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너지혁명은 무의미하다”
        2009년 07월 15일 11:35 오전

    Print Friendly

    "독일의 마르틴 예니케 교수에 따르면, 스마트 성장은 생태적 현대화를 통한 지식 집약적이고 자연 절약적인 생산을 하자는 뜻이며 대체 에너지를 의미하는 에너지 혁명을 뜻한다. 즉 스마트 성장이란 숫자상으로 드러나는 성장률은 작더라도 실제 혁신의 비율은 높은 상태를 말합니다.

    노동생산성은 줄어들지만, 자원생산성은 더 높아지는 상태이다. 제 3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친환경 경제가 단순히 에너지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 정치구조까지 크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지금 세계를 흔들고 있는 식량위기는 미국 주도의 세계무역체제의 궁극적인 결과이다. 예를 들어 독립 당시에는 식량을 수출했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지금은 전체적으로 식량의 30% 정도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부채에 고통 받는 나라들에 대한 IMF와 세계은행의 은행관리이다.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색채를 강화한 이 두 조직은 세계에 선진국형 공업을 모델로 한 농업을 강제하여 대규모 농지에 수출용 환금작물의 재배를 장려했다.

    게다가 GATT 체제하의 농산물 무역자유화 때문에 정부의 원조를 받은 값싼 구미의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와, 지역에서 가족농업에 종사하는 자작농민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IMF와 세계은행의 경제전문가들은 농업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가족농업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식량위기는 그저 식량 확보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엘리트들의 세계무역의 논리와 민중의 지역적 자급의 논리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농을 대체한 식량위기

    이런 갈등은, 1995년 창설된 WTO(세계무역기구)의 도하라운드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대립으로 완전히 교착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WTO의 목표는 관세의 전세계적인 일괄인하였는데, 제네바에서 열린 153 개국 가맹국의 교섭은 완전히 결렬되어 재개될 전망조차 불투명하다.

    결렬의 최대 원인은 정부원조를 받은 선진국의 과잉 농산물이 대량으로 유입되면 자국의 영세농민들에게 타격을 입힌다는 이유로 인도가 긴급수입제한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브라질도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무역에서 북측의 선진국이 남측의 개발도상국에 제멋대로 규칙을 강요하는 시대는 완전히 끝이 났다. IMF와 세계은행의 신자유주의는 자유무역은 약육강식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고, 그것이 WTO를 좌절시킨 원인이 되었다.

    개발도상국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것이 1992년 온두라스에 본부를 두고 창설된 비아캄페시나(Via Campesina, 농민의 길)이다. 비아캄페시나는 세계 각지의 자작농, 선주민, 농촌여성, 어민들로 된 백 개 이상의 조직이 연합한, 회원 수가 1억 5천만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민간조직이며, 창설된 지 얼마 안되지만 이미 국제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종래의 식량안보 대신에 비아캄페시나가 주장하는 식량주권원칙을 헌법조항으로 삼는 나라도 생겼다. 식량주권이란 국제시장에 좌우되지 않고 인민이 자신의 먹을거리나 농업방식을 스스로 정의하는 권리다. 농산물을 단지 상품으로 유통시키는 무역자유화나 현지 자작농의 존속을 곤란하게 만드는 식량원조 등은 주권 침해에 해당된다.

    나아가서 그것은 식량과 관련하여 국토나 식문화의 존재방식에까지 걸친, 자신의 독자적인 생활양식을 선택하고 지킬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생활 양식을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세계무역에 대한 근원적인 반대인 것이다.

