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복 입고 출전하는 조조
        2009년 07월 22일 10: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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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억수씨

    조조가 연주에서 세력 형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낭야라는 촌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래서 조조는 어느 정도 진영을 갖추게 되자 멀리 있던 아버지와 일가 친척들을 자신의 근거지로 데려오고자 했다.

    이것은 혹시 나중에라도 다른 제후국들과 다툼이 발생했을 때 자신의 친인척들이 적의 ‘인질’이 되는 상황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이 과정에서 아버지 조숭이 피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범인은 다름 아닌 서주 태수 도겸(陶謙)의 부하들이었다. 도겸의 부하들은 처음엔 조숭이 서주를 통과하자 도겸의 명령을 받고 조숭 일행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이 호위병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조숭이 갖고 가던 그 많은 재물에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호위병이 순식간에 떼강도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그들은 조숭과 조조의 일가친척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조숭이 몽땅 정리해서 조조에게로 가져가던 금은보화들을 약탈해 도주하였다. 문제는 서주 태수 도겸(陶謙)이었다. 부하들을 잘못 둔 탓에 당장 조조로부터 엄청난 보복을 당할 위기에 빠진 것이다.

    아버지의 피살 소식을 접한 조조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아버지 조숭이 피살당한 일은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었지만, 조조에게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 앞서 이 사건이 가지는 중대한 정치적 의미가 먼저 다가왔다. 조조는 이 사건 때문에 서주 태수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지 말지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전쟁, 할까 말까?

    "나이가 많이 들긴 했지만, 이제는 천하에 부모 없는 고아가 되었구나.!"

    조조는 눈물을 흘리며 참모들을 불러 모았다. 이미 조조는 모종의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 무렵 조조의 참모들은 좀 더 객관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식량을 주겠다’며 청주의 황건 농민군을 30만 명씩이나 정규군으로 편입하고 수많은 행정가, 전략가들을 끌어들여 막강한 진용을 구축해 놓은 이유는 어차피 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자원들을 그렇게 쌓아놓기만 하고 써먹지를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은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쓰지도 않는 칼을 집안에 잔뜩 쌓아놓으면 언젠가 도리어 화가 되는 법이다. 조조에게 팽창은 불가피한 전략이었다.

    그래서 조조의 부하들은 사실 오래전부터 조조의 팽창 정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어디서 전쟁의 명분을 찾을 것인지? 은근한 모색 중이었다. 물론 동서고금을 통털어 가장 좋은 전쟁명분은 ‘저쪽이 우릴 먼저 공격했다!’는 것 이상이 없었다.

    그래서 조조의 책사들 중에는 어떻게 하면 외부의 적대적 행동을 창출해 낼 것인가? 를 중심적으로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 마당에 서주에서 조조의 아버지가 태수 도겸의 부하에게 살해당하다니! 이렇게 좋은 전쟁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조조가 서서히 말을 꺼내려고 하기도 전에 성질 급한 참모들 중에 곽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주는 곡창지대입니다. 우리에겐 꼭 필요한 지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서주 태수 도겸은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고 그 아들들도 무능해 쉽게 점령할 수 있습니다. 당장 군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맞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무엇보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잘못해서 제때에 식량을 공급하지 못하면 우리가 끌어들여서 키우고 있는 청주병 30만이 반역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저 많은 군사들을 건사하려면 이제 슬슬 덩치를 키워야 합니다. 주군의 뜻을 펴기엔 연주는 너무 좁습니다.”

    참모들의 간언이 이어졌다. 조조가 보기에도 서주를 향해 진격해야 하는 시점인 것만큼은 너무나 명확해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적 판단이 명확한 상태라 해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마당에 뭔가 좀 슬퍼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젊은 참모들은 당장 쳐들어가자는 말만 계속 하는 것이 조조는 좀 찜찜했다.

    “음..다른 견해는 없는가? 문약 그대의 의견은 어떻소!”

    조조가 순욱에게 물었다.

    “저도 지금이 서주를 공격할 기회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아무래도 후방이 걱정됩니다.”

    "후방이라고..?"

