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프로젝트를 중지시키자”
    2009년 07월 18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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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빈이 번역한 책 표지. 

지난 세기 말 한국에서 알뛰세르와 발리바르의 유행, 그리고 21세기의 벽두를 장식한 네그리 붐에는 그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바가 크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문화적 현상이 엿보인다.

그 이론들의 옳고 그름과는 무관하게 그 이론들이 소개 수용되는 과정이 대단히 ‘전투적’이라는 점이다. 여러 어려운 언설이 난무했지만, 사실 그 이론의 소개자들이 던지고 싶은 말은 “이게 답이야. 따라와!”라는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칼 폴라니가 다른 건 그런 흥분이나 어기짱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점이다. 어쩌면 칼 폴라니의 이론이 가지는 개방성이나 유연함 때문일 수도 있고, 한국의 알뛰세리안이나 아우토노미스트들보다는 폴라니 번역자가 덜 경직된 인간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 폴라니를 이야기하자면 단연 홍기빈이다. 스스로는 “‘폴라니주의’ 같은 말은 형용모순”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폴라니를 상대화시키고 있지만, 인터넷에 ‘폴라니’를 검색하면 ‘홍기빈’이 따라 나올 만큼 홍기빈은 독보적이다.

2년 들여 『거대한 전환』 번역

6월 말, 칼 폴라니의 대표 저작이라는 『거대한 전환』을 홍기빈이 번역해 내놓았다. 1944년 처음 출판된 이 책은 지금은 절판된 일본어 중역판으로 한국에 소개된 바 있다. 홍기빈은 2년을 들여 『거대한 전환』 “아예 새로” 번역했다.

진보정당 ‘불량당원’이자 촛불집회의 열성 참여자였던, 금융경제연구소 홍기빈 연구위원을 만나, 칼 폴라니가 누구이고 『거대한 전환』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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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꽤 많이 소개되고 있지만, 칼 폴라니는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다. 어떤 사람인가?

   
  ▲홍기빈.(사진=이재영)

= 19세기부터의 진보운동은 아나키즘-사회주의-공산주의의 큰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왼쪽에는 크로포트킨이 있고, 오른쪽에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있다.

그런데 서구에서도 그렇고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너무 심하게 맑스 위주로 진보를 이야기한다. 큰 흐름들 속의 맑스로 보는 게 아니라, 맑스주의의 눈으로 모든 걸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폴라니 같은 사람을 설명하기가 곤혹스럽다. 진보운동의 큰 관점에서 보게 되면 폴라니는 황당한 사람이 아니다. 폴라니는 로버트 오웬으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고, 영국의 길드사회주의를 적극 수용했다. 오스트로 맑시즘과도 교류가 많았다.

폴라니는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풍부하고 다양하게 서구 진보운동을 보게 되면, 폴라니 역시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한 사람이라 설명할 수 있다.

– 그렇다면 맑스가 스스로를 차별화시키고자 만든 ‘과학적 사회주의’에는 속하지 않지만, 광의의 사회주의자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 그렇다. 그는 분명하게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밝혔다. 특히 민주적 사회주의자라 했다. 한편 사회민주주의자는 아니다.

국가권력으로 어떻게 해보려 한다는 점에서 사민주의는 공산주의와 다르지 않다. 다만 정권 획득의 방법, 그 폭과 속도에서만 다르다. 그런 점에서 사회민주주의와 폴라니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다르다.

로버트 오웬이나 칼 폴라니는 국가를 부정한 것도 아니고, 시장경제 말소를 주장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사회’를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려 했다.

국가나 시장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옳지 않다

– 폴라니의 이론이 지향하는 ‘무엇’은 무엇인가?

= 국가나 시장이 단일하게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국가든 시장이든 그에 맞는 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폴라니는 생각했다. 인간 사회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기능적 효율성으로만 따질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결단과 자유라는 가치가 사회의 핵심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맑스가 비판했던 공상적 사회주의 또는 청년기 맑스의 소외 이론과 비슷하게 들린다.

