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통이 문제’라는 거짓말
        2009년 07월 20일 10: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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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이 사회담론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소통과 불통, 양극화된 정치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를 ‘불통정부’로 규정했다. <경향>은 ‘한국, 소통합시다’는 기획연재물을 내놓고 있다. 이 기획에는 윤여준, 신영복, 박원순 등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참가했다.

    이명박 정부 겨냥한 ‘소통’ 담론, 불편하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핵심은 ‘야당’이다. 견제세력의 건재함이 필수다. 이명박 정부의 한국정치가 보여주는 특징은 ‘야당 없는 민주주의’다. 집권여당의 박근혜 전 대표 발언에 야당의 명암이 달라진다.

    지난 총선에서 국민들은 투표를 통해 이명박 정부 견제세력으로 박근혜를 찍었다. 야당이 아닌 여당 내 세력을 정권의 견제세력으로 뽑았다는 사실은 야당들이 존재감조차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한겨레21>이 ‘해머 국회’를 야당의 발견으로 쓸 정도니 어느 수준인지는 짐작하리라.

       
      

    야당의 부재에서 이명박 정부에게 소통을 강조할 수 없다. 정치는 신이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다. 견제세력이 없는데 소통을 하라는 건 도덕적인 관점이다. 낭만일 뿐이다. 정치는 도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하는 것이 정치다.

    이명박 정부는 지지자 혹은 대중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지지자 혹은 대중에 대한 정권의 책임성과 반응성 부재가 문제다. 소통 대 불통, 소통 담론은 정치적인 책임성과 반응성을 간과한다.

    소통 담론은 정치적인 것을 도덕적인 것으로 보는 오류를 범한다. 사회담론을 소통과 불통으로 양극화한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 시민 없는 시민사회,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한 반응을 차단한다.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나타난 소통 담론은 엘리트 중심의 여론형성이 가지는 폐해다. 이러한 담론들은 사회 현실과 크게 괴리돼 사회 문제에 대한 진단을 할 수 없다.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는 차단되고 대중적인 담론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정치적인 폐해도 만만찮다. 소통 대 불통으로 양극화된 담론은 사회경제적 담론을 둘러싼 정치대결이 아닌 선악이란 극단적 구도를 불러온다. 한나라당과 반대세력, 빨갱이 대 자유민주주의 수호세력 등으로 표출된다. 자연스레 최대 정치연합이다. 한쪽에선 민주대연합, 다른 한쪽에선 보수대통합이다. 과거 불문. 모두 모여라. 내부 비판과 다원적인 세력형성은 금기시된다.

    현 정부와 흡사한 진보진영, ‘소통’ 정치는 없다

    진보진영도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진보정치 1번지 울산이 현실이다. 집권 8년의 경험이 있는 울산 북구는 진보진영의 미천한 실력을 다 드러냈다. 구청장 8년 동안 한 것은 화장장 유치와 음식물자원화시설(쓰레기재활용시설) 건설이었다. 조승수 의원이 구청장 시절 화장장 유치를 주민투표로 실패하자 음식물자원화시설을 만들어 이상범 구청장에게 넘겼다.

    당시 이상범 구청장은 음식물자원화시설을 강행했다. 음식물자원화시설은 공직자와 당이 야합한 결과물이다. 집권 8년간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지역주민들과 갈등에서 택한 길은 현 정부 못지않다.

    이전 한나라당 집권 시기보다 더 강력한 공권력을 동원했다. 당시 지역에서는 "저것들 시켜놓으니 진짜 무식하게 밀어 붙인다"는 반응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연상되지만 엄연히 진보정당 집권기 일이다. 믿기 싫겠지만 진보진영 지방행정 8년이었다.

    진보 국회의원을 배출한 지역임에도 당선자와 현장 노동자들의 네트워크조차 없었다. 현장 노동자들이 진보 국회의원을 감시 혹은 소통할 수 없는 현실은 MB의 불통정치에 맞먹는다.

    진보진영은 정파를 통해 현장노동자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대했다. 정파는 현장노동자들을 기계적으로 동원하고 이용한 이들이다. 진보진영의 노동운동과 정당운동은 공조직 중심이 아니다. 오로지 정파다.

    정파가 조정해 공조직을 무너뜨려왔다. ‘세팅투표’와 ‘줄 세우기’ 정치에서 소통은 있을 수 없다. 현장 지도자들은 정파의 지침과 정치방침을 관철해왔다. 대리정치, 대리투쟁일 뿐. 하부영 전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은 노조 간부들이 자주성을 상실했다며 “정파의 ‘꼬봉’과 ‘똘마니’”라고 비판했다.

    최근 지자체 정당공천제 폐지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정당을 통한 지방정치가 위기를 맞은 것은 정당의 사회적 기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풀뿌리 정치는 정당의 뿌리 깊은 사회적 기반이 절실하다.

    현 정치개혁 논의처럼 ‘영호남 일당독재구도 타파’와 ‘중대선거구제’에 초점을 맞추면 제도권 정당들과 아닌 정당으로 양극화된다. 영남에서 민주당, 호남에서 한나라당이 나눠먹는 제한된 이데올로기적 틀로 수용된다. 다원적인 세력형성을 차단하는 효과도 나타난다. 정당의 허약한 사회적 기반이 문제의 초점이 되지 않는다.

    잊지 말아야 할 것, 책임성과 반응성 그리고 정당

    중요한 것은 책임성과 반응성이다. 지지자와 대중의 목소리에 얼마나 반응하는지는 정권의 사회적 기반을 보여주는 척도다. 정권과 대중의 매개체로 정당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집권여당은 어떤가. 책임과 반응이 없다. 정부의 거수기 혹은 계파 수장에 충성을 다할 뿐이다.

    야당들도 다르지 않다. 노무현 정권시절 주요정책들을 집행, 추진하면서 지지자와 대중에 반응하지 않았다. 정권을 넘겨준 지 2년째임에도 기본적인 책임조차 지지 않았다.

    문제는 정당이다. 책임성과 반응성을 기반으로 성찰과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여권의 실패를 기도하거나 ‘묻지마 대통합’으로 다시 정권을 잡겠다면 오산이다. 정권을 잡더라도 즉시 한국정치의 비극이 될 것이다.

    정치시장에서 현 집권세력보다 더 좋은 대안들로 유권자들에게 선택받아야 한다. 정치적,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과거불문 ‘묻지마 대통합’도 소통도 아니다. 다시 ‘정당의 귀환’을 말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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