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태우가 만들고, 김대중이 없애고
        2009년 07월 21일 02: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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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당시 토지공개념을 추진했던 집단들이 결코 진보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재산공개제도가 없어서 그렇지 당시의 정부여당은 지금보다 더욱더 강부자 정당이었지 그 정도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경제수석의 발언을 미루어 보건대 당시 정책결정권자들의 인식은 단순한 립서비스는 분명히 아니었고 사태를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었다.

    당시는 집값 폭등 및 전세값 폭등으로 인한 일가족 집단자살 사건이 신문에 빈번하게 보도되던 시절이었다. 반면에 토지공개념을 다룬 <조선일보>의 기사에 의하면 강남에서는 1시간 당 1,000만 원씩 아파트가 오른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는 것이며, 당시 청와대에 있던 사람들조차 전쟁이 나면 적 때문이 아니라 남한 내부 갈등으로 붕괴될 수 있다는 말을 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 남산에서 본 서울시내 전경

    소설 『분노의 포도』에 나온 것처럼 도시에는 식량이 없어 사람들이 굶주리고 농촌에는 포도가 썩어가는데도 그 가격이 너무 낮아 인건비도 충당하지 못해 이를 수확하지 못하는 대공황 당시의 아이러니가 자본주의의 근본적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 것처럼, 당시 부동산 문제는 기본적인 사회정의도 존재하지 않는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당시는 그래도 북한이 아직 건재하던 시절이었으며 지식인과 재야인사들의 방북은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적행위라기보다는 소신 있는 통일운동으로 비추어졌고, 대학가에서는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이념이 확산일로에 있었다. 1920년대에 마르크스 책 하나를 끼고 다니지 않으면 행세하지 못했다는 ‘마르크스 보이’ 현상처럼 1980년대 후반 또한 소련과 중국, 북한에서 들어온 철학과 혁명이론이 대유행이었다.

    북한과의 경쟁

    사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공산주의와 북한체제에 대한 공포는 남한을 극도로 억압적이고 폭압적인 사회로 만들었으나, 한편으로는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자신의 기득권을, 체제를 지키기 위하여 일정한 양보를 하도록 강제하였던 것이다. 유럽에서 스탈린에 대한 우파의 공포가 우파의 양보를 낳아 사민주의를 가능케 하였듯이 한국에서도 북한에 대한 공포가 지배계급의 양보를 강제한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사회경제적 제도개선은 그 전에도 이와 같은 경로를 밟았다. 북한의 급진적 농지분배 때문에 남한의 농지개혁 또한 강력하게 추진될 수밖에 없었으며, 전국민 건강보험과 국민연금과 같은 제도 또한 의료와 노후가 보장되었다고 하는 북한 사회주의의 존재가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당시 보수세력은 문희갑 경제수석에 대해서 ‘빨갱이’라고 비난하였으나 그는 6공화국의 명운을 걸고 추진한다고 밀어붙였고, 정부안은 일부 후퇴가 있었으나 기본골자는 유지된 채 국회에 상정되었다.

    토지공개념 3법에 대해서 야당은 별로 반대하지 않았으며, 김대중의 평민당은 보다 진전된 안을 내놓았다. 택지 소유상한제의 대상자를 서울의 경우 150평으로 낮추고, 부담금도 일률적으로 정하지 말고 공시지가에 따라 그 금액을 차등화하자는 안이나 개발이익 환수 대상 사업에 골프장 건설도 포함시키자는 안이 그것이다. 평민당의 주장은 일부 수용되어 토지공개념 3법은 여야 합의로 통과되었다.

    6배의 세수

    토지공개념은 실효성이 있었을까? 어찌되었든 90년대 초 중반의 부동산 시장은 어느 정도 안정세였다는 평가도 있는 것 같다. 당시 토지공개념 3법에 의하여 징수된 세금, 부담금 액수를 보면 그 실효성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택지초과소유 부담금은 92년부터 징수되어 93년도 최대 3632억이 징수되었고, 92년부터 97년까지 총 1조 6588억원이 징수되었다. 개발부담금은 90년부터 징수되었는데 97년 6146억원이 징수되는 등 90년부터 97년까지 1조 7809억원이 징수되었다. 토지초과이득세의 경우 93년도 정기과세 때 9,477억원이 징수된 바 있다.

    1991년 당시 한국의 조세수입이 34조, 3법 통과당시인 1989년도 당시 재산세는 3700억 정도였다. 즉, 토지공개념 3법으로 인하여 걷힌 93년도분 세금, 부담금은 89년도분 재산세의 약 3.8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토지공개념과 같이 도입된 종합토지세까지 고려한다면 그 액수는 약 6배에 달한다.

    토지 관련법 없앤 건 김대중 정부

    이 토지공개념과 관련된 또 다른 아이러니는 김대중 정부와 관련된 것이다. 토지공개념 3법은 위헌결정을 받아 다시는 도입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있는데, 이는 정확한 것은 아니다. 토지초과이득세법은 1994년에 법률 전체가 헌법불합치결정을 받았고, 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은 1999년 위헌결정을 받았다.

    그런데, 이 헌법재판소 결정들은 완전히 잘못 알려져 있다. 1994년 토지초과이득세 대한 헌법불합치결정으로 이 법률은 헌법재판소의 취지에 따라 개정되어 완전히 합헌적으로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김대중 정부가 1998년도 외환위기 극복과 경제회복이라는 미명으로 토지초과이득세법과 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을 모두 폐지해 버린 것이다. 즉, 이는 위헌이기 때문에 없어진 것이 아니라 김대중 정부가 없앤 것이다.

    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은 폐지된 이후 그것이 적용되던 구 법에 대해서 위헌결정이 있었다(대개 법률이 폐지되더라도 장래에 폐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적용되던 부분에 대해서는 부담금 징수가 계속 이루어진다).

    이 또한 제도 자체가 위헌이라는 것은 아니었고, 부담금의 비율만 적정하다면 합헌일 수 있다는 취지였을 뿐만 아니라 만약 위헌심판대상이 폐지된 법률이 아니라 현행법률이라고 한다면 헌법재판소에서 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을 위헌이라고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즉, 토지공개념은 김대중 정부가 폐지해 버린 것이지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 때문에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사정부의 후신이 혁명의 위협이 있다고 하여 계급 전체의 양보 차원에서 도입한 제도를 첫 평화적 정권교체로 정부에 입성한 민주정부가 폐지해 버린 이 아이러니는 사실 왜 민주정부 10년이 한나라당 집권을 가져왔는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좋은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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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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