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석기인들은 왜 그림을 그렸을까?
        2009년 07월 14일 10:5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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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1천년을 지나면서 근대유럽의 전면적 변혁을 가져온 르네상스의 뿌리는 현실의 고통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인문학의 폭발이다. 경제적 동인이 인문적 부흥과 맞물리면서 사람들에게 비판정신과 희망을 새겨준 것이다.

    한국사회는 아직 르네상스를 거치지 않았다. 80년대의 부흥은 ‘번역’의 르네상스였으며, 스스로의 인문적 폭발은 아니었다.

    철학이 빈곤한, 아예 없는 한국의 좌파나 우파를 향해 필자가 이 글을 통해 먼저 전하고 싶은 핵심 내용이다. 이 글의 필자는 인문학적인 부흥을 통해 고통과 무력감에 빠진 대중들에게 희망과 활력을 줄 수 있으며, 그 출발점이 ‘철학’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레디앙>은 국민승리21 시기부터 진보정당의 정책, 기획 부문의 책임자로 주요 역할을 해왔던 박홍순의 ‘미술로 보는 서양철학사’를 장기 연재한다. <편집자 주>

       
      

    구석기 동굴벽화에 나타나는 표현 능력의 진화

    우리는 원시사회에 대해 말할 때 흔히 선사시대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말 그대로 문자를 통해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의 시기를 뜻한다. 문자로 된 자료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철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당연히 인간 사고의 시원(始原)에 해당하는 구석기 시대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난점은 문자로 기록된 것이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문자가 없다고 해서 구석기인들의 의식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문명인가를 막론하고 인간의 역사에서 보면 시기적으로 그림이 문자에 앞선다. 문자가 생기기 이전에 그림이 문자의 역할을 어느 정도는 대신했다. 지금부터 약 3만 년 전에 시작한 구석기시대 후기가 되면 실용적인 기능과 연관된 ‘미술작품’이 나타난다. 동굴벽화, 암각부조, 환조를 비롯하여 짐승 뼈에 새겨진 선각화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구석기 시대 인류의 사고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훌륭한 단서로 가득한 곳이 바로 동굴벽화이다. 원래 어느 시대나 미술활동의 특징 중에 하나이겠지만, 이 벽화들은 구석기인들의 사고활동 흔적이기도 하다.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로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라스코 동굴벽화(Lascaux Cave)와 알타미라 동굴벽화(Altamira Cave)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라스코 동굴에서 발견된 라스코 동굴벽화는 선사시대의 미술활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고학자들은 이 벽화를 기원전 15,000~10,000년에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굴 암벽에 묘사된 그림들은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큰 동물은 550cm, 작은 동물은 100cm 내외의 여러 동물상이 100점 이상 묘사되어 있다. 그려진 동물에는 말이 가장 많고 다음이 소, 그리고 사슴과 돼지, 이리, 곰, 새, 인물상 등도 묘사되어 있다.

       
      ▲ 라스코 동굴벽화 <순록 사냥>과 알타미라 동굴벽화 <들소>

    구석기 동굴벽화도 회화적인 측면에서 진화를 거듭했다. 이와 관련하여 뤽 브느와(Luc Benoist)는 <회화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굴벽화는 선을 그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한결같은 색조의 그림, 그 다음 커다란 검은 소, 작은 몽고말, 새 머리를 한 마법사의 모습이 나타난 라스코 지역의 일그러진 구도의 그림을 거쳐서 루피냑 지역에서는 코뿔소와 매머드의 모습을 나타내는 울긋불긋한 색채의 그림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진보의 마지막 모습은 18미터의 천정과, 커다란 암사슴의 발밑으로 뛰어드는 들소가 그려진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 나타난다. 벽화가 나타내는 현실적 예술은 중석기시대인 기원전 8000년 이후 우리에게서 사라졌으며 점점 더 추상적으로 되어가는 중석기시대의 문자 표기법에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라스코 동굴벽화와 알타미라 동굴벽화에 나타난, 들소의 모습을 표현한 방식을 봐도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라스코 동굴벽화 자체도 일정하게 진화된 표현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단순한 외곽선으로 그리던 것이 점점 복잡한 선을 구사하는 것으로 발전해 왔음을 보여준다. 그림을 보면 갈기를 나타낸 세로선과 복부의 두텁고 부드러운 선을 분류하여 사용함으로써 커다란 동물의 특징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들소의 머리 부분을 보면 상세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날카로운 뿔의 모습이라든가 눈과 입의 모습과 위치가 꽤 사실적이다. 발굽을 보면 두 개로 갈라놓고 있어서 사실적인 묘사에 충실하려 했던 의도를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들소의 복부를 보면 창을 맞아 창자가 튀어나온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앞에는 넘어진 인간도 그려서 사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들소는 한 단계 더 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채색이다. 윤곽선과 들소의 갈기털은 검정색으로, 몸은 갈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들소의 형태도 더 안정되었는데, 들소의 앞다리와 뒷다리의 구조 차이가 그림 속에 잘 나타나있다. 갈기털의 묘사도 훨씬 사실적이다.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보면 구석기인들이 얼마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동굴을 미켈란젤로의 벽화로 유명한 바티칸 궁전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견주어 ‘구석기 시대의 시스티나 예배당’이라고 부를 정도로 다른 동굴벽화와 비교하여 현격한 완성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생존을 위한 공동체 의식