    "만약 우리가 서주를 손에 넣으면 이미 우리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고 있는 진류의 장막이나 원소와 원술 같은 다른 경쟁자들이 그 꼴을 가만 두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음은 자신들의 차례가 될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서주를 치기 위해 주력군을 빼냈을 때 비어 있는 우리의 근거지를 배후에서 공략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판단이 빠른 자들이라면 그렇게 하겠지..! 그러나 그 정도로 빨리 행동할 수 있는 세력이 있겠소? 그리고 이렇게 명분이 뚜렷한 상황에서 서주를 향해 진격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것이오."

    명분 있는데 전쟁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

    조조는 드디어 대군 동원령을 내렸다. 조조는 정벌군을 편성하면서 순욱의 우려대로 본거지를 지키기 위한 대책을 만들어 놓았다. 조홍과 조인에게 본거지를 지키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순욱과 정욱에게 군사 3만을 주어 견성, 범현, 동아의 세 현을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원정군의 주력은 자신이 직접 이끌고 서주를 향해 말을 몰았다. 선봉은 하후돈이었다.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하에 조조가 서주로 진격을 시작하자 서주의 태수 도겸은 바늘방석 위에 앉은 것처럼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도겸은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이미 노쇠한 상태였다. 도겸은 장수들을 소집했다.

    "조조가 대군을 끌고 우리를 향해 쳐들어 온다하니, 이를 어쩌면 좋겠소.!"

    "조조는 이미 황건당 출신의 농민군을 자기 군사로 편입해 그 수가 30만이나 된다고 들었습니다.! 큰일입니다. 이러다가 다 죽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하는 말이 아니오.!"

    그 때 도겸의 신하들 중 별가종사 미축(麋竺)이라는 자가 계책을 내놓았다.

    "주공,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습니다. 서주 땅에서 조조의 아비가 죽은 것은 사실이나 우리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도 아니니 일단 조조에게 화평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그냥 돌아갈 리는 만무합니다. 화평을 요청해 시간을 끌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의 다른 제후들에게 구원요청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도겸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미 연로한 서주 태수 도겸은 심신은 나약해지고 전쟁 의지도 별로 없었다. 잘못하면 인생의 말년을 전쟁터에서 비참한 주검으로 마무리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반면, 조조의 대군은 신이 난 듯 밀려오고 있었다. 선봉군의 깃발에는 ‘보수설한'(報讐雪恨:원수를 갚고 한을 씻는다)이란 구호가 크게 적혀 있었다. 열을 지어 이동하는 대규모 군마는 그 위풍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조조는 갑옷 위에 흰 상복을 입고 군대를 이끌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라는 전쟁 명분을 강조하기 한 정치 연출이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조조가 서주로 쳐들어가는 이유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도겸은 미축의 계책대로 사방에 사람을 보내 원병을 청하고, 또 한편으로는 조조에게 사자를 보내 평화 협상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도겸의 평화협상 제안은 조조로부터 일거에 묵살되었다. 남은 것은 언제 올지 모르는 미지의 구원병뿐이었다.

    이 때 도겸의 명을 받고 구원병을 조직하러 떠난 미축은 북평태수 공손찬에게 가 있었다. 미축은 공손찬과 전부터 친분이 있었다. 그러나 미축을 만난 공손찬은 구원병 파견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복수를 내세우며 진격한 조조에 맞서기가 왠지 찜찜하였던 것이다. 공손찬은 괜한 싸움에 끼어들어서 분쟁에 휘말리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조조가 내세운 전쟁 명분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옛 친구랍시고 찾아왔으나 구원병을 얻지 못한 미축은 낙담하여 공손찬 진영에 며칠 머무르며 대책을 고민했다. 그런데 그러던 중 우연치 않게 공손찬 진영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어느 객장(客將)을 만났다.

    바로 유비(劉備)였다. 미축과 유비는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미축이 유비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유비는 반동탁 연합군 시절에 관우가 동탁의 맹장 화웅의 목을 베고 낮술을 한 잔 마신 사건으로 덩달아 무명을 날리고 있었다. 어쨌든 미축은 급한 마당에 안면도 없는 유비에게까지 구원요청을 늘어놓았다.