    “식량원조도 주권침해다”

    비아캄페시나의 요구는 자급에 국한되지 않고 농민 이외의 지역주민들도 인간다운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자원과 물자를 스스로 관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요체는 선거의 유무와 경제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활양식에 관련한 지역주민의 자치에 있다. 따라서 무역과 자급을 둘러싼 논의는 최종적으로 민주주의를 어떻게 다시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진보신당에서 또는 진보당에서의 유럽 사민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자칫 근본적인 민주주의 위기를 가져 올 수 있다. 유럽 사민주의 국가들의 富의 원천은 아직까지 남쪽 신흥개발국으로 부터의 약탈에 근본을 두고 있음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제는 과거와 같은 남쪽 나라로부터의 약탈은 더 이상 쉽지 않을 전망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는 유럽과 자유무혁협정을 맺었다. 앞으로 자유무혁협정은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콜럼버스가 우연히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인도의 향신료와 일본의 황금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유럽인들에 의한 신세계 아메리카의 약탈과 식민지화였다. 아즈텍과 잉카의 막대한 금은의 약탈은 유럽의 통화유통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맑스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부른 것의 실체가 바로 이 약탈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담배나 설탕 등 아메리카 산물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생기는 한편, 아메리카로 이주한 유럽인은 종래의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한 물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무한히 시장이 확대되었다. 시장의 거대한 수요를 생산하기 위해 카리브해 지역의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흑인들의 노예노동이 필요로 했다.

    풍부한 자본, 무한히 확대된 시장, 싼 노동력이라는 자본주의가 성립되기 위한 조건이 이렇게 갖춰졌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제무역의 약탈을 통해서 생겨났고, 그 뒤에 유럽의 강력한 국가들이 존재했었고, 유럽의 국가들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무한한 자원과 싼 노동력을 약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민주의, 맑스, 유럽

    무역은 전통적 생활양식에서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런 끊임없는 창조적 파괴가 오늘날 세계무역의 원리가 되었다. 이는 세계무역이 상호간의 필요한 물자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무한한 확대에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이는 자본의 유통과정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생산과정(플랜테이션 경영)까지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의 세계무역은 식민주의 폭력의 모태로 태어났고, 이에 종사하는 자의 막대한 이익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지역의 식민지화나 흑인노예의 결과이다. 이는 곧 지역 간의 대등한 교역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대등한 교환을 위장한 항시적 약탈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가 곧 유럽의 자유 평등을 기반으로 한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와 같은 때였다. 따라서 유럽 근대 국가는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자원수탈과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인 무역은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상인이 중심이 되었고, 그것이 상대국의 생산까지 지배하는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무역을 통한 식민지화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또 전통적인 무역에서의 서민들은 변함없이 지역적인 자급에 기초하여 생활 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근대국가가 이런 이유로 탄생이 되고, 신세계로 이주한 이주자들 역시 토지와 생산 수단을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었다. 존 로크의 ‘시민정부론’의 사회계약은 바로 새로운 이주자들이 약탈한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대가로 국가의 창설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신세계의 약탈 무역을 기반으로 해서 유럽과 신대륙에 근대국가가 탄생되는 것이다.

    영국은 세계무역을 통하여 대상업제국을 만들었지만, 영국이 경험한 시행착오를 의식적으로 계획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오늘날 세계무역은 기본적으로 미국이 설계하고, 그것을 세계에 강제한 것이다.

    근대국가와 무역전쟁

    미국이 1, 2 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중심의 세계적인 무역체제를 완성시키기 위해서였으며, 이는 제2차 대전 이후 IMF, 세계은행, GATT에 의해 보완되는 브레튼우즈체제로 실현되었다.

    IMF나 세계은행의 역할은 외환시장의 안정과 후진국 원조가 아니라 미국식 경제성장의 논리에 세계를 편입시켜서 성장조건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런 결과로, 오로지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각 나라의 균형잡힌 국토개발과 경제 방식이 왜곡되어 버렸다. 그 결과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공업용 자원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능가하는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거의 자급자족하던 식량과 원유에 대해 세계적인 수입국이 되어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식량과 원유의 가격 상승은,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미국에 의한 왜곡된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들의 번영에 종말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신흥 독립국이다. 미국은 자국에서만 통용되는 경제성장 논리를 그들 나라에 강제해 왔다. 근대화를 위한 자본이나 기술이 없는 나라들은 IMF 융자나 세계은행의 원조에 의지하여 근대화를 시도했으나, 구미형 경제성장을 위한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나라들에서 그런 융자나 원조가 결실을 거두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극히 이례적으로 성공한 경우가 한국이고, 일본의 경우는 식민지가 아니고 오히려 제국주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 올 징후가 뚜렷하다. 그리하여 남쪽의 신흥 독립국의 세계는 부채에 늘 시달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미국과의 자유무혁협정에 못지않게 유럽과 그 어느 나라와의 자유무역협정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도 반대해야 하지만 다른 나라와의 그것도 역시 반대해야 한다.