    구석기인들이 가지고 있던 의식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동굴벽화를 그린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 그렸을까? 일단 장식을 위한 욕구나 표현욕, 즉 미의식의 발로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동굴벽화가 그려진 위치를 보더라도 미의식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동굴벽화는 동굴 속 아주 깊은 곳에,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없는 곳에 그려져 있다. 매우 어두워서 감상을 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벽화들이 자신의 생활공간인 동굴을 장식하기 위한 심미적 목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곰브리치(Gombrich)도 <서양미술사>에서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구석기인들은 한 마리 소의 머리 위에 다른 소를 그려 놓는다든지, 아무런 질서나 구성이 없이 흔히 뒤죽박죽으로 그려 넣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장식을 목적으로 그렸다고는 보기 어렵다.

    일차적인 목적은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주술적인 요소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물론 생존을 위한 목적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그렇다면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식량이 되었던 순록은 어째서 동굴 그림에 드물게 나오는가라는 반론이 제기되곤 한다.

    실제로 이 시기, 즉 약 11,000∼17,000년 전의 시기를 순록의 시기라고 부를 정도로 현재의 프랑스와 스페인 지역에는 사슴이 많이 살고 있었다. 당연히 순록은 중요한 식량 공급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주요 수렵 대상이었던 순록은 매우 드물게만 등장하느냐, 이걸 보더라도 생존의 문제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되는 것이다.

    하지만 주술은 언제나 현재를 그대로 표현하기 보다는 희망을 담기 마련이다. 특히 공동체 전체가 일시적으로나마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큰 짐승을 잡아야 했다. 왜냐하면 작은 짐승들은 별 위험이 없이 쉽게 잡을 수 있지만 먹고살기에는 부족하였고, 하지만 큰 짐승을 잡으면 몇 주일씩 충분한 고기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석기 동굴벽화를 보면 <순록 사냥>처럼 종종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순록을 사냥하는 장면이 나온다. 활을 사용하여 사냥하는 장면인데, 별 위협을 느끼지 않고 사냥에 열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안전하고 수월하게 사냥할 수 있는 순록이 더 빈번하게 사냥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마리만 잡아도 전체의 식량이 해결될 수 있는 큰 짐승을 잡고자 하는 욕구가 구석기인들의 마음을 일상적으로 지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들소나 매머드와 같은 큰 짐승을 잡는 일은 매우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라스코 동굴벽화인 <들소 사냥>만 보더라도 그러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들소의 날카로운 뿔에 받혀 쓰러진 사람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빈약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냥에서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을 것이고 그만큼 생명을 건 싸움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큰 짐승을 잡기 위한 욕망을 가졌고 이를 그림을 통해서 표출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벽화가 사냥, 즉 생존과 연관해서 그려졌을 것이란 예상은 그려진 동물들이 크든 작든 상대적으로 양순한 초식동물이며, 그 동물들은 당시 원시인들이 그나마 사냥하기 만만한, 그래서 가장 좋은 식량 공급원 역할을 하던 대상들이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 라스코 동물벽화 <들소사냥>

    구석기인들에게 하루하루의 생존은 절박한 문제였을 것이다. 구석기 시대에 사냥에 쓰이던 무기라고 해봤자 돌도끼나 나무를 잘라 끝을 깍은 원시적인 창 정도였을 텐데, 이 알량한 무기를 가지고 덩치가 큰 짐승을 잡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공동체의 힘에 의존하는 방법뿐이었다. 공동체의 힘은 단결력과 집단적인 사냥 기술에 의존한다.