=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폴라니의 이론이 그런 것들과 비슷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폴라니는 20살 때 맑스를 처음 접했는데, 제2인터내셔날 식의 경제결정론을 거부한다. 1920년대에는 대안사회주의를 연구하며 『자본』을 공부했는데, 역시 거부한다. 『자본』에서 맑스는 사회가 논리적 과정으로 구성된다고 보는데, 이런 시각에는 인간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폴라니는, 1932년에 출판된 『경제학 철학 초고』를 보고 충격받고 기뻐한다. 노동소외 개념, 그 맑스를 받아들인다. 이런 의미에서는 폴라니를 ‘맑스주의자’라 할 수 있다.

– 맑스는 『자본』 서문에서 자신의 연구가 이론물리학처럼, 다양한 조건을 사상(捨象)한 것이라 말한다. 즉, 맑스의 『자본』은 이론경제학인데, 폴라니는 구체적인 역사를 연구했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 그렇지 않다. 맑스는 사회를 시장이 운동하는 논리적 구성물로 본다. 그런데 폴라니가 보기에 실제 사회적 과정은 그렇게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우노 고조(宇野弘藏 ; 일본의 맑스주의 경제학자)와 칼 멩거(Carl Menger ; 한계효용이론을 만든 오스트리아 경제학자)도 맑스 정치경제학이 순수이론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자본』을 이론 참고서로만 보는 게 아니므로 그런 해석은 옳지 않다.

인간 사회는 논리적 구성물이 아니다

– ‘기능’ 부분과 국가, 시장을 연결해 설명해달라.

= 국가나 시장은 기능적인 존재다. 그런데 인간 사회는 기능적으로만 구성되는 게 아니고, 기능적이지 않은 삶의 조직이 수없이 실재한다. 폴라니는 이런 삶의 조직, 사회가 국가와 시장보다 우위에 서서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민주노동당 강령에 언급돼 있는 “민중의 삶이 이루어지는 일상의 곳곳에서…민중 권력을 구축한다”는 구상,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 비슷한 것 같다.

   
  ▲칼 폴라니. 

= 그렇다. 그리고 폴라니가 말하는 ‘사회’는 사회학의 추상적 사회가 아니라, 노동조합, 협동조합, 계모임 같이 아주 구체적인 인간관계다.

– 유고에서도 그런 노력을 했었고, 라틴과 발칸, 독일 이동(以東)의 오스트리아 등에서는 그런 경향이 강한 모양이다.

= 국가주의의 영향이 강했던 독일과 달리 그런 곳에서는 생디칼리즘의 영향이 강했다.

구체적 인간관계에서 시작하자

– 『거대한 전환』의 개요와 요지를 설명해달라.

= 시장경제란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는 게 『거대한 전환』의 요지다. 인간의 경제행동을 모조리 가격으로 결정하는 시장메커니즘으로 조직할 수 있다는 시장경제는 실현된 적도 없고, 실현될 수도 없다. 19세기 사람들은 이런 시장경제가 작동한다고 믿어서 사회를 그렇게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럴수록 사회는 파괴된다.

완전한 시장경제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연, 사람, 화폐를 온전한 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들은 내다 팔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상품화하지 않으려는 자기보호운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시장경제론자들이 제창하는 자기조정운동과 그에 저항하는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은 마치 골룸과 스미골의 2인 자작극처럼 모순되는 것이다. 폴라니는, 자기조정운동과 자기보호운동의 분열이 파시즘과 양차대전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 사회가 상품화에 저항한다는 실례를 좀 들어달라. 그리고 폴라니의 주장을 조금 더 보충해달라.

= 시장법칙대로라면 이번 경제위기 때 미국 은행 10개쯤은 파산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파산한 신고전파 경제학자들도 시장논리대로 퇴출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시장논리의 파산에, 케인즈는 시장을 전제하면서 국가 개입을 통해 보충하려고 하는 데 비해, 폴라니는 시장이 필연이라는 견해를 거부하고 사회적 조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자기조정시장’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를 중지시켜야 한다. 시장을 사회의 지배 아래로 내려보내야 한다.

시장논리가 작동하거나 시장경제가 존재한 적 없다

– 사회가 폴라니의 주장처럼 가동되려면 특정한 인간관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 아담스미스나 맑스가 인간에 대해 비관적이거나 냉정한 데 비해, 폴라니는 인간을 신뢰하거나 낙관하는 것 같다.

= 폴라니는 인간이 선하다는 식으로 사고하지 않고, 총체적 존재로 파악한다. 예를 들어보자. 인간의 노동 동기는 거의 무한하다. 시장주의자들 주장처럼 경제적 욕구뿐 아니라 다양한 이유나 계기가 작용한다.