    이 모든 무역의 국제질서는 대량소비와 대량 생산에 기초한다. 그 동안 선진국은 후진국을 착취함으로써 그들 나라의 소비와 생산을 유지해 왔다. 우리나라 또한 다른 나라와의 자유무역 협정을 맺으면서 착취하거나 착취당하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마르틴 예니케 교수는 다음 과 같이 이야기 했다. "제 3의 산업혁명은 혁신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성장률에 촛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또한 각 나라별로 기술 이전이 아닌 기술협력을 통한 혁신이어야 한다고 했다. 예니케 교수의 스마트 성장의 핵심은 대체 에너지 기술 혁신을 통한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의 혁명을 뜻한다.

    과연, 기술혁신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러나, 설사 예니케 교수의 말대로 에너지에 대한 기술 혁신이 일어난다고 해서 바뀌어지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들은 지금까지 누려 온 소비의 형태를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기득권층의 富는 절대적인 아성일 것이다. 에너지 혁명을 통해서 이것이 바뀌어질까?

    아니, 에너지 혁명을 시도한 것은, 스스로 이런 소비와 부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만약, 대량 소비와 부에 대한 폭력성을 획기적으로 개혁할 의지가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화석 연료 사용 감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에너지보다 다른 것에 있다. 소비는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를 만족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만족스럽게 느껴지는 때가 찾아왔다. 그래서 새로운 설명이 필요했다.

    바로 과학이라는 형태로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분업과 노동생산물의 분배를 해결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했다고 선언했다. 정치경제학에 의하면, "분업과 분업을 통한 생산물의 향유(소비)는 수요와 공급에, 자본, 임차료,임금,가치,이윤에, 즉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경제 활동을 지배하는 불변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많은 서적과 강연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 결과 불균형은 점점 증가했다. 어떤 사람(나라)들은 일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나라)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지금까지의 산업혁명은 생산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제 3차 산업혁명은 에너지의 효율과 생태에 대한 것들이다. 산업혁명이 사회전반의 변화를 야기했는데, 제 3차 산업혁명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이런 식의 대량 소비와 부의 불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에너지 혁명은 자칫하면 이런 사회구조를 더욱 확고히 할 수도 있다. 유럽의 사민주의가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히 했듯이. 다른 나라의 불행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뜻이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에너지 혁명은 부질없는 짓이다. 기존의 성장의 경제는 이런 것들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1000조를 100조로 줄이자”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은, 1000조 달러를 1100조 달러로 성장해서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성장을 할수록 분배가 더 어려워진다) 1000조 달러를 100조 달러로 감소시켜 분배하는 것이다.(성장이 감소할 수록 분배는 쉬워진다)

    스마트 성장은 성장률에서는 관심이 없지만 자의든 타의든 기존의 경제구조(대량소비, 왜곡된 부)를 유지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런 불손한 목적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 성장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성장은 더욱 감소해야 한다. 그럴수록 분배는 더욱 원활해진다. 성장할수록 분배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야기 하나. 부모가 3000만원 전셋돈을 남기고 간 형제는 웃으면서 나누어 갖지만, 부모가 30억 땅을 남기고 간 자식들은 원수가 될 확률이 높다)

    예니케 교수 또는 일부 생태주의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생태가 단순한 녹색만을 이야기 하는 줄 안다.그러나 생태적인 철학의 기본은 관계이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 그 관계가 평등해야 한다는 데서 생태주의는 출발한다. 따라서, 생태적 해결 없이는 민주주의도 요원하다.

    에너지 혁명보다 에코(생태)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들의 관계가 바뀌어야 한다. 에너지 혁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제 성장을 대폭 줄이는 일이다. 불교에 中道라는 말이 있다. 불교는 정신적 해탈을 중요시 여기지만, 물질 또한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그 물질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