    구석기 시대의 벽화들은 이 두 가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밀하게 관찰을 하면 이들 벽화에서는 창을 던진 흔적이 발견된다고 한다. 창을 던지거나 찌름으로써 현실에서도 그 동물을 잡게 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큰 짐승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사냥의 성공에 대한 집단적인 자신감을 형성했을 것이다.

    어디를 어떻게 찔러야 빠른 시간에 최소의 희생으로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집단적 학습 경험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들은 그림이 실제 모습과 똑같으면 똑같을수록 마술의 효력이 잘 나타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술의 출발은 이와 같이 구석기인들의 생존을 위한 공동체의식의 형성, 집단적인 사냥 기술의 습득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하우저(Hauser)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은 타당하다고 보인다. “구석기 시대의 사냥꾼 예술가는 그 그림을 통해 실물 자체를 소유한다고 믿었고,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려진 사물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림 속의 짐승을 죽이면 실제의 짐승도 죽게 마련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미리 예기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마술적 시범에 뒤이어 실제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벽에 그림을 그리는 구석기인들의 태도는 인류학자 레비-브륄의 책에 나오는 어떤 수(Sioux)족 인디언의 사고방식과 같은 것으로 봐야 한다.

    이 인디언은 어떤 탐험가가 들소를 스케치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우리네 들소를 여러 마리 자기 책에 넣어간 것을 나는 안다. 내가 그 현장을 보았으니까. 그 이후로 우리는 들소 구경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왜 인간의 모습은 잘 안 그렸을까? – 지배, 피지배 의식의 형성 이전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림에 그들 자신의 모습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오긴 하지만 매우 드문 경우에 속한다. 그리고 나온다고 하더라도 앞에서 본 라스코 동굴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매우 간단하게, 지극히 형식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들소는 뿔이나 발굽, 갈기털 등을 정성을 다해 상당히 상세하게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기 자신들은 윤곽만 겨우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성의 없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아직 어떠한 개인적인 자의식도 없는 단계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규정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자의식 형성의 지극히 초기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인 자의식 형성의 초기 단계라고 하는 것이 복잡한 사고능력이 없이 오직 본능적인 생각과 행위만 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체력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있는 인간이 날쌔고 위협적인 큰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복잡한 사고를 통해 미리 작전을 짜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무기를 개발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는 사냥 대상에 대한 사고이지 자신에 대한 사고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고의 대상을 인간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 여기에서 자의식은 출발한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의식은 인간에 대한 의식에서 더 나아가서 개별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내면을 탐구의 대상으로 하는 사고를 말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도 필수적으로 자연이 아닌 인간 자체에 대한 사고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구석기인들에게는 생존을 위해 인간 외부의 문제에 대한 인식이 절박했고 아직 자연과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의식은 상당히 희박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벽화에 인간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인간 집단 내부에 지배, 피지배 의식이 형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개인적인 장소도 아니고 공동체가 거주하는 장소에 누군가를 그린다는 것은 그를 그릴만큼 특별한 존재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화상이 아닌 이상 타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진 개인 혹은 소수의 집단이 형성되었을 때 누군가를 그리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동체 내부의 계급적인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계급적인 분화에 기초한 국가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생존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에서 서로 평등한 자격으로 구성원간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간혹 나름대로 정교하게 인간을 묘사한 작품도 발견된다. 구석기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오스트리아의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나 프랑스 로셀 지방에서 발견된 <로셀의 비너스>가 그것이다. 이들 나부상(裸婦像)들은 모두 기원전 25,000~20,000년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류 최초의 조형(造形)으로 평가되고 있다.