    밥이나 축내고 있던 유비

    유비는 황건 반란 당시에 공을 세우고도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폭행하는 바람에 도망자가 신세가 되어 옛 친구인 공손찬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벗이자 선배이던 공손찬 밑에서 허구 헌날 밥이나 축내고 있으려니 유비는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유비는 틈만 나면 뭔가 재기의 돌파구를 뚫어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지난 반동탁군 연합전선에 아우들을 데리고 나가 관우가 공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러나 반동탁 연합군이 소리 소문 없이 와해되는 바람에 유비는 또 다시 그냥 하염없이 칼 찬 백수 신세가 되어 공손찬 밑에서 객장 노릇이나 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 때 미축의 구원요청을 받은 유비는 속으로 ‘아 다시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유비의 동물적인 감각이었다. 물론 조조의 군대가 엄청난 대군이라는 사실은 유비도 알고 있었다. 잘못하면 죽을 위험도 컸다. 그러나 관우 장비 두 아우들과 도원결의를 하고 군사를 일으킨 마당에 이렇게 칼 찬 백수로 천 년, 만 년 지낼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번 해보고 죽자!" 공손찬 밑에서 여러 해 동안 눈칫밥을 먹던 유비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비는 당장 공손찬에게 나가 군사적인 밑천을 좀 빌려달라고 사정했다. 공손찬도 그것까지는 거절하지 못해 제일 나약한 병사 2,000을 골라 뽑아주었다. 만약 조조한테 걸리면 공손찬한테 빌린 군대가 아니라 유비가 원래 키웠던 군대로 하기로 했다. 공손찬은 그러면서 자기가 빌려준 군대의 통솔 책임자로 경험도 없는 초짜 장수 하나를 붙여 주었다.

    유비가 그 신출내기 젊은 장수를 보니 왠지 위풍당당함이 느껴졌다.

    "그대는 이름이 무엇이오?"

    "상산의 조자룡이라 합니다. 말씀을 많이 듣던 터라 이렇게 유현덕 공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아, 별말씀을 다 하시오. 제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랬다. 공손찬에게 빌려온 그 젊은 장수는 조자룡이었다. 훗날 유비가 조조군에게 쫓겨 목숨이 위태로울 때 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들어가 유비의 아들을 구해내고, 제갈공명과 마지막까지 촉나라를 지켰던 그 창의 명수 조자룡이었던 것이다.

    풋내기 조자룡의 등장

    이 젊은 장수는 키가 8척이 넘는 장신으로 특히 말에서 가벼운 창을 휘두르는 무예에 능했다. 조자룡은 심성이 무덤덤하였다. 그는 말수도 별로 없었고, 사적인 소유욕도 별로 없어 보였다. 특히 자기 물건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보통의 장수들은 자신이 아끼는 병장기를 하나씩 갖고 다니면서 그걸로 주특기를 삼고, 그것으로 자신이 일반인이 아니라 무예를 익힌 직업 군인임을 과시하곤 했다. 그러나 이 젊은 장수는 장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뭐 하나 특출난 무기를 갖고 다니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주로 보통 병졸들이 쓰는 나무막대기에 쇠꼬챙이를 박아놓은 가벼운 창을 그 때 그 때 손에 잡히는 대로 쓰고 막 버렸다. 조자룡에게 무기란 다 1회용이었다. 이것은 조자룡이 그의 스승으로부터 배운 가르침과 관련이 있었다. 조자룡의 스승은 눈에 보이는 형식을 통해 뭔가 드러내기보다는 내용만을 충실하게 할 것을 가르쳤다. 일종의 실용주의였다.

    어찌되었건, 훗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올지 아직 알지 못하는 이 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렇게 공손찬으로부터 군사를 빌려 재기의 밑천을 얻어낸 유비는 장비, 관우, 조자룡을 대동하고 도겸을 구원하기 위해 서주로 떠났다.

    그러나 서주는 이미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조조군은 벌써 서주의 여러 성을 점령하면서 착실하게 진격해 어느덧 서주성의 바로 코밑까지 포위망을 좁혔다. 서주가 조조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성안에 처박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도겸은 별 생각이 다 나서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차라리 항복을 할까?" 도겸은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보통의 경우 항복하면 항복한 모국에 조공을 부담하면서 기존 지배층은 일부 축소된 형태로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조조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온 것이 문제였다. 군사를 일으킨 명분이 아버지와 가족들을 모두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인 이상 조조도 도겸의 가족들을 모두 죽일 것이 거의 분명했다.

    도겸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신은 살만큼 살았다 쳐도 착해빠진 아들놈들은 또 어쩌란 말인가! 여기서 도겸이 더 가슴 아픈 것은 자신이 위험에 빠지자 아무런 구원병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절로 탄식이 일었다.

    ‘내가 인생 잘못 살았나 보구나.

    도겸은 마음에 병이 나고 있었다.

    그렇게 유비가 고마울 수 없었다

    바로 이 때 유비가 지원군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물론 불과 몇 천에 불과한 약졸들을 이끌고 온 것이었지만 도겸에겐 그렇게 유비가 고마울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결국 주변의 기라성 같은 제후국 중에 제대로 된 지원군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고 유일하게 유비라는 힘없는 장수 하나만 도겸의 요청에 응해 준 것이었다. 그렇게 주변의 모든 견제 세력들을 다 입 닥치게 할 만큼 조조의 전쟁 명분은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도겸은 유비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모두들 조조로부터의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나서주지 않는 마당에 유비만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주러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유비가 봐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유비가 막상 전선을 시찰해보니 자기가 봐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인 것 같았다.

    유비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후회가 밀려왔다. "아무리 내가 칼 찬 백수 생활을 오래했기로서니 이거 너무 위험한 지점에서 인생의 돌파구를 만들려고 한 거 같군!"

    그러나 유비는 자기가 자기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유비는 다시 약해지는 자기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도원에서 칼을 뽑은 지가 벌써 여러 해가 지났거늘, 이렇듯 칼 찬 백수로 세월만 보낸 게 어언 몇 년이더냐, 이제는 날 믿고 함께 거병해 준 동생들 볼 면목도 없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사력을 다해보자. 여기서 뭔가 삶의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

    유비는 그렇게 마음을 다시 정리하고 조조에게 다시 화친을 청해 보기로 했다. 그러자 도겸과 그의 신하들이 소용없는 짓이라며 만류했다.

    "이보시오 현덕, 이미 우리가 벌써 화평을 청해보았소. 전혀 소용없는 짓이오. 조조는 우리를 다 죽이려고 작정하고 온 놈이오."

    그러나 유비는 낙관적인 인물이었다. 아무리 남들이 비관적인 소리를 늘어놓아도 그놈의 근거 없는 낙관주의는 흔들리지 않았다. 유비는 ‘왠지 내가 하면 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유비는 그래서 만류를 뿌리치고 직접 조조에게 편지를 썼다.

    "제가 직접 조조에게 편지를 써서 평화조약을 맺어보겠습니다. 조맹덕과는 지난 반동탁 연합군 시절에 서로 같은 편이 되어 싸운 적도 있습니다."

    어차피 정면 대결을 벌일 경우 질 것이 거의 분명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더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유비는 정성을 들여 조조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는 사자를 조조의 군영으로 들여보냈다.

    그런데 이때쯤 조조의 군영에는 한 가지 비보가 전해지고 있었다.

    "장군 큰일 났습니다! 진류 태수 장막이 아군의 본거지인 연주를 점령했다 하옵니다!!"

    "뭐라고!! 아니 내가 조홍과 조인으로 하여금 연주를 지키게 하고 순욱과 정욱에게도 따로이 3성을 지키게 했는데 그들이 모두 당했단 말이냐?"

    "예 장군! 조인과 조홍 장군이 지키던 연주의 본거지는 이미 여포의 손에 넘어갔고 순욱과 정욱이 지키는 견성, 범현, 동아의 3현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아니 적장이 누구길래 어떻게 이렇게 쉽게 당한단 말이냐!"

