된 권력의지는 주변 지역에 대한 전쟁과 정복 욕구로까지 나아간다. 이를 통해 대제국을 형성하고자 하는 욕구가 주요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난폭한 정복 전쟁이 줄을 잇는다. 또한 권력이 최고의 가치로 되면서 가족 간의 참혹한 전쟁까지도 정당화되기 시작한다. 비로소 권력과 전쟁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국가는 그 출발부터 지배와 약탈이라는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시리아의 부조 가운데는 전쟁의 성과를 기록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아랍인과 전쟁을 하는 아시리아 병사>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조각에 기록된 전쟁은 형제끼리의 불화에서 일어났다. 아시리아의 왕인 아슈르바니팔과 이웃나라 바빌로니아를 통치하고 있던 그의 동생과의 싸움이었다.

    동생은 아라비아인 및 이란의 엘람인의 나라와 야심적인 동맹을 맺고 모반을 감행한다. 아슈르바리팔은 바빌론을 습격하여 그곳을 파괴하고 이어서 동생의 동맹군을 평정하려 했다.

    이 부조는 그의 군대가 아라비아군을 패주시키고 있는 장면이다. 조각을 보면 아라비아 군사는 낙타를 타고 있지만 활과 짧은 칼 말고는 이렇다 할 무기가 없다. 하지만 아시리아 병사는 긴 창과 방패, 갑옷을 착용하고 있어서 아시리아의 생산력이 월등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는 “짐은 그의 병사를 수 없이 죽이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그에게 주었다. 그와 함께 궐기한 아라비아인 모두를 짐은 칼을 휘둘러 베어버렸다.”라고 나와 있다. 

       
      ▲ <아랍인과 전쟁을 하는 아시리아 병사> BC 645년

    아시리아는 통치의 기반을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군사적인 면에서 주변 어느 도시국가보다 월등한 우세에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아시리아 최전성기 시절에는 총병력이 무려 170만에 이르렀고 그 중 보병이 100만 명, 기병이 20만 명, 전차도 1만 6천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막강한 군사력은 당연히 그 군대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된 농경과 목축 기술을 전제로 한다. 아시리아는 축적된 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복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모든 전쟁이 그러하지만 특히 당시 아시리아 군대는 잔혹하기로 유명했다. 패전국의 전쟁 포로를 창에 꿰어 죽이는가 하면 반란 주민에 대해 살갗을 벗기는 형벌을 가하는 등 잔학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또한 그들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고 척박한 땅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이들이 잔혹성은 국가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폭력 말고는 국가, 더 나아가서는 대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국가의 체계화도 초기 단계여서 드넓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행정적 장치가 덜 발달해 있었다. 또한 이집트에서 현재의 이란에 이르는 대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를 가진 인종과 집단을 병합했는데, 아직 이를 정신적·문화적으로 통합해낼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아시리아의 왕들은 무력, 특히 잔혹한 보복을 통한 두려움을 통해 통치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인 폭력만 의존한 지배는 끊임없는 저항과 반란에 시달려야 하고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한다. 아슈르바니팔은 초보적인 수준이기는 하지만 점차 폭력적인 지배에 더해 정신적인 지배를 위한 시도를 한다.

    거대한 돌을 깎아서 아시리아 왕의 영웅담과 지배의 정당성을 문자로 새긴 오벨리스크를 세우기도 하고 자신의 처세 기간에 있었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조각으로 새겨 자신들이 선택받은 존재임을 부각시키려 했다.

    또한 학문을 체계화하고자 했다. 그는 고대 중동에서 최초로 장서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목록을 만든 도서관을 니네베에 세웠다. 그곳에 수만 개에 이르는 점토판을 분류하여 보관했는데, 여기에는 인간, 동물, 식물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해, 달, 별의 움직임 등의 관찰을 기초로 한 전문학, 수학 등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 스스로가 문자를 해독하고 수학을 알았으며 이것을 항상 자랑으로 여겼다.

    농경과 목축을 통한 정착생활, 그리고 권력의 형성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면서 이제 신화나 미술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한 의식의 반영물이 아니게 되었다. 세상에 대한 지식이나 아름다움은 생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지배에 속하게 되었다.

    권력과 지배를 정당화하거나 권위와 힘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인간의 의식과 제도의 발전이 국가라는 괴물과 만나면서 인류의 가능성과 비극이 동시에 시작된다. 이때부터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 ‘의식’은 언제나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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