       
      ▲ 로셀의 비너스(왼쪽)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커다란 유방을 늘어뜨리고 있다. 허리와 배도 기형적으로 보일 정도로 불룩 나와 있고 엉덩이도 매우 잘 발달해있다. 임신한 여성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여성의 성기가 한 눈에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강조되어 있는 것도 특색이다. 얼굴은 머리에 쓰고 있는 무엇인가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부조 형식이긴 하지만 나타나는 특징은 로셀의 비너스도 비슷하다.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하지만 상당히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인간 자신에 대한 의식이 발달했다는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유방·복부·둔부 등이 극단적으로 풍만하게 묘사된 것을 고려할 때 이 나부상들은 생식·출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즉 다산과 풍요를 위한 주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원시신앙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여신상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인격화된 신 역시 계급 분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설득력이 별로 없다.

    인격화된 신은 지배집단이 지배의 정당성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구성원간의 평등한 관계에 기초한 구석기 시대에 인격화된 신에 대한 발상을 보여주는 다른 자료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10cm가 조금 넘는 작은 크기나 세워둘 수 없게 되어 있는 모양 등이 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며 관람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점에서도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또한 나부상을 당시 구석기인들의 여성에 대한 미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상당히 무리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구석기인들에게 생존의 문제였을 것이다. 아직은 큰 부족집단을 이루어서 살기 이전 단계였기 때문에 자연의 위협에 대응하면서 수렵이든 채집이든 생존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다산이 절대 절명의 과제였을 것이다.

    <로셀의 비너스>를 보면 오른 손에 의미심장한 상징물을 들고 있다. 들소 뿔로 보이는 물건을 들고 있는데, 이는 훗날 들소 뿔과 염소의 뿔로 상징되는 코르누코피아(cornucopia)의 기원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코르누코피아란 끊임없이 음식과 과일을 제공하는 풍요의 뿔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역시 풍요와 다산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굴벽화에 등장하는 그림과 마찬가지로 나부상들도 생존을 위한 인간의 투쟁의식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구석기인들의 자연주의적 사고

    구석기인들의 의식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자연주의적인 사고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경향성이다. 신석기 시대만 하더라도 있는 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 양식이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하우저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아이들의 그림이나 오늘날 원주민들의 예술은 감각의 소산이라기보다 이지(理智)의 소산이다. 즉 그들은 실제로 그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그린다. 시각에 들어온 모습 그대로를 그리는 게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이론적인 종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상의 앞모양에 그 옆모양 또는 위에서 본 모양을 겹치게 그리는가 하면 그 대상의 속성에 관해 알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며 생물학적으로나 혹은 주제상 중요한 요소는 실물보다 크게 그리고, 반면에 그 자체로는 아무리 인상적인 것이라도 당면 대상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역할을 않는 것은 완전히 무시해버린다.

    그런데 구석기 시대 자연주의 미술의 특징은, 근대 인상주의 출현이 있기까지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직접적이고 순수하며 어떠한 이지적인 작용이나 제약도 받지 않는 형태로 시각적인 인상을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굴벽화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구석기인들은 그들이 당시의 수준에서 표현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사실에 충실했다. 동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한 노력이 곳곳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이것은 구석기인들이 아직 추상적인 개념이나 고정 불변성을 지니는 형상에 대한 인식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리는 산(山)은 사실 현실의 산을 그린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산을 그리라고 하면 삼각형 모양을 두세 개 겹쳐서 산을 묘사한다. 하지만 현실에 이렇게 삼각형으로 생긴 산이 어디 있는가?

    우리 머리 안에서 개념화되고 일반화된 산의 모습을 무심코 도화지에 옮기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지, 실제의 산을 관찰하여 그린 것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교육 과정에서 개별성을 넘어서는 고정된 개념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신석기 시대만 하더라도 이러한 양식적 특징이 나타난다. 시각적으로 서로 이질적인 요소를 이지적으로 연결시켜 하나의 작품 속에 담는 수법이 나타난다. 동물의 모습도 간결하게 추상화되고 개별적인 실제 동물의 모습이 점차 사라진다. 감각적 인상의 직접성 대신에 추상화된 개념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하지만 구석기인들은 그가 실제로 본 것을 그리며 어떤 특정한 순간에 한 눈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 이상은 그리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구석기인들의 사유 방식은 자연주의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격화된 신처럼 어떤 피안의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의존이나 그러한 존재를 통해 현실의 고통을 내세를 통해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으로서의 주술이 아니라 당면한 생존과 관련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고, 직접적인 행동을 뒷받침하는 의미에서의 주술 행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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