폴라니는 이런 주장을 철학적 사변에서 내오지 않고, 인류학적 역사적 연구를 통해 경험적으로 증명한다. 베네딕트 수도회는 돈이 아니라, 고행과 참회를 위해 일했다. 순전히 돈이라는 계산만 가지고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경제적 수입뿐 아니라, 적성이라든가 자신이 하고 싶은 바라든가 다양한 이유가 작용하게 된다. 인간을 경제적으로 파악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비현실적이다. 인간은 총체(as a whole)다.

– 하지만 폴라니의 구상처럼 구체적 인간이나 인간집단들이 경제의사결정을 하거나 경제행위에 나서게 되면 서로 경합하게 되지 않을까? 결국 다시 자본주의화하는 것은 아닐까?

= 생산자조합과 소비자조합이 협상하여 경제를 운영해야 한다는 폴라니의 구상에 대해 미제스(Mises ;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화폐 연구-편집자 주)가 ‘싸움 난다’고 비판했었다. 그런데 이미 싸움은 있다. 비효율적이고 조정이 되지 않는 싸움인가, 조정이 되는 싸움인가가 문제다.

– 어느 좌담 기사를 보니 정태인도, 우석훈도 “이제 폴라니다”라는 식으로 말한 것처럼 보도할 만큼 폴라니의 이론이 각광받고 있는 것 같다. ‘폴라니주의’라는 게 있는가, 그런 언설이 가능한가?

= ‘폴라니주의’ 같은 말은 들어본 적 없고, 그런 게 생긴다면 형용모순일 것 같다. 폴라니의 이론을 굳이 정의하자면 ‘민주적 사회주의’ 정도가 적당하다.

인류 사회에 대한 근본적 질문과 체계적 대안 필요

– 현대 세계, 그리고 지금 이곳의 한국이라는 관점에서 폴라니의 이론이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 전세계적으로 폴라니를 봐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되고 있다. 최근 다시 재기하고 있는 케인즈 정도로는 안 된다. 케인즈주의식 시장 규제 정도로는 안 된다. 경제위기뿐 아니라, 생태 지구적 위기를 보며 시장경제란 과연 무엇인가, 인류에게 닥친 위기는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케인즈나 맑스보다는 폴라니의 질문이 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권 때부터, 자산가격의 상승을 위해 사회를 전면적으로 바꾸자는 캠페인이 전개됐다. 그렇게 했을 때 사회와 자연에 어떤 위기가 닥치는지를 지금 목격하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단순히 도덕적 경종에 그치지 않고 체계화된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폴라니 이론의 의미가 있다.

   
  

사회와 경제를 조직하는 원리는 인간과 자연의 삶을 최대한 풍부하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 폴라니의 이론에서 잘못되거나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학자 폴라니와 학자 홍기빈의 차이는 무엇인가?

= 폴라니에게는 자본축적이론이 없다. 자본축적의 논리를 추적해야 현실 자본운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폴라니의 이론에는 ‘지배’라는 개념도 빠져 있다. 이 두 가지는 원래 맑스가 연구하려 했던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채워 넣는 연구를 하고 싶다.

상상과 행동의 폭을 넓히자

– 요즘 주로 무슨 일을 하는가?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 금융경제연구소 일을 계속하고 있다. 내년 초쯤에 금융성장론의 허구에 대한 책을 내려 준비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이상(理想)으로 떠들어댄 아이슬란드, 싱가폴, 두바이 경제가 많이 망가지고 있다. 금융을 성장동력으로 삼자는 금융허브론을 비판하는 책을 쓰고 있다.

– 폴라니의 주장 많은 부분에 동감이 가지만, 현실 운동이 폴라니와 함께 가려면 많은 걸 포기해야 할 것 같다.

= 폴라니의 방법은 지리하고, 오래 걸리고, 밑 빠진 독에 땀을 쏟아붓는 식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개량’이라고 비난하는 건 부르주아 한담가들보다 더 나쁜 ‘사회적 귀족’이다. 우리는, 맑스를 상대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맑스의 위대함과 한계가 보인다. 우리 스스로 상상력을 제약하고 행동의 폭을 좁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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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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