    "장막의 군대는 여포를 선봉장으로 세우고 쳐들어 왔는데 주력부대가 없는 상태에서 기습을 받은데다 여포의 무력이 강해 아무도 당해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뭐 여포라고! 아니 언제 여포가 장막 밑에 들어가 있었단 말이냐?"

    다시 나타난 여포, 유비의 행운

    그랬다. 서주를 향해 진격을 시작하면서 조조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여포였다. 여포는 동탁 암살 사건 이후 동탁의 잔당이던 이각(李傕)·곽사(郭汜) 등에게 패하여 장안성을 빼앗겼다. 그 후 원술(袁術)에게 도망가 몸을 맡기려 하였으나 ‘배반의 달인’으로 소문난 여포를 원술이 믿지 못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러자, 여포는 다시 원소에게 찾아가서 그와 함께 장연을 공격했다. 그러나 원소와의 사이가 이내 틀어지고 이번에는 다시 원소(袁紹)를 떠나 장양에게 합세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장막의 휘하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처세의 일관성이 없이 배반과 이적을 밥 먹듯이 해온 여포의 삶이었던 것이다.

    하여튼 당시 진류 태수(陳留太守) 장막 (張邈)에게 의탁하고 있던 여포는 조조가 더 커지기 전에 그 뒤를 치라는 지령을 받고 조조의 본거지를 쳐들어갔다. 그리고 그 당시 조조의 남은 군사들 중에는 천하의 명장 여포를 꺾을 장수가 없었다. 조조의 본거지 연주는 거의 대부분 여포의 수중에 떨어졌다.

    조조는 황당했다. 이제 거의 서주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는 판에 진류 태수 장막이 자신의 배후를 친 거였다.

    "너. 이놈 장막이!!!"

    그런데 공교롭게도 유비의 편지를 들고 찾아온 사신이 조조의 군영에 도착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극도로 흥분한 조조는 격해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유비가 보낸 사신인지 뭔지가 화평을 청하러 왔다니 조조는 당장 그 사신을 확 베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조는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순간적으로 ‘그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분히 생각해보면 어차피 뒤에서 본거지가 무너진 이상 군대를 되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군대를 뒤로 빼게 되면 서주에 갇혀있던 도겸의 군사들이 퇴각하는 조조군을 또 다시 뒤에서 공격할 위험이 있다는 거였다.

    창과 방패로 운용되는 군대는 후진이 매우 곤란하다는 속성이 있다. 진이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일단 후퇴를 하게 되면 도중에 ‘군진’을 갖출 수가 없어 성에서 뛰쳐나온 군대가 후방을 치게 될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지금껏 승승장구하던 조조군은 갑자기 매우 위험한 상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조는 재빨리 자신이 처한 위험을 간파했다. 그리고 유비가 보낸 사신이 매우 중요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유비가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아직 유비가 조조가 처한 위기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순간적으로 발생한 두 개의 상황 즉 장막에 의해 배후의 본거지가 털린 상황과 눈앞의 적이 그것도 모르고 화친을 청하고 있는 상황을 순간적으로 잘 연결시켰다. 어차피 뒤에 있는 적 때문에 군대를 돌려야 하는데 앞에 있는 적이 모르게 잘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조조는 자신이 처한 위기를 숨긴 채 사신을 융숭하게 대접해 돌려보냈다. ‘유비의 얼굴을 봐서 화평요청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하겠다’는 식으로 답장을 보낸 것이다.

    ‘유비의 얼굴을 봐서…’

    이 소식을 들은 서주성 안의 도겸과 유비 그리고 그 수하 장수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다들 모여들어 한결같이 유비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아니 도대체 편지를 어떻게 썼길래 조조의 대군을 종이 한 장으로 뒤로 물릴 수 있었습니까!"

    사람들의 칭찬과 격려가 계속되고 유비는 죽을 위기에서 벗어난 서주의 백성들과 지배층들로부터 순식간에 신망을 얻게 되었다. 유비는 기분이 좋았지만 뭔가 얼떨떨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유비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어려운 상황에서 일이 잘 풀렸기 때문에 조조가 정말 왜 철군하는 것인지? 거기까지는 상상해 볼 